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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 최은미, 김금희, 백수린, 강화길, 최은영, 천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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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17)


스포주의


2017년은 어떤 해였나. 바깥세상에서는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 파면이 이루어져 조기 대선이 치러진 해였고 인터넷 세상에서는 ‘메갈리아’가 분열되어 ‘워마드’가 생겨난 해였지. 문학 세상은 어땠나. 사건 나열로 맥락을 대신하는 페.미니즘 리부트를 연 ‘82년생 김지영’과 두셋의 인물 간 관계에 집중하는 사소설 리부트를 연 ‘쇼코의 미소’가 발간되고 몇 달이 지난 해였지. 한 마디로, 어느 면에서든 혼란스럽기에 짝이 없던 해가 아니었나 싶음. 반대로 그렇다는 건 어느 면에서든 ‘과도기’에 있던 해였다고도 할 수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2017 제8회 젊은작가상’은 시대의 ‘과도기적 정체성’이 응집된 작품집으로 보임. 그야말로 어느 면에서든.


그러니 작품들의 개별 감상보다는 이 책이 왜 이런 구성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우선적으로 보려고 함. 대상작을 제외하고는 순위는 없는 것 같으나 편의상 수록 순서를 순위라 생각하고 거꾸로 마지막 작품부터 올라가겠음.



천희란의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와 최은영의 ‘그 여름’은 묶어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우선 ‘다프푸’는 어머니의 죽음에 늘 의문을 가짐과 동시에 고아가 된 자신을 거둬 준 ‘선생님’에게 감사와 존경을 마지않는 ‘효주’와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며 효주를 지원한 선생님이 편지를 주고받는 서간체 형식의 소설이고, ‘그여름’은 고등학생 때 처음 만난 ‘이경’과 ‘수이’의 연애와 이별에 대해 삼인칭으로 다룬 소설임.


둘을 묶은 이유는, 여성 동성애 코드를 다룬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인물 관계를 그리는 법에는 차이가 (매우) 크기 때문임. 우선 다프푸는 동성애를 반전 요소로 활용함과 동시에 갈등 요소 위치에 두지만, 그여름은 인물들 이별에 동성애가 미치는 영향이 조금도 없음. 또한 다프푸에선 부모(특히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하게 나오지만 그여름에서는 부모의 존재를 경계라도 하듯 지움.


이렇게 보면 다프푸가 그여름보다 조금 더 ‘전형적인’ 퀴어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전형적인 전개라는 것 자체가 퀴어물을 비하하는 것이 아닐까 싶지만), 그렇기에 두 작품의 순위가 엇갈리지 않았나 싶음. 동성애를 반전으로 활용함에도 결말 예측이 가능할 정도의 작품과 자신들이 여성이라는 것이 연애에 있어 하등 중요한 요소가 아닌 작품 중에 어느 게 ‘더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냐고 하면 단연 후자이기 때문임. 그러나 그렇게 더 나은 작품이면 그여름만 뽑으면 됐지, 퀴어 쿼터도 아니고 다프푸까지 선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사연 전체를 다루는 능숙함 때문이 아닐까 싶음. 편지 형식의 전개로 서두르지 않고 서사(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양한 방향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려서, 곁다리로 보일 수 있는 설정까지 주요 이야기 안에 보기 좋게 편입시켜 이야기 범위를 꽤 크게 설정함. 또한 가족과 후견 사이의 정중함과 진지함이 미스터리함을 극대화해 글 자체의 분위기가 좋음. 즉, ‘그렇다 한들’ 글이 우습지가 않음. 그렇기에 엔딩의 (개인적으로는 큰) 헛헛함에도 불구하고 젊은작가상에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지 않았나 싶음. 소위 기본적인 ‘글빨’이 있다고 생각함.


