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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이 책을 펼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작정하고 과학철학의 주요 도서를 읽어보려는 과정 중 해킹의 <표상하기와 개입하기>는 피할 수 없을 뿐더러 꽤나 흥미롭게 다가왔고, 실제로 내용도 매우 흥미로웠다. 포퍼가 시작해 쿤의 떠들썩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폭발한 과학철학 논쟁을 매우 능숙하게 요약하는 동시에, 이 모든 논쟁을 실제 과학의 논점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일축하고 과학철학이 진정으로 초점을 맞춰야 할 다른 요소, 현실에 "개입"하는 능력을 조명해 슬슬 다른 모든 철학이 그렇듯 주장만 반복되고 더 나아가지 못하는 "표상"과 "진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니 말이다. 그런 구상대로 A파트 "표상하기"와 B파트 "개입하기"로 나뉜 이 책은 해킹이 당시 과학철학을 강의하던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어, 과학철학 강의 교재로도 자주 사용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에는 매우 큰 단점이 있었으니, 번역이 끔찍하다.
나는 아마 일반적인 인문학 독자에 비하면 번역에 관대한 편이리라 생각한다. 더 낫거나 올바른 번역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며, 세부사항 중 많은 내용이 지워지거나 심지어 오역되었을지라도 읽으며 문제만 생기지 않는다면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 번역은 충분히 건전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많은 초역작이 여러 오역으로 잔고생을 하는 게 당연한 순리이기도 할 테고) 하지만 <표상하기와>의 번역은 읽기에 심각했다. 많은 문장이 놀라울 정도로 읽기 어색한 한국어로 적혀 있어 읽는 내내 피로해 페이지를 넘기기 쉽지 않았고, 누가 봐도 많은 맥락이 사라졌거나 아예 오역이 된 듯한 표현이 수두룩했다. 위 사진이 좋은 예시인데, '글립토돈'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읽어보면 이게 정말 한국어 문장인지 아니면 각 구와 절을 서로 다른 번역기에 돌린 뒤에 그대로 합쳐서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어놓은 건지 의심된다. 이따금 달린 주석도 그리 도움되지는 않는데, 오스틴이 "not real cream"에서 "real"이라는 단어가 왜 "trousers-word"1)인지를 설명하는 내용에서 본문과 주석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손절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절반쯤 읽은 책을 내려놓고 원서를 찾아봤는데, 놀랍게도 원서는 역자의 서문 말마따나 이해하기 쉽고 읽기도 쉬운 문장으로 적혀 있어 상당히 읽기 편했다. 도대체 번역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혹은 대체 누구를 번역하라고 부려먹었기에(?)-이 글의 번역이 이렇게까지 망가져야 했던 걸까 참 쉽지가 않다. 아마 용어 자체는 한국 과학철학 번역에 쓰는 용어에 맞게 번역했겠지만, 흠. 그래도 덕분에 원문에는 없던 한국어판 서문(간략하게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이 책이 과학철학의 흐름에 있어서 큰 영향을 주어 이론 중심적 과학철학이 실제 과학 연구에서 진행되는 관찰과 실험에 더 주목하는 변화-실험철학-를 낳았다는 등의 이야기)을 읽었으니 어쨌든 손해본 장사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다시 <표상하기와>로 돌아가자면, 해킹은 A파트에서 이전까지의 이론 중심적 과학철학을 정리한다. 과학에서 다루는 대상과 이론이 과연 실재하는지-우주에 그런 대상이 정말 존재하느냐, 우주가 정말 이론에서 설명하는대로 존재하느냐-에 대한 논쟁이 하나. 오직 우리가 감각적으로 관측할 수 있는 내용만을 신뢰해야 한다는 실증주의의 계보가 또 하나. 그 속에서 칸트가 현상계를 제외한 실재계를 추방하며 우리의 지식을 인식론적 차원으로 축소시켜 실제 과학의 발전 방향에-사상적으로도 그렇지만, 연구 지원 문제로도-영향을 준 사건들. 헤겔의 성장하는 지식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과학의 진보 혹은 실재에 대한 수렴이라는 문제 많은 인식을 주는 데에 기여했는지. 이런 이론적인 이야기가 자기 이론으로 무언가 실질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지식을 일궈내지 못하는 책상물림의 하찮은 학문이라고 비웃는 프래그머티즘의 이야기가-일단 지금은-슬쩍 스쳐지나가고, 포퍼, 쿤, 라카토스, 파이어아벤트의 논쟁이 왜 논쟁적이었는지에 대한 요약을 마친 후에, 당시 가장 충실한 과학적 실재론자가 될 수 있었을 퍼트넘이 왜 칸트로 회귀하는 함정에 빠졌는지를 비판한다.
