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청색과 녹색이 교차하는 지점은 청록색이다. 때로는 녹청이라 불러도 될까. 두 색이 때때로 조화로운 것에서 벗어났다면, 블루는 청록의 바탕이 되며,
녹청은 그린이 그 밑에 깔려 있는 것이다. 기형도 시는 그런 부조에 있다. 청색과 녹색이 뒤섞이지만, 결코 청록이 되지 않는, 도시 안에서는 촌놈처럼
어색함을 치장하고, 추억을 되짚는 싯구에는 도시민처럼 냉정한 회상이 자리한다. 그런 이질감을 김현은 '그로테스크' 하다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두
색이 비록 엉겨붙어 혼란스럽게 보이긴해도 어떻든 청색과 녹색은 구별된다. 싯구들이 일으키는 부조 속에 두 지점을 연결지음으로써 기형도라는 이
방인을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방인은 그에게 달려있는 낯선 꼬리표가 떼어지기 전까지는 결코 '이방인'을 벗어날 수 없다. 때로 이방인은 타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저 땅이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덮이기 전 황무지에 함몰된 기억들을 끝끝내 안고 있는 사람도 해당된다. 저 땅과의 내밀한 추억은
이방인이 결코 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방인에게 삶이란 두 세계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서 어느 것도 버리지 못하고 어느 것도 완전히 품을 수 없는,
불일치한 세계를 방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록이라는 두 세계의 합의점에서 기형도는 없다. 다만 독자는 두 색을 번갈아 봄으로써 얼핏 교차점을
희미하게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김현은 이런 점을 뭉뚱그린 나머지 몹쓸 선입견을 낳았다.
시에는 일개 경험을 넘어서 가는 것이 있고, 경험이 붙지 않으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것 등이 있다. 기형도 시는 후자에 속한다. 시어로 쓰이는 '신작로', '삼
발이', '회색' 등등은 7, 80년대 급격한 개발로 도시화되어 가던 그 시절 시인이 시상했던 세계였다. 아마도 시간이 갈수록 기형도 시집에는 그 시절을 재현해
서 이해시키키위해 본문보다 몇 배나 긴 주석이 달려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특수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지 못했던 후대 독자들은 기형도 시를 전적으로 받
아들이기 힘들것이다. 왜냐하면 경험에서 갖는 실재 감각보다 언어적 맥락에서 얻는 상상력은 항상 열등했기 때문이다.
시집은 읽어도 비평은 거의 읽지 않는데, 김현 평이 자극적으로 거슬려서 한 번 써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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