그럼 반대로 그여름은 어떤가. 고등학생이던 이경과 수이는 서로 첫눈에 반한 듯한 만남 이후 자신들이 성소수자라는(일지도 모른다는) 고민 따위 일절 없이 자연스럽게 연애를 시작함. 이별의 원인도 서로 다른 위치에 머물기 시작한 두 사람의 입장 차이로 인한 다툼과 속된 말로 ‘더 끌리는 사람’의 등장으로 인한 내적 갈등 정도이지 동성애를 바라보는 사회의 따가운 시선 따위 둘의 갈등 원인에 조금도 보탬이 안 됨. 그렇다면 이 작품은 완전무결한 세상 속 저들만의 안온하고 격렬한 사랑을 노래한 소설인가? 그건 또 아님. 여성이라는 소수자로서 당하는 폭력과 동성애자라는 소수자로서 겪는 아픔이 (약하게나마) 나오기 때문임. 인물들을 더 단단히 결속하는 요인이지 관계를 방해하는 요인이 아닐 뿐이지.


그 밖의 구성에서는 영리함이 보이는데, ‘동성애 이야기는 동성애자만이 써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삼인칭 화법으로 극한의 당사자성을 회피해 ‘여성’ 작가가 ‘여성’ 동성애 이야기를 쓰는 것일 뿐이라고 답함.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으니 부드럽다고 할 수 있고 그 부드러운 잔잔함이 어떤 식으로든 극을 해치지 않음. 다만 ‘소재주의’에 그치지 않을 만큼 이 이야기에 무언가 있다고 하기엔 좀 어려움. 하지만 그건 또 동성애 코드에선 무언가 확실한 주제(교훈)가 있어야 하는 거냐는 반박에 답할 말이 없으니 넘어갈 수밖에.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멜로드라마’라는 심사평에 수긍할 수밖에 없음. 여러모로 섬세하고 유약하고 답답하다는, 최은영만의 장단점이 잘 녹아든 작품이라고 생각함. 더 이상 여성 동성애 코드를 못 본 척할 수 없는 상태에서 선정할 수 있는 최선의 작품이 아니었나 싶음.


이 두 작품으로 두 가지 쟁점을 추출할 수 있음. 첫 번째는 문학계에 여성 동성애(성소수자) 소재가 많아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는 심사평에서도 언급한다), 두 번째는 그와 동시에 전개 방식이나 갈등 요인이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 이렇게 지향하는 바는 같을 수 있으나 표현 방식에 크나큰 차이가 있는 작품들이 한 수상집 안에 있는 것 자체가 범람하기 시작하는 성소수자 문학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평단의 고민이 보이는 과도기적 특성으로 보임.



강화길의 ‘호수-다른 사람’은 분위기만 놓고 보면 가장 이질적임. 공포에 가깝게 장르적 특징이 나타나는 어지러운 전개가 돋보이기 때문. 주인공 ‘진영’은 호숫가에서 괴한의 습격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친구 ‘민영’의 말에 따라 무언가를 찾기 위해 유력 용의자나 증거는 없는, 민영의 남자 친구 ‘이한’과 호숫가로 향하게 되는데 이 짧은 동행과 호숫가에서 (그놈의) 무언가를 찾는 그 짧은 과정에서 진영은 정신 분열에 가까울 정도의 불안 증세를 보임. 즉, 스토커나 (성)폭행 등 여성의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범죄와 그 범죄에 대한 불안이 사람을 어디까지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보여줌.


강화길은 여성 서사적 고딕 소설을 쓰는 작가로 알고 있는데, 어지러운 전개와 별개로 글이 너무 매끄럽게 읽혀서 놀랐음. 현실과 회상과 환상이 섞이는 연출이 중구난방으로 보이긴 하나 중심이 흔들리지는 않아 단점보단 장점으로 잘 작용했다고 생각함.


그래서 결국 그보단 민영이 놓고 온 것이 무엇인지, 이한이 발견했다고 한 것이 무엇인지, 막판에 진영이 잡은 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는 그 작은 부분이 단점으로 느껴지나, 가장 중요한 소재로 느껴지던 것을 순식간에 맥거핀으로 만들어 버리는 엔딩이야말로 이 작품의 백미이자 과도기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음. 호수 바닥에서 무언가를 잡고 간신히 일어선 진영은 자신을 물에 빠뜨린 이한과 마주하고서 ‘해야 할 일을 했다’는 암시로 이야기가 끝나는데, 그 ‘해야 할 일’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임.


