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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빅토리아 시대의 유명한 시인이자 문화비평가였던 매튜 아널드가 저술했다.
이 『교양과 무질서』는 사실 상당히 시대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빅토리아 시대 선거제의 개혁과 그것을 둘러싼 사건들은 이 책과 분리될 수 없는 관계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영국에서는 1867년 선거제가 개혁되었다. 이 개혁으로 일정 이상의 재산을 갖춘 도시 노동자 계층까지 투표권을 가지게 되었다(보통선거는 아니었다. 빈민이나 여성에게는 투표권이 없었으며, 1인 1표도 아니었다. 이 개혁을 가장 적극적으로 도운 인물 중 하나인 존 스튜어트 밀 역시 1인 1표의 보통선거제에는 반대했다. 그것은 시대의 한계라고는 볼 수 없고, 밀 본인의 신념이다. 왜냐하면 이미 밀의 사상적 스승 중 하나인 벤담이 최초로 보통선거제를 체계화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흔히 해당 선거제 개혁은 단순히 보수당 정권이 노동계급의 요구에 못 이겨 승인했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물밑에서는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많은 갈등들이 있었다. 토마스 칼라일과 같은 반동주의자의 반대는 굉장히 유명할 것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진영 내에서도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영국 헌정론』을 남긴 월터 배젓 역시 개혁 반대파였으며, 이 저자 역시 그러했다(하지만 책을 읽어내려갈 수록, 아널드가 정말로 보편적인 의미의 '자유주의자'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솟아난다.)
갈등의 좀 더 구체적인 면면들을 거론하자면, 1866년에 벌어진 '하이드 파크 사건'과 가장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아널드가 이 저작의 기초가 되는 부분을 저술한 계기에는 해당 사건이 있었다. 그러므로 잠시 이 사건과 그 배경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1866년, 당시에 의회에서는 자유당 존 러셀 내각의 주도로 선거제 개혁안이 입안 되었다.
하지만 의회에서 해당 안은 반려 되었으며, 이는 자유당 내각의 사퇴로 이어지게 된다. 개혁안이 거절되자 노동계급들은 이에 불만을 가지고 시위를 이어나가게 된다(시위대는 '개혁연대'라고 불렸다.) 당시 영국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일 만한 장소는 주로 공원이었기에, 개혁연대는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서 시위 하겠다고 예고한다.
하지만 당국은 공원에서 시위를 벌이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치안 당국에 철책으로 공원을 봉쇄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 결과 막상 시위대가 하이드 파크에 도착했을 때 문은 전부 잠겨 있었다. 그러자 대부분의 시위대는 다른 공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남아있던 일부가 문제를 일으켰다. 그들은 철책을 돌파하여 공원 내부로 진입하였으며, 그들 중에도 몇몇 소수는 기물을 파손하고 주변 주택들에 돌을 투척하는 등의 돌발행동으로 논란이 되었다(하지만 무단침입한 인원들도 대부분은 대중연설을 하는 등의 평화적인 방식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 사건의 반동으로 의회에선 공원에서의 시위를 금지하는 법안이 입안되기도 하였으나, 당시 하원의원이었던 존 스튜어트 밀의 주도로 부결된다(우리가 아는 『자유론』의 저자 밀이 맞다. 이 사건 뿐만 아니라 그는 선거 개혁 과정 전반에서 큰 역할을 했다. 밀은 당대의 진보주의자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아널드는 이 저작에서 그에게 직접적인 비판을 겨냥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무질서'는 이 하이드 파크 사건에서 상기한 소수 인원들이 보여준 행태를 지칭하고 있다. 넓게 보면 이 책은 선거 개혁을 둘러싼 각 계급들의 이해관계에 대해 반영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널드는 노동자를 무질서로, 중간계급(정확히는 중간계급에서도 당시로서는 진보적이었던 자유주의자들)을 속물로 대응시킬 때가 잦다.
여기까지만 보면 단순히 그가 사회 개혁에 반대하는 반동주의자로만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칼라일이나 버크처럼 전통주의적 경향을 가진 인물들과 그는 사상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가 '무질서'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전통'이 아니다. 그것은 '교양'이다. 그는 교양이 인간 정신과 사회 전체의 내면적 완성이며, 보편 교육의 확대를 통해 확보될 수 있다고 본다(실제로 그는 생애 전체에 걸쳐 교육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여왔다. 그는 일생 내내 교수, 장학사 등의 직업을 지니고 살았다. 또한 세계 여러 국가들의 다양한 교육 유형들에 대해 분석한 논문들을 짓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시각에 대해서는 고금의 다양한 시비론이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본론에서 다루도록 하겠다(이미 당대에만 해도 여러 매체에서 그의 저작에 대한 반론을 해왔다. 데일리 텔레그래프–지금은 보수 언론으로 유명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도 않았다–등의 저명한 언론들은 물론이고, 헨리 시즈윅–벤담, 밀과 더불어 고전적 공리주의자 중 하나로, 우리에게는 『윤리학의 방법』이라는 저서로 알려져 있다–같은 사상가들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했다.)
참고로 본론에서 각 항의 제목들은 그의 논고들의 제목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1. 단맛과 빛
이 논고에서 아널드는 '교양'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그것을 추구할 동기는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먼저 교양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교양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교양의 동기가 배타심이나 허영심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또 본질적으로 교양이라는 것이 단순히 희랍, 라틴 고전을 좀 아는 것에 불과하며, 이는 계급적 차별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본다.
하지만 아널드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그는 그런 것이 교양이었다면 자기는 애초에 교양을 옹호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밝힌다.