퍼트넘을 향한 비판은 A파트에서의 전체적인 비판이 종합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퍼트넘의 과학철학이 과학에 대한 철학보다는-그는 최대한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기는 했지만-언어에 대한 철학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퍼트넘은 예를 들어, "고양이"와 "체리"가 지칭하는 대상이 서로 반대인 이론 속에서 "고양이가 융단 위에 있다"는 문장이 자연스럽게 "체리가 나무 위에 있다"는 문장으로 이해되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상황을 얼마나 상정할 수 있기에, 우리는 "고양이"와 "체리"가 지칭하는 대상이 이 이론 체계에 의존적이라는 소박한 결론을 내려야 하며, "고양이"와 "체리"는 체계 바깥의 실재에 자연종으로서 따로 분리되어 있을 순 있겠지만 그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고 논한다. 해킹은 과학은 바로 그 오해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고양이와 체리의 온갖 다양한 속성을 다방면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학문이라고 비판하는 동시에, 자연종이 정말 그렇게 분명하게 분리된다면 과학에서 "산"이라는 개념이 지칭하는 대상이 브뢴스테드-로우리 산과 루이스 산이라는 두 서로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집단 중 누구를 지칭해야 하는지 일장연설을 쏟아붓는다.
그리고 B파트에 들어서며, 해킹은 본격적으로 이런 접근이 왜 챗바퀴만을 돌며 비생산적인 논의만 이끌었는지를 분명하게 주장한다. 과학의 핵심은 이론과 관찰이라는 이분법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 사이의 실험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봐야하며, 이론은 관찰과 실험에 앞선 것도 아니거니와, 관찰 및 실험이 이론-의존적인 것조차 딱히 아니다. 관찰과 실험은 이론과 독립적으로 이뤄질 때가 많으며, 그 관찰과 실험을 위해 과학자들은 자기들이 다루는 대상을 '조작'하여 자신이 관측하고자 하는 현상이 일어나도록 개입한다. 개입하는 방식은 실험자들의 접근 방향에 따라 서로 다르며, 이렇게 자기들이 연구하고 있는 대상을 실제로 매우 엄밀하게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 실존하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 보장한다.
이 보장은 우리가 감각적 자극으로 일상적으로 접하는 현상이 실존한다고 보장할 수 있을 만큼의 보장인데, 해킹은 실증주의(콩트, 논리 실증주의 등)의 덫이 우리가 과학에서 '관찰'한다는 의미를 곡해하도록 만든다고 설명한다. 일례를 들자면, 현미경이나 망원경으로 확대만 해서 보면 되는 실재적인 대상이라는 실증주의의 미신과는 달리 현미경을 통해 볼 수 있는 상이라는 것이 원래 얼마나 불분명하게 해체되어 허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에서부터 전자 현미경과 음향 현미경acoustic microscope 같은 더 정교한 현미경이 어떻게 일상적인 의미의 '보다'와는 다른 방식으로 상을 만들고 우리에게 보여주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또한 태양 속의 움직임을 '관측'하기 위해 중성미자를 사용한다는 것이 과학자에게 얼마나 당연한 것인지도 이해해야 한다. 신과학을 주장한 베이컨부터가 그랬듯, 관측은 원래부터 인간의 감각과는 완전히 무관한 문제였다.
또한 어떤 특정한 관찰이 이론의 헛점을 드러낸다거나, 이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실험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거나 하는 이야기 역시 과학의 현실로부터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라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실험은, 개입하기의 문제에서 봤을 때, 이미 그 자체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현상이 최대한 다른 요인에 간섭되지 않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개입2)을 하고, 신뢰할 수 있을 만큼 잡음이 적은 데이터가 뽑힐 때야말로 비로소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이니까. 같은 실험을 여러 번 반복한다는 것은 이 점차 섬세하게 조정되며 반복되는 관측을 굳이 다시 한다는 의미 이외에는 없다. 더군다나 관찰은 이론의 헛점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실, 이론의 헛점은 이론을 다루는 이들끼리의 이야기다. 주류 이론이 바뀌거나 변형되더라도 대체로 관찰과 실험은 독립적으로 자리를 지키며, 다른 이론이 이를 자신의 근거로 삼거나 다른 이론을 비판하는 재료로 삼는 것과 별개로, 이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며 대개 하나의 이론으로 정리하기 쉽지 않은 다양한 결과를 산출한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건 상수에 대한 이야기다. 갈릴레이와 뉴턴의 고전역학 시절부터 그랬듯, 중력이 두 물질의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이론이 실제 관측과 만나기 위해서는 거기에 곱할 상수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상수는, 아무리 이론이 깔끔하게 떨어지고 합리적이더라도, 매우 무작위적이고 무의미해 보인다. 이 상수는 현재까지의 여러 실험에서의 관측값을 토대로 평균 제곱 오차MSE를 최소로 할 수 있는 값으로 정해지며, 실험이 많아질수록 그 값의 유효 숫자는 더 많아지지만, 이 나열이 아무리 이어진대도 그것이 이론에 기여하는 바는 없다. 그건 마치 앙상한 뼈대로 만든 이론 위에 피부를 붙여 이를 얼마나 정교하게 부풀리는지를 거의 어림짐작에 가깝게 맞춰가며 최대한 현실적인 사람을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고, 과학에서 관찰과 이론 사이의 관계는 기존의 이론 중심적 과학철학보다는 이쪽에 더 가깝다.