단순히 생각하면 진영이 한 일은 둘 중 하나겠지. 잡은 물체를 이한에게 휘두르거나 그걸 지팡이 삼아 호수에서 빠져나오거나. 하지만 독자로선 진영이 이한에게 물건을 휘두르든 소리치든 화내기를 바람. 이걸 현실의 여성들에게 자신을 억압하는 (주로 남성들로 인해 일어나는) 불안에 맞서 반격하라는 메시지로 본다면 너무 큰 곡해일까. 작가노트를 보면 작가는 사람들이 피해자 신체에 대해 논하는 것보다 피해자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지를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김을 알 수 있음. 그렇다면 민영이 두고 온 것은 응축된 ‘분노’인 셈임. 남성인 이한은 그 분노를 이해할 수 없기에 진영을 부른 것이고, 진영이 물에서 허우적거린 시간은 민영의 분노와 자신의 분노의 결이 실은 동일하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던 것임. 이한을 이름보다 ‘그’라고 지칭하는 것도 그를 특정 인물이 아닌 보편적인 성별로 확대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음.


그러나 이 해석을 ‘정답’으로 생각하기엔 너무나 열린 결말임. 정말로 진영이 무얼 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 그러나 그렇기에 그것이 첨예한 젠더 갈등(의 이름을 쓴 일방적 젠더 혐오 폭로)이 시작되는 그 시기에 나올 수 있었던 과도기적 결말이라고 생각함.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여성들에게 묻는.



백수린의 ‘고요한 사건’과 김금희의 ‘문상’은 잠시 쉬어가는 코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음. 두 작품 모두 격렬함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슴슴하기 때문임. 또한 둘 다 궁극적으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감이 잘 안 옴.


먼저 백수린은... ‘친애하고, 친애하는’ 후기에서 분위기 말고 건질 게 없다는 식의 혹평을 했는데(젊은 국문학 여러가지 찍먹 후기 10)... ‘고사건’에서도 그 감상이 이어짐. 발표순으로 보면 고사건이 먼저이니, 어쩌면 이 작가는 (두 작품밖에 읽지 않아서 속단하는 것일 수 있겠다만) 놀랍도록 일관적인 태도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음. 인물 구성이며 줄거리며 전혀 다른데도.


그 ‘일관적인 태도’라 함은, 계속 말하듯 작품의 ‘분위기’만 챙겨가는 행위임. 재개발을 노리고 달동네로 이사한 ‘나’의 가족을 통해,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라는 부모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달동네의 ‘해지’와 ‘무호’와 친구가 된 나를 통해 달동네와 언덕 너머 아파트의 대조적인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소설의 골자임. 그리고 그 안에서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는 것처럼 조금 이전 시대의 낯설면서도 친근한 분위기나, 달동네의 추저분하면서도 정감 가는 분위기, 여자 2, 남자 1로 이루어진 친구 집단의 기묘한 분위기를 어째선지 감각적으로 느껴질 만큼 편안하면서도 감성적으로 구현하는 면은 뛰어나나... 그게 전부임. 그 외엔 모든 게 어정쩡함.


해설에선 ‘심미적 주체성의 윤리적 난경’을 운운하고 심사평에서는 전형적인 성장 소설 속에 계층 문제를 은밀히 환기하고 있다는데... 성장 소설이라고 하기엔 성장의 기로에서 결국 주인공은 비(非)성장을 택하고, 전체적으론 본격적인 계층 문제에는 도달하지도 못한 채 ‘을’에 위치한 이들의 내부 알력 정도에 그침. 심미적 어쩌고를 논하기엔 그건 그냥 문체를 칭찬하는 수준에 불과하다고 생각함. 아니, 그래, 없진 않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아. 근데 그건 어쨌든 전방위로 다루긴 했으니 알 것 같음의 ‘느낌’으로 추측하는 거지, 작품 내에 (방향으로라도) 명확하게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음. ‘친애’ 후기에서 ‘이 정도 썼으면 여성 서사에 예민한 독자들이 알아서 좋게 해석해 줄 거라 믿은 것 같음’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도 똑같이 적용됨. 적당히 무던한 문체로 이쯤 화려하게 버무려 썼으면 해석에 예민한 독자들이 알아서 좋게 포장해 줄 거라 믿은 것 같음. 소재며 내용이 없지는 않으니 평론가들 입장에선 맛볼 거리가 많겠다만, 일반 독자 입장에선 대충 분위기만 좋은 소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음.


