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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티 플레저: 영어 길티(Guilty)와 플레저(Pleasure)를 합성한 신조어이며, 어떤 일을 할 때 죄책감, 죄의식을 느끼지만, 또 동시에 엄청난 쾌락을 만끽하는 심리를 말한다.



자, 이 소설은 길티 플레저에 관한 은유이다. 먼저 길티 플레저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죄책감과 쾌락을 동시에 느끼는 걸 말한다. 다만 이건 사전적인 정의라서 그리 와닿진 않는다.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자면 읽어야 할 책이 많이 쌓여있지만 계속 책을 사게 되는 독갤러들이 하는 행위도 길티 플레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길티 플레저'에 스며져있는 주요 심상은 '모순'이다. 이 소설은 그러한 모순에 대한 인식을 그린 소설이다. 자 각@설하고...


이 소설은 크게 1막과 2막으로 구분할 수 있겠다. 1막은 김곤 팬클럽의 정모(김곤이라는 영화 감독의 베를린 국제 영화제 시상식 생중계 단체 관람을 위한) 참석을 위해 이태원의 어느 가게에서 겪는 '나'와 김곤 팬클럽 사람들간의 일종의 소동을 그리고 있고, 2막은 김곤의 신작 영화의 홍보를 위한 GV에 참석한 '나'와 '김곤'의 질의응답을 그리고 있다. 다만 이것은 글을 쓰기 위해 내가 임의적으로 구분한 것이고, 실제 소설에서는 이 1막과 2막 사이에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1막 이전에 '나'의 전 남자친구와 현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아, 그리고 이런 문장도 존재한다. '김곤' 감독을 너무 좋아한 나는 현 남자친구인 길우에게 '김곤'의 패션이나 외양을 이식하려 하는데 현 남자친구인 길우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적당히 좀 해!" 이런 글들 뿐만 아니라 1막과 2막 사이에 여러 내용이 존재하는데, 사실 그런 건 읽지 않아도 될 정도로 너무 곁가지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니까... 1막과 2막을 제외하곤 이야기가 너무 성글다.


'김곤'이라는 감독에 대해 좀 더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이 인물은 세간의 찬사를 받는 영화 감독이다.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그가 만든 영화가 은곰상을 수상했고 그로 인해 인지도가 생겼다. 흔한 힙스터들이 그렇듯 그를 먼저 알고 있는 코어 팬덤과 라이트 팬덤들이 그 감독에게도 생겨났고 코어 팬덤은 라이트 팬덤을 은근히 무시했다. 그리고 이 감독에게는 논란이 하나 있다. 그것은 7살 짜리 아역 배우에게 눈물 연기 못한다고 애 팔뚝을 피멍 들 때까지 꼬집은 것이다. 아마도 그 내용이 언론에 퍼진 모양이고, 그 '김곤'의 극성 팬인 '나'는 그것을 황색 언론과 사이버 렉카의 가짜 뉴스라고 믿고 그를 옹호한다. 그리고 그런 극성팬들만이 모인 곳이 1막에 나오는 이태원의 어느 장소이다.


여기까지가 이 소설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쉽게 말하면 이 소설은 '김곤'이라는 감독의 비도덕적인 행위를 쉴드 쳐주는 극성 팬덤들의 이야기다. 자, 이제 줄거리 얘기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그렇다면 이 소설이 정말 말하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내 생각으로는 결국 '예술과 예술가를 구분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예컨대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 감독이 저지른 아동 성추행 역시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사실 이런 주제는 쉽사리 접할 수 있는 주제인데, 당장 로만 폴란스키까지 가지 않더라도 김기덕 감독의 사례도 있고 최근엔 정우성의 혼외출산 사례도 있으니. 그럼 이 소설은 너무 얄팍한 거 아닌가? 이런 질문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같은데.



조금 더 들어가보자. 이 소설의 1막 마지막 부분에서 아이를 가지고 있는 미지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 캐릭터는 '김곤'을 쉴드 쳐주는 그 극성 팬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애를 낳아보니 알겠더라고요. 그게 실수가 될 수 없다는 걸요. 끔찍한 일이에요, 그건."


호오. 이건 흥미롭다. 이 '김곤'의 극성 팬덤이 존재하는 곳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김곤'의 자아들로 가득 찬 자리이며 타자가 부재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미지'라는 캐릭터에게 작가는 타자성과 당사자성을 동시에 부여한다. 이 미지라는 캐릭터는 '김곤'의 예술성이나 그의 영화가 지닌 작품성이 아니라 어떤 도덕성이 있어야 하는 인간으로 '김곤'이라는 캐릭터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김곤'이라는 감독의 대립항인 셈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아쉬운 이유는, 이러한 타자성과 당사자성을 지닌 캐릭터를 찰나의 도구로만 사용해버린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소설에서 이 '미지'라는 캐릭터는 1막 이후에 볼 수 없다. 근데... 이럴꺼면 굳이 캐릭터를 내세워서 사용했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더 깊이 가보자. 1막의 '미지'라는 캐릭터는 어느 정도의 당사자성을 지닌 상태로 이 '김곤'들로 가득 찬 세계에서 고발의 역할을 해냈다. 그녀의 발언 이후에 '나'는 '김곤'을 쉴드 치기 위해 이런 말들을 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더 가혹한 거 아닌가요?"

