그녀의 장편 소설이 갖는 질문은 간단하다

노벨 연설에서 말했듯이 그 질문은 그녀의 작품 전체를 관통함과 동시에 한강이라는 사람의 실존을 관통하는 거대한 질문이다


왜 이 세계에 폭력과 고통이 존재하는가?


그녀는 채식주의자에서 이 근본적 질문과 조우하는데 (한강에게 이 질문은 어떠한 의미에서 외상적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가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라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다소 약삭빠른 방식으로 어떤 몸을- 그것이 식물이든 동물이든 - 파괴하는 행위, 즉 생이라는, 한강에게는 실존의 궁극적 의미를 앗아가는 모든 활동을 폭력이라 규정짓는다


그렇다면 고통은 바로 이 생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 즉 인간 존재의 유한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강에게 가장 외상적인 질문은 바로 이 질문 "왜 인간 존재는 필시 사멸할 운명인가?" 이며 그녀는 이 질문을 "왜 이 세계에 폭력과 고통이 존재하는 가?" 로 전치시킨다


자 그렇다면 이게 왜 문제가 되는 가? 


좀 더 공격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순결한 휴머니스트의 가면을 쓰면 왜 안 된다는 말인가?  그 이유는 폭력과 고통을 식별하는 바로 그 행위가 사실 가장 큰 폭력이라는 사실을 가리는 가면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주제가 그녀의 문학 전체를 관통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주제는 원죄이며 때로는 인간이 삶을 구성하는 행위(예컨대, 육식을 하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순결한 생을 폭력적으로 약탈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한강의 비관적 허무주의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인간의 존재가 바로 폭력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놓는다


'폭력을 가하는 몸과 폭력을 받는 몸' 두 가지가 존재한다 


이 질문의 전치가 가지는 함의는 바로 구 원과 회복의 가능성이다

만약 인간 존재 그 자체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타락된 상태여서 구 원의 길은 인간 존재의 절멸, 혹은 종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는 방법 밖에 없다면 


그러한 행위 자체는 절대로 구 원이 될 수 없는 데

한강에게 인간 존재의 고통과 그 구 원이라는 틀의 무대에서 작용하는 프레임 자체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즉 구 원은 존재의 고통과 폭력에 아파하는 휴머니스트의 가면을 쓴 자가 가질 수 있는 의미이자 포기할 수 없는 향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틀은 역시 한강이 조우하길 꺼려하는 질문을 드러낸다

"인간은 왜 사멸하는가"


문제가 되는 지점은 이 지점이다


그녀는 이제 질문의 형태를 이런식으로 바꾼다


왜 고통과 폭력을 부과하는 존재가 있는가?


그녀는 일종의 존재론적 정화를 통해서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원자들을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폭력적 타자이다


이는 그녀의 감산적 몸짓의 거짓을 드러낸다 예컨대 채식주의자에서 영혜의 폭력에 대한 거부는 필경사 바틀비에서 볼 수 있는 바틀비적 몸짓으로 속해있는 세계를 급진적으로 거부하는 것과는 다르다


영혜의 행위는 주변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데 영혜의 행위는 수신자들이 있어야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의 문학은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그녀는 일종의 폭력적인 세계를 조망하는 육체 없는 시선을 획득한다


상처받는 인간 존재의 연약함은 타자의 원죄와 폭력 앞에서만 그 순결함을 유지한다 


그녀는 이 모든 행위가 사회적 역사적 혹은 정치경제적 맥락 없이 기능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즉 폭력은 총칼을 든 군인이 피해자를 찌르는 직접적이고 명확한 층위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녀의 인간주의적 접근의 틀 자체가 바로 그 폭력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라면 어찌할 건가에 대한 답은 없다


성급한 결론을 내리면 한강에게 고통과 폭력의 기능은


사실 왜 인간 존재는 사멸하는가 라는 질문과 덧없는 삶을 보호하는 의미로 작용한다


이는 악을 식별하는 순수의 공간을 열어놓는다 구 원을 위한.

그래서 한강의 nihilistic humanism이 겨냥하는 것은


인간의 원죄의 절대성이며 이는 역설적으로 고통과 폭력의 존재, 그리고 그것들을 식별하는 행위를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