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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의 백합」은 연애 소설로 분류된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열렬히 사랑을 고백하는 화자(펠릭스)들의 문장은 마음을 울린다. 「골짜기의 백합」은 동시에 심리 소설로도 분류할 수 있다. 단순히 연애 심리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틀에 박힌 삶에서 괴로워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펠릭스가 자신의 마음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으니 성장 소설로도 볼 수 있고, 자연에 대한 세심한 묘사를 생각하면 전원 소설로도 볼 수 있다. 이렇듯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는 만큼 「골짜기의 백합」은 다양한 관점에서 읽을 수 있는 종합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완성도와는 별개로 정말 답답한 작품이기도 하다. 결국 작중에서 속 시원하게 정리되는 관계는 전무하다. 펠릭스가 예전보다 인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고 해도 펠릭스가 딱히 더 성숙해지지는 않은 것 같다. 남는 것은 가엾은 모르소프 부인의 모성적인 사랑뿐이다. '골짜기의 백합'이라는 제목은 골짜기의 성에서 자애롭게 병든 가족들과 펠릭스를 보듬는 모르소프 부인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소설의 내용을 생각하면 차라리 '골짜기의 고구마'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성싶다.

「골짜기의 백합」의 사랑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펠릭스나 모르소프 부인이나 어렸을 적부터 정서적으로 학대를 받던 사람이었다. 그나마 펠릭스는 성인이 되어 자율권을 얻어 가는 수순에 있었지만 모르소프 부인은 안 하느니만 못한 결혼과 자녀들의 병환 때문에 영원히 고통받을 운명이었다. 이런 둘이 서로를 껴안은 것은, 물론 숭고한 감정이 순간적으로 싹터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어쩌면 서로 유년 시절부터 결핍됐던 것을 보상받기 위해 맺은 충동적인 계약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둘의 사랑에 담긴 의도는 의심스러울 뿐 확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둘이 발한 사랑의 방향이 달랐던 것은 명백하다. 펠릭스가 모르소프 부인에 품은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 즉 남자가 여자에게 품는 충동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이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펠릭스 본인도 은근히 알고 있었듯이 부당한 사랑이기도 했다. 결혼 생활이 불행한 것과는 별개로 모르소프 부인은 아무튼 결혼을 했고 이를 깨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모르소프 부인 또한 펠릭스에게 일반적인 연정을 품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모르소프 부인은 가족을 포기할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노예근성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아무리 마음의 병 때문이라지만 자신과 자식 모두에게 괴로움을 주는 남편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르소프 부인이 갈구한 것은 사랑보다는 평화였다. 자신이 조금 불행하더라도, 그 대가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평안할 수 있다면 그녀는 희생을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모르소프 부인의 심리에는 연애 감정에 더해 모성애가 섞여 있었고, 둘 다 무시할 수는 없지만 모성애가 더 강했다. 연인 사이의 사랑을 기대하던 펠릭스와 같은 듯 다른 곳을 볼 수밖에 없던 운명이었다.

아라벨의 개입은 이 모든 관계들의 민낯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펠릭스의 사랑은 애정 결핍에서 우러난 감이 강해서, 처음 느껴보는 쾌락에 너무 쉽게 패배하고 말았다. 한편 모르소프 부인은 모든 수난을 모성애로 버티며 펠릭스가 자신에게 벗어나 그만의 성공가도를 달리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라벨에게 너무 쉽게 굴복한 펠릭스를 보자 오히려 모성애 뒤편에 억눌러져 있던 연정이 질투심의 형태로 발현했다. 물론 모르소프 부인은 그러는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자신을 억눌렀지만, 참을 수 없는 마음을 몸이 버티지 못하고 말았다. 이 사건들은 결국 둘의 사랑이 두 가지 차원에 걸쳐 있었음을 보여준다. 펠릭스에게는 자신이 모르소프 부인에게 품은 정신적인 사랑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자부했지만 몸의 사랑 또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모르소프 부인에게는 자신의 정신적인 사랑에 모성애 뿐만 아니라 평범한 애욕까지도 포함되며 이를 결코 부정할 수 없음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결국 서로 이상적인 사랑을 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더 본연에 묻혀 있는 탐욕스러운 면을 부정해왔던 셈이다. 사랑의 이상이 무참히 깨졌으니 남은 것은 파국뿐이었다. "진정한 사랑은 영원하고, 무한하며, 한결같답니다. 그것은 고르고 순수하며, 격렬하게 시위하지 않습니다. 백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마음은 젊죠." 모르소프 부인이 펠릭스의 성공을 기원하며 보낸 편지에 적힌 내용이다. 이 문장을 읽을 때만 해도 모르소프 부인의 마음이 순수하게 묻어 나오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다 읽고 나서 보면 모르소프 부인은 펠릭스와 더불어 자신을 애써 기만하려 했던 셈일지도 모르겠다.

"포부는 위대하지만 현실은 초라하다." 펠릭스가 관계를 정리하며 남긴 독백이다. 마냥 아름다운 사랑을 포부로 삼았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욕망이 결국 모습을 드러내니 사랑도 꿈도 초라하게 끝나고 말았다. 남는 것은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잔잔한 향기를 내뿜을 골짜기의 백합에 관한 추억뿐이다. 과연 펠릭스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작품에서 가장 현명한 여자인 나탈리의 말이 옳다. "어떻게 하든 간에, 어떤 여자도 자신이 바라는 만큼의 즐거움을 당신이 느끼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음도, 육체도 당신의 추억을 극복하지 못해요." 꿈이 좌절됐다고 미련도 단번에 털어지면 좋으련만, 실패한 꿈이 오히려 더 큰 잔향을 남기는 법이다. 사랑의 결핍이 펠릭스의 최초의 사랑을 낳았다면, 실패한 첫사랑이 펠릭스의 사랑에 영원히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다.

결국 「골짜기의 백합」은 숭고한 사랑을 이상으로 삼은 사람들이 좌절하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순수한 마음으로 상대를 사랑하며 쾌락과 감정에 흔들리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은 다르다고 자부하더라도 결국 마음은 영원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탐욕이 우리 마음에 있는 것들 중 가장 솔직한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억누르는 것은 숭고한 것이라기보다는 극도로 불안정한 위선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랑에는 목적도 기교도 필요하지 않다. 서로를 원하는 마음이 순수하고 솔직해야만 완전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이 뼈저린 교훈을 체감한 이후로 펠릭스는 어떻게 살아갈까? 어쩌면 발자크의 다른 작품에서 보여줄지도 모르지만, 일단 나는 아직 모른다. 내가 볼 때 펠릭스는 당분간 행복하기 정말 어려울 것이다. 결국 「골짜기의 백합」도 펠릭스가 나탈리에게 보내는 고백록이자 변명이니, 과거에 묻혀 사는 펠릭스가 앞을 보고 사는 여인과 맺어지기는 어렵다. 단 숱한 실패 끝에 모르소프 부인 못지않은 성녀를 만나고 서로 속이는 것 없이 정말로 같은 곳을 바라본다면, 그동안의 방황을 만회할 만큼 훌륭한 한 쌍이 맺어지리라 생각해 본다. 이렇게 뒷이야기를 언젠가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발자크 유니버스(인간극)의 매력인 것 같다. 그럼 언제 어디서 만날지는 모르지만, 다음에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