"입증된 것도 없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이후에 2막에서는 '나'는 '김곤'을 실제로 대면하게 되고, 그에게 질문할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나'는 김곤에게 영화를 너무 잘 봤고, 영화의 의도가 어떻고 저떻고... 아무튼 영화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고 김곤은 그에 대한 답을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김곤의 말.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쳤다는 것 잘 압니다. 무엇보다 저를 믿고 작업했던 스태프들, 그리고 제 작품을 사랑해주신 관객분들께 죄송합니다. 책임을 통감합니다. 송구스러우나 영현군에게도 진심으로 사죄하려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어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그런데 왜 생각할수록 더.... 허무해질까. 모든 게 흠없이 온전한데 왜 나만 팔다리가 떨어져나간 것처럼, 살점이 다 뜯겨 너덜너덜해진 것처럼 괴로운가. 왜 지독히도 헛헛한가."


호오... 지금 이 상황에서, 주인공인 '나'는 어떠한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다. '김곤'이 저지른 행위가 사실로 밝혀졌다, 라는 상승적 이미지와 동시에 '김곤' 감독에 대한 '나'의 사랑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하강적 이미지가 위 상황에 서로 양립한다. 서로 다른 이미지의 배반을 직면한 인간은 과연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에 대해서 위 문장에서는 지독히도 헛헛하다, 라고 말하는 듯 하다. 다만... 아까 위에서 말했듯 이 소설의 주요 테마는 '모순'이다. 내가 글에 쓰여진 부분 뿐만 아니라 주인공인 '나'의 모순적인 면들은 소설 곳곳에 존재한다. 다만 위의 상황에서 그 모순적인 면들은 절정에 달하고 어느 정도 소설의 이야기는 일단락된다. 그러니까 해당 소설이 다루는 모순이란 것은,


1. '김곤'은 훌륭한 예술가이며 영화 감독이지만 동시에 그는 도덕적인 결함이 존재함(7살 아이를 학대했다는)

2. 그런 '김곤'을 주인공인 '나'는 사랑함.

3.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김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결함을 폭로하는 '미지'라는 캐릭터에게 일종의 폭력적인 발언을 하게됨(그러나 그 발언은 정확하게 '나'를 관통하는 말임)


그러나 훌륭한 예술가라는 사실이, 그 예술가의 도덕성을 보증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어떤 인간이 개인적인 성취를 이뤄냈을 때 그가 훌륭했기(이 말에는 그의 직업적인 성취와 도덕적인 성취가 포함되어 있는 듯 하다)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존재한다. 아마도 작가는 이 부분을 꼬집고 싶었던 것 아닐까.


이제 마지막.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해보기로. 내가 보기엔 이 소설은 '모순에 대한 반응'을 의식화한 소설이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묘하게 느껴지는 모순들. 그런 게 하나씩은 있지 않나. 예컨대 '돈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라는 명제 같은 것 말이다. 단순하게 예를 든 것이지만 아마 나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이라면 그런 모순된 순간을 한번씩은 느껴봤으리라 생각한다. 작가는 이런 모순들을 포착해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과정과 결과가 너무 단순하고 단조롭게 표현되어 있다. 이 글에 쓰진 않았지만 위에서 말한 1막과 2막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정말 읽지 않아도 될 수준의 문장들이 존재한다. 마치 1막과 2막의 결정적인 발언을 내뱉는 걸 포착하기 위해서 나머지 문장들이 다 도구로 쓰이고 있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좀 처참할 정도다. 이건 읽어보시면 무슨 뜻일지 알 듯...


이제 마무리를 짓자. 이 소설이 이뤄낸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일상성에 새겨진 모순의 발견'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발견이 훌륭하게 표현되었는가? 라는 물음에는... 글쎄.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임현의 '고두'라는 작품이 떠오른다. 그 소설 역시도 모순을 다루고 있는데... '고두'에 비교하기엔 이 소설은 너무 빈약하다. 그러니까... 너무 쉽고 단순하게 쓰여져있다. 다음엔 '고두'에 대한 리뷰도 써야겠다.


다 쓰고 나니 이 소설을 옹호하는 투로 쓰여진 것 같은데, 사실 나는 이 소설을 비판하고자 이 글을 썼다. 앞서 말한 모순의 발견 어쩌구 저쩌구를 떠나서, 그러니까 이 소설이 해석과 번역되기 이전에 문학으로써의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 소설엔 그런 게 없다. 좀 뭐라 해야 할까, 평론가들이 좋아할만한 소설이라고나 할까. 많은 부분들이 비어있어서 해석과 번역이 개입하기 좋은 소설이다. 그러나 읽기에 좋은 소설은 아닌 듯 하다.


어떻게 끝내야 될 지 모르겠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모순'이라는 걸 완벽하게 정의하고 글을 썼어야 잘 이해가 됐을 것 같다. 다만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고... 다만 요즘 떠오르는 심상은, 이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는 '의미 없는 것만이 의미를 지닌다.' 라는 문장인데, 이것 역시도 모순인 듯 하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양귀자의 '모순'은 모순이 아니다. 그 주인공은 양자택일 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으니까. 진정한 의미에서의 '모순'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너무 많은 것이다.


진짜 끝. 이 책을 끝까지 안 읽어봐서 모르겠지만 제 돈 주고 구매하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그냥 임현의 '고두' 읽으셈. 이 책 제목이 '혼모노'인 이유가 아마 그런 위에서 말한 모순이 존재하는 인간이나 사물에 대해 '이것이 진실(혹은 진짜)인가?' 라는 물음에서 시작했다고 본다. 아마 이 책의 전체적인 테마가 이 '길티 클럽' 이랑 비슷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냥 '고두'를 읽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