근데 또 그게...! 나쁘진 않아. 분위기만 챙기는데 그 분위기가 괜찮아. 느낌만 챙기는데 그 느낌을 너무 잘 챙겨. 그래서 더 화가 나.


김금희의 문상은 보며 놀란 게, ‘경애의 마음’에서의 ‘상수’스러움이 이 작가의 페르소나인가...? 싶은 생각이 들 만큼 ‘희극배우’와 상수가 닮았음(젊은 국문학 여러가지 찍먹 후기 6). 물론 ‘경애’보다 이 작품이 먼저 나왔으니 상수가 희극배우를 닮은 것이겠지만. 어쨌든, 조금은 나사 빠지고 혼자 중얼거리며 혼자 엄청 진지하고 친화력은 전혀 없으면서 외로움 속에서 온기를 갈망하는 중년 남성을... 적나라하게 참 잘 그림. 중심인물을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게 잘 표현함. 아니면 조롱하려다가 굳어 버린 건가...? 그것까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인물을 그리는 실력과 별개로 서사는 영 맹탕임. ‘경애’에서 미지근한 물 같다고 한 표현이 여기서도 유효함. 정말 미지근한 물 한 컵을 한 열 번에 나눠서 조금씩 꾸울꺽 꾸울꺽 마시는 기분임. 희극배우의 부친상에 간 ‘송’은 부담스럽기에 짝이 없는 희극배우와 잠시 이야기 나누는 걸 넘어 산책에 식사까지 하는데, 그 과정에서 헤어진 연인 ‘양’을 (생각지도 못하게) 떠올리게 되고 조모의 장례식을 떠올리게 됨. 중간중간 인물들의 과거를 효과적으로 활용해서 극의 크기를 점점 불려 나가는 형식임.


그러나 그 효과적으로 키워가는 판에서, 모호하지 말아야 할(말았으면 하는) 지점에서 과감하게 모호해져서 읽을수록 갈피가 안 잡힘. 삼인칭 시점임에도 희극배우의 속마음을 꼭꼭 숨기니 독자가 알아서 찾고 판단해야 하는데, 애초에 그렇게까지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니란 말이지... 송도 요샛말로 ‘하남자’에 불과하고... 이 그저 그런 두 남성을 내세워 작가가 하고픈 말이 뭔지를 잘 모르겠음. 그러니 그냥 ‘하남자 전시 쇼’처럼만 보일 뿐임. 인물을 뛰어넘는 서사의 맥락이 보이지 않음.


혹평을 이어가자면 이 두 작품은 심사위원들의 안일함으로 선정된 게 아닐까 싶음. 못 쓴 소설들이라는 건 절대 아님. 다만 온갖 상징을 활용해 자세하게 올려 칠 정도로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임. 작가도 해설진도 평론진도 독자를 설득하지 못하니 결국 자기들끼리만 아는 얘기한다고 느껴질 뿐. 여기서의 쟁점이자 과도기적 특성은 이게 아닐까. 세상이 변화한들 놓칠 수 없는 평단의 자존심. 유행하는 이야기들만 있으면 되나, 이런 차분하고 착실한 작품들도 있어야지. 본인들이 잘 썼다고 이미 인정한 작가들은(실제로 이 책까지 백수린은 ‘젊작상’을 두 번, 김금희는 세 번 탔다) 이번엔 조금 부진할지언정 다음 작품은 괜찮을 거란 낙관적이고 오만한 확신. 그러니 이도 저도 아닌 가운데에 위치하겠지. 작가들보다 심사위원들이 더 별로인 순간이다.



