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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글 올렸던 거 보는데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댓 보여서 올려봄.
사실 키냐르가 하는 말이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고 그냥 이 사람 생각이 워낙 독특해서 생소하게 느껴질 뿐임. 그래서 뭔 생각으로 글을 쓰는지 인터뷰로 알고 가면 이해하기 편함. (책: 파스칼 키냐르의 말)


샹탈: <은밀한 생>에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단테의 <지옥>에서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는 함께 <랜슬롯>을 읽는다. 사랑은 이중의 포옹으로 정의된다. 언어의 포옹과 침묵의 포옹. 그것은 침묵에 빠진 언어의 포옹이다. 여기에서 급변은, 독서의 체험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체험 속에 있다."


파스칼: 그렇습니다. 사랑의 경험과 독서의 경험 사이에는 핵심적인 상응이 있습니다. 사랑은 읽기입니다. 독서를 대체할 만한 훨씬 무겁고 훨씬 흡착적인 읽기. 획득 언어 같은 퇴행. 비집단적이고 더 미분적인, 문장이 아니라 더 문자적인, 더 잘 융합되지 않는 언어의 발명. 흔적을 남기는 일에 대한 불안. 그런 것이 모험입니다.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랜슬롯>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가운데 하나예요. 크레티앵은 느닷없이 이야기를 끝내죠. 그래서 기사는 바다 기슭의 탑 속에 영영 갇혀 있습니다.
독자와 책이라는 물체는 이상한 운반을 통해 서로 이어져 있어요. 책의 내용과 영혼 사이를 전속력으로 통과하는 목소리는 없는데, 불확실하지만 무엇인가가 전달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를 극지대로 데려간 것이 바로 이 운송입니다.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와의 결혼을 거부한 후 세계에 홀로 남게 되는 것은 읽기를 배우는 자의 성기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의 성기입니다. 아마 이시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샹탈: 그럴 수도 있어요. 침묵에 빠진 언어를 통해 사랑과 독서 사이에 유사성이 생기는 거죠. 하지만 더 멀리 나갈 수는 없을 까요? 메타포 없이 문학에 대한 사랑, 문자에 대한 사랑 혹은 독서에 대한 사랑에 대해 얘기해볼 수는 없을까요?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을 경험하는 것과 같은 본질적인 경험이 독서에 있지 않을까요? 몸, 성, 영혼 같은 모든 것을 다 포함한 경험이요.


파스칼: 아마도 당신은 그러시나 보죠? 방금 하신 말씀은 참으로 아름다운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 생식기의 노출과 연관되지 않은 사랑을 제가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독서와 사랑을 나란히 놓는 것이 메타포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하나가 또 다른 하나 속에 있는 메타포라기보다, 침묵에 빠지는 것과 동일한 속성이 그 둘에 있다고 생각해요. 침묵에 빠진다는 것은 언어 이전에, 말하기 이전에, 듣기만 했던 청각과 관련 있어요. 듣는다는 것은 복종과, 그러니까 최초의 복종과 관련 있어요.
이런 맥락에서라면 방금 말씀하신 것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이게 아니라면 방금 말씀하신 명제를 저는 기꺼이 뒤집겠습니다. 문자를 가지고 부적을 만들지 않아야겠죠. 저는 단언할 수 있어요. 저는 언어를 사랑하지 않아요. 저는 문학을 사랑하지 않아요. 저는 문자를 사랑하지 않아요. 저는 영혼을 사랑하지 않아요. 나체를, 기원을, 생식 을 사랑하는 것만큼, 감각하고, 먹고, 움직이는 몸을 사랑하는 것만큼 영혼을 사랑하지 않아요. 저에게 지시 대상référent이란 자생한 것originaire, 오로지 그것입니다. 흐르다 고인 것 같은, 침하성hypostase의 위@상을 갖는 실체들 은, 가령 문화와 같은 것들은 저의 지시 대상이 될 수 없어요. 자생한 것만큼 숭고한 것은 없습니다.


샹탈: 이 질문에 대한 귀결이랄까요. 쓴다는 것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혹은 가진 것을 주는 것입니까? 자크 라캉이 정의한 사랑이 바로 이런 건데요.


파스칼: 저는 단호합니다. 그 점에 관해서라면 저는 단호해요. 쓰는 것은 주는 게 아닙니다. 쓰는 것은 머릿속에서 연필로 찾는 것입니다. 강철 펜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지요. 그것은 찾거나 모르거나 혹은 부족한 것을 가지고 패배하는 것, 혹은 부족한 것을 대신하는 척하는 것입니다. 언어는 그것을 갖고 있지 않은 자가 뒤늦게 얻는 것입니다. 언어에는 상실의 자리만 있을 뿐 다른 자리는 없어요. 언어는 항상 인류를 저버리고 떠나는 중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언어의 결여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경험입니다. 우리의 기원에도, 어린 시절에도, 변성기를 겪는 청소년기에도, 치매가 생기는 노년과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언어는 결여되어 있습니다.


샹탈: 누군가 문학은 연애편지 같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파스칼: 그럴 수 있습니다. 연애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것은 언어의 획득을 전제해요. 어린아이가 언어를 습득하는 것처럼요. 사회는 교사들을 데리고 와서 질서의 힘을 가르치죠. 언어 속에 부가된 신념과 함께 국적이 와요. 목소리의 2차 상실을 통해 생식능력을 얻는 게 청소년기입니다. 우리의 생물적이고 생체적인 경험은 이런 연애편지 같은 문학 장르보다 연대가 훨씬 앞섭니다. 옛 중국인들 혹은 옛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쓴 것을 보면, 고대 이집트인들이 고안했다는 허구적 편지 그 이상 입니다. 하지만 이런 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문학이 연애편지처럼 어디서 파생한 것일 수도 있고 인위적인 것일 수도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요. (연애편지라는 것도 집단적인 언어로 작성된 것일 뿐이죠. 뚜렷이 보이는 것이라곤 없는, 침묵하고 있는 샘에 자신을 반사시키고 투영시키며 거기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는 상태.연애편지도 이런 것 아닐까요.) 언어란 잘돼가는 사업이라고 믿는 저 같은 나르시소스에게는요.
저는 나르시소스가 하나의 얼굴만 가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자연언어가 아이들 두뇌 속에 조화로운 방식으로 자리 잡는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흔적을 탐색하고, 먹이의 냄새를 쫓고, 욕망하는 짐승을 탐욕스럽게 먹고, 꿈속에서 그토록 욕망했던 것들을 형상 조각으로나마 환각으로 보고, 동굴 벽면에 그것을 새기고, 모든 것을 분리하고, 미분하고, 원자화하고, 분석하고 해독하는 일 들이 독서 행위보다 더 먼저 있던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독서보다 훨씬 깊고 훨씬 동물적이고 훨씬 본래적인 것 입니다. 훨씬 혼란스럽고 훨씬 불안하고 훨씬 불확실한 것이 기도 하고요. 독서보다 상류에 있던 이런 '같고 다른' 경험을 독서에서 느끼는 것, 그것이 진짜 독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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