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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핵심 주제인 '매체유물론', 그러니까, 매체가 우리의 감각, 사고, 문학, 담론 따위에 영향을 준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렵잖게 동의할 수 있었다. 사실 21세기 매체연합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여기에 동의하지 않기도 어렵다고 생각함..

다만 거시적인 주제는 그렇더라도 글쓰기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독문학자 출신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글쓰기 방식이 너무 은유적이고 난해하다.. 책의 독해를 어렵게 하기도 하거니와, 종종 더 엄밀한 논증이 필요한 부분을 은유로 적당히 때운거 아닌가? 싶은 측면들이 종종 있다. 예컨대 니체에 대한 서술 등. 물론 이 책은 '매체의 심성사'가 아니고, 저자도 역사학자가 아니라 독문학자이자 매체이론가이므로 그만큼의 역사학적 엄밀성을 요구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강력한 테제에 비해 미시적 논증에서는 몇군데 구멍이 나있지 않나 싶다.

또 축음기-영화-타자기 관계를 라깡의 이론을 빌려 실재계-상징계-상상계 구분으로 다루는 부분도 인상깊다. 저자는 정신분석학을 분석의 틀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역사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축음기=실재계, 영화=상징계같은 일대일 대응법은 좀 도식적이어보이기는 하지만, 거시적인 테제들 자체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감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 자체는 매우 현재적이어보인다. 저자는 축음기, 영화, 타자기라는 매체들이 컴퓨터라는 단일한 매체연합으로 수렴하는, 헤겔적인 '역사의 종언'에 대해 말한다. 정말로 그런 종말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시대는 키틀러의 시대보다 몇십배는 더 컴퓨터화된 시대이다. 지금 나는 이 독후감을 타자기도, 키보드도 아닌, 물질적인 실체가 없는 스마트폰의 가상 키보드로 적고 있고, 축음기가 아닌 에어팟으로 음악을 듣고, 영화가 아닌 스마트폰 스크린으로 내가 썼던 글들을 본다.. 책은 컴퓨터의 시대에 대해 많이 말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매체연합이 우리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해서는 저자가 말하듯 한 세기 전 매체가 사람들에게 어떤 충격으로 다가왔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