최은미의 ‘눈으로 만든 사람’은 비천륜적 폭력과 배덕 사이 여성 주인공의 아픔과 욕망을 흐릿하면서도 섬찟하게 잘 표현함. ‘주옥같고 지옥 같다’는 해설이 딱 맞음. 이렇게 학대라고 느껴질 정도로 주인공을 지독한 환경에 몰아붙이는 소설은 오랜만임. 간략히 말하자면 주인공 ‘강윤희’는 1. 어릴 적 작은아버지의 성폭행으로 평생 진통제와 항생제를 달고 살고 있으며 2. 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으나 성조숙증 증세를 보이는 딸 ‘백아영’의 치료 방법을 두고 남편 ‘백은호’와 갈등하고 3. 와중에 작은아버지 ‘강중식’은 뻔뻔스럽게도 자기네 사정이 어렵다며 암 진단받은 중학생 아들 ‘강민서’를 한동안 돌봐달라고 강윤희에게 부탁하며 4. 강윤희는 본인 생각보다 훌쩍 큰 강민서를 딸과 같은 공간에 두는 걸 꺼림을 넘어 불안해하고 5. 그러면서 백은호, 백아영 부녀는 ‘유사 근친’으로 보일 수준의 껄끄러운 스킨십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6. 와중에 딸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자 다시금 성욕이 생긴 강윤희는 오롯이 제 몸에만 몰두해 줄 남자와의 성관계를 꿈꿈... 적당히들 해라!


가장 큰 특징은 강윤희의 존재 그 자체. 얼핏 보면 이 소설은 강윤희라는 인물이 평생에 걸쳐 겪은 ‘불행 포르노’의 집합이라고 볼 수 있음. 그러나 강윤희를 피해자의 위치에만 가두지 않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입체감을 살림. 삶이라는 형벌에 대항하고 있다는 절박함도 아니고 자신을 그렇게 만든 모든 대상에 복수하는 분노도 아닌, 어쨌든 죄 없는 사촌 동생에겐 맛있는 밥을 해 준다거나 가끔은 현실을 잊고 몸의 쾌락에만 몰두하고 싶어 하는 욕망 같은, 아주 사소한 입체감이 인물과 동시에 극 전체를 풍성하게 만듦. 여러모로 주인공 한 명에게 마음이 쏠리도록 판을 잘 깔았음.


이 작품에서의 과도기적 특성은 강윤희가 지키고 있는 ‘선’이 아닐까 싶음. 용서를 구하는 강중식의 면전에 화를 내거나 하다못해 죽이는 상상을 하는 것이 아닌 넋을 놓는 그 선. 새벽에 조용히 강민서와 얘기를 나누다 (성적 긴장감이 느껴지는 서술을 뒤로하고) 단호하게 라면을 끓이는 그 선. 혼몽한 와중 백은호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들이는 그 선. 충분히 불온하게 나갈 수 있는 모든 분기점에서 강윤희는 최악보단 차악을, 차악보단 차선을 택함.


결국 이 작품은 빠져나갈 수 없는 가족 속 불행을 여성 구성원 입장에서 보여주는 것이 주목적인 선을 지독하리만치 잘 타서 집필 목적에는 성공해 상당히 높은 순위로 선정되었지만, 너무나 강렬한 캐릭터 학대로 독자가 인물에 대해 일차원적인 딱함만 느낄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남음. 이보다 이 년이 흐른 2019년에야 불온함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미상의 ‘하긴’이 수상집에 선정된 걸 보면, 어쩌면 이때는 아직 일렀을 수도.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마지막으로 대상작, 임현의 ‘고두’는 자기방어와 자기 연민을 기제로 한 뒤틀린 윤리의식을 가진 윤리 교사 ‘나’가 불량 학생이라고 할 수 있는 ‘연주’와의 과거 회상을 통해 ‘너’에게 용서를 구하는 내용의 이야기임.


솔직히 글맛은 나쁘지 않음. 순수 필력만 보면 수상작 중에서 상황이 (전개와 별개로) 편하게 그려지는 솜씨는 가장 좋음. 능청스러움이란 가면 아래 철저한 기만으로 일관하는 주인공을 심판대에 올려놓고 같잖은 윤리의식을 꼬집는 구조도 좋고. 여러모로 수상에 납득이 감.