전체적으로 돌아보건대, <표상하기와>의 논조는 A파트에서 어렴풋이 지나갔던 프래그머티즘을, 특히 개중에서도 듀이의 생각을 연상시킨다. 지식이 단지 지식일 뿐 그것이 실제하는지 제대로 확신할 수 없다는 믿음 따위는 실제로 무언가 일을 하지 않으면서 오직 지식을 지식으로만 다루는 이들이나 할 만한 생각에 불과하다는, 친-기업가 정신의 화신. 그래서 약간 뜨끔한 구석도 있다. 읽기만 하며 실제로 뭘 다루거나 만들지 않는 학습이 과연 학습일까? 실제 학습은 그 재미를 넘어선 여러 우여곡절과 숙련에 달려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저 한 명의 딜레탕트로서 여기에 할 말이 별로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할 수 있는 것도 딱히 없는 것도 사실이다.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지식을 조금 익혔다는 수준에서 만족하고 넘어가는 것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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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과 주석에서 어색하게 번역된 부분을 원서로 읽자니, trousers-word라는 말은 'wear the trousers'라는 관용어구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누가 바지를 입느냐, 곧 두 사람의 관계에서 누가 남자 역할을 하느냐는 말. (짐작하는 뜻 그대로기도 하고, 좀 더 소박하게 집에서 가장 노릇을 못한다는 핀잔 정도기도 하다) 곧 이 trousers-word는 그 단어 자체가 아니라 단어와 대립되는 상대역에 의존하는 단어로, '이것은 진짜 크림'이라는 말이 참이기 위한 조건은 '크림'의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가짜 크림'의 조건에 달려 있어 '이것'이 조금이라도 가짜 크림과 공유하는 속성이 있다면 '이것은 진짜 크림'이라는 말이 거짓이 된다는 그런 이야기. 언어철학에 관심이 없다면 별로 중요하진 않다.
2) 개인적으로 여기에서 놀랐던 건 마이컬슨-몰리 실험에서 워낙 작은 외부 간섭-이를테면, 밖에서 말들이 오가는 것-에도 데이터에 잡음이 생길 수 있어 아예 인적 드문 시골로 이동한 걸로도 모자라 실험 장비를 수은으로 가득한 수조에 넣은 채 실험을 진행했다는 거였다. 실제로 처음 마이컬슨이 진행했던 실험은 그런 잡음으로 인해 에테르 바람을 기각할 수 있을 만큼 유의미한 수치가 나오지 않았으며, 온갖 변인통제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우리가 아는 결과를 내게 된다. 물론, 현실적으로 더 흥미로운 건 마이컬슨이 이 실험의 '이론적 함의'에는 전혀 관심 없이 자신이 만든 실험 장치 "간섭계"에 훨씬 집중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 자체로 과학계에 큰 도움이 되어 이후 이것이 온갖 관측에 사용되게 됐다는 점이겠지만.
오 좋은 리뷰 잘 봤다. 나중에 살 수 있으면 이 <표상하기와 개입하기> 사려고 했는데..번역 보고 일단 보류 근데 일본어로는 表現と介入: ボルヘス的幻想と新ベーコン主義 표현과 개입:보르헤스적 환상과 신베이컨주의인데 1984년에 번역되었네. 원전 자체가 좀 된 책이구나. 아무튼 이언 해킹의 책은 무조건 사서 읽어도 후회 안할 책들이라 생각함.
나라면 안 삼.
나도 이거 국역본은 낑낑대며 읽었는데.. 근데 요즘 the social constructuon of what?같은 해킹의 영어 원서들 읽다보니까, 엄청 쉽고 명료하고 유쾌하게 글이 읽히더라.. 물론 표상하기와 개입하기랑은 다른 책이지만, 이렇게 알기 좋게 쓰는 사람 글을 어떻게 이렇게 망쳐놨나 싶은..
고맙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궁금하긴 한데 번역 보니 꺼려지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