다만 대상까지 받을 만한 작품이었냐 하면, 살짝 갸웃하게 됨. 그만큼 무난하긴 하나 특출난 구석은 딱히 보이지 않기 때문임. 못 썼냐 잘 썼냐 하면, 잘 썼음. 근데 미쳤냐 아니냐 하면, 아니라는 뜻. 그 말은 즉, 이 작품에서 가장 생각해야 할 지점은 필력이나 주제 등이 아니라 ‘왜 대상으로 선정되었는지’가 된다는 말. 갑자기 기준이 너무 높아지는 거 아님? 대상이잖아... 왜 대상인지 파악은 해야지...


그리고 그 이유는, ‘최근 한국 소설에서 잘 들리지 않던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반가웠다’는 해설 대목으로 굉장히 허무하게 알 수 있게 됨. 아, 그랬군요... 남성 작가가 쓴 무난한 풍자 소설이라는 것 자체가 점수에 영향이 갔다고 스스로 자백하는 모양새... 그렇다는 건 이 작품은 해설까지 합쳤을 때 그것으로 거대한, 시대의 과도기적 특성이 되어 버림. 소수자 얘기 좋지, 여성 서사 좋지, 근데 아직 대상감은 아니야. 어이쿠, 괜찮은 남작가 작품이 있네. 썩 뛰어나진 않지만 그래도 아직은 이런 게 대상감이지. 이런 거 아니냐고.


여기서 ‘무난하다’, ‘썩 뛰어나진 않다’는 표현은 개인적인 감상이기도 하지만 심사 경위와 평을 보면 위원들도 어느 정도는 느꼈다는 걸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음. 본심 중에서 어지간히 인재 없었나 싶기도 하고, 그럼에도 대상은 여작가한텐 죽어도 주기 싫었나 싶기도 함. 이는 뒤늦게 독서를 접한 젊은 국문학 애호가 입장에서 ‘왜 여자한테 안 줬어’ 징징이 아니라, 이 작품이 반드시 대상이어야만 하는 명확한 이유를 아무도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상이라고 생각함. 많은 의미로 ‘부전승’인 결과로 보임.


이건 ‘용서’와 ‘사과’라는 키워드로 한 번 더 짚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른 수상작인 다프푸와 엮어서 남성이 여성에게 하는 사과와 여성이 여성에게 하는 사과를 남작가와 여작가가 각각 어떻게 그렸는지를 대칭적으로 살펴보는 것도 한 재미로 보임. 그중 하나는 대상작이고 하나는 마지막 수상작이라는 것 또한.


거듭 말하지만 괜찮은 소설임. 작품 내적으로는 불쾌함을 잘 의도해서 싫든 좋든 주인공의 넋두리를 별수 없이 끝까지 따라가게 하는 힘이 있음. 다만 거듭 말하지만 외적으로는 이 책에 실린 일곱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소설인가 하면,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아니라는 말. 여러모로... 너무나 무난한 소설에 너무나 가소로운 해설이었음.



전체적인 감상을 정리하자면, 솔직히 큰 재미는 없었음. 더 솔직히는 독태기 올 정도로 너무 힘들었음. 독서도 후기 작성도. 젊작상을 처음 읽는 입장에서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 젊작상이라는 책(선정 – 결과 – 해설로 이어지는 흐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쇼’ 정도로만 보였기 때문임. 국문학 최전선에서 신진 작가를 발굴하고 새로운 작품을 소개한다는 콘셉트는 좋으나, 말만 거창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딱히 엄청나게 긍정적인 에너지로는 느껴지지 않았음. 특히 이 책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심사 경위와 평에서 ‘우리도 줄 사람 찾기 힘들었다’고 토로하는 면이 좀 많이 보여 뭐지 싶음.


그러나 어쨌든 감상은 상대적인 거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이 책에 국한된 개인적인 감상이니 이 중 재밌게 읽은 작품이 있거나 다른 연도 작품집 중 재밌는 게 있다면 후기 공유나 소개 부탁.


아무튼, 국문학계의 2017년은 이랬군요. 서로 눈치 오지게 보고 간 오지게 보더군요. 그걸 파악한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독서가 아니었나 싶음.






3.0 / 5.0

시대의 과도기적 특성이 오롯하게 담겨 있다

25. 06. 10. 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