그렇다면 아널드가 생각하는 교양의 정의와 그것을 추구할 동기는 무엇인가? 아널드는 교양이 '호기심'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호기심이란 지적인 활동에 대한 자유로운 열의를 말한다.
그는 물론 호기심 중에도 쓸데없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한다. 다만 교양의 경우 근본적으로 사물을 그 자체 목적으로 추구하려는 경향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이 대목에서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기도 하다. 해당 구절의 내용은 더 탁월하게 되기 위한 향상심으로써 학문에 임한다는 것이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다. 이 인용문은 후술할 교양의 정의와도 연결된다.)
하지만 교양을 더 광의에서 다루기 위해서는 하나의 관점이 더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인 의미이다. 아널드에 따르면 교양을 추구하는 동기에는 전술한 것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공헌을 위한 것도 공존한다(이를 설명하는 부분은 굉장히 모호해서 무어라 정의하기가 어렵다. 이전처럼 몽테스키외의 개념을 사용한다면, 공화국에서의 '정치적 덕성'에 가까울 듯하지만, 이 역시 제대로 부합하지는 않는다.
아널드가 직접 이를 요약하는 부분에서는 '신의 뜻과 이성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관점을 따른다면 '계몽주의적 이상'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아널드 본인이 열심히 설명한 내용과는 다소 다르게 읽힐 수 있어 의아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는 해도 저자가 직접 제시한 요약이기에 이게 맞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에서 비롯되는 '교양'이란 '완성을 위한 공부'로 요약된다. 뒤에서 이것은 다른 동물들의 성격과는 구별되는 '인간성의 확대'로 변주된다. 이를 통해 그는 교양과 종교가 같은 선상에 있는 가치임을 설명하고 있다(그러나 그는 '인간성'이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는다. 유사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대 인물이기도 한 존 러스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추측해보는 수 밖에는 없다. 러스킨은 인간이 수요와 공급의 법칙보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우선시 한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다르다고 말한다. 이 말은 경제 논리보다는 사회의 내재적 규범,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외재적 규범인 법률이 앞선다는 이야기를 함의한다.
이러한 정의를 통해 추측하자면, 이 부분에서 아널드가 하고 있는 말은 다음과 같다. "교양은 사회가 가진 내재적 규범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외재적 규범들을 더욱 완전하게 하는 데에 기여한다."
아널드가 교양의 역할에서 사회를 상정하고 있는 것은 자명하다. 뒤에서도 개인은 전체의 일부분이기에, 공동체와 완벽히 무관하면서도 완전한 복리는 가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더 강력한 단서가 '사회 상태가 아니라면 교양은 추구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데에 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잠시 내재적 규범의 일각으로서 '동감'을 거론한다. 아마도 루소나 스미스, 흄 등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이어서 그는 교양을 통해 '완성'이 이루어질 때 어떤 효과가 있을지를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 본성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형성하는 모든 힘의 조화로운 팽창이며, 나머지를 희생하고 한 가지 힘만을 너무 크게 발전시키는 것과는 상치'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이 대목은 그의 표현을 직접인용 한 것인데, 단순히 이 부분만 봐서는 결국 무슨 뜻인지 인지하기가 어렵다. 후술되는 부분들을 참고하여, 우리는 어느 정도 추측해볼 수는 있다.
아널드는 이 뒤에서 '기계 장치'로 대표되는 근대적 경향과 무사안일주의에 대한 비판을 늘어놓는다. 전자에서 말하는 근대적 경향은 영국의 지적 전통과도 연관이 있는 실용주의의 극단적으로 변질된 모습을 가리킨다.
그에 따르면 금전 역시 '기계 장치'에 속한다. 이 기계 장치라는 표현의 특징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러니까 기계 장치란 수단으로서의 가치만 있는 것들을 말한다.
그는 이 표현을 통해서 물건의 가치는 부여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당시의 경향을 지적하고 있다–물론 그는 러스킨만큼 이 현상에 대해 자세히 논하지는 않는다. 그가 러스킨만큼 고민을 해봤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저작만 보면 다소 불충분해 보이기도 한다.
후자는 당대에 유명했던 정치인 존 아서 로벅의 발언과 관련이 있다. 로벅은 표현의 자유를 성취해낸 역사에 대한 찬양 발언을 하며, 세계에 이런 자유가 있는 곳은 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널드가 보기에 이 발언은 심히 못마땅한 성격의 것이었다. 그는 단순히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데에서 그치면 안 된다고 보았다. 그 권리를 통해 하는 말의 내용을 중시했다. 즉, 단순히 표현의 자유에 무사안일주의적인 접근을 할 것이 아니라, 그에 걸맞는 교육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위 대목들을 통해 추측해보자면, 그가 하고 싶은 말의 내용은 이렇다. "우리는 실용주의만 견지해서는 안 된다. 가치를 단순 판단하기가 어렵거나 무용한 것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권리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해당 권리를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리고 '교양'을 통한 '완성'은 이것들을 이루게 한다.")
이어서 그의 사상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속물'이 언급된다. 그는 기계 장치를 숭배하는 자들이 곧 속물이라고 말한다(서두에서 이야기한 대로 이 표현은 당대의 중간계급에 대한 그의 부정적 시선이 반영된 개념어이다. '당대 중간계급=속물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흔히 기계 장치가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만약 수단이 그 자체 목적인 것처럼 인식된다면 기계 장치인 것이 된다. 아널드는 대표적으로 '인구'라는 수단적인 측면을 바탕으로 국가의 위대함을 측량한다면 그것은 속물이 된다고 말한다. 인구는 분명히 인간을 포함한 개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인간은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인구는 기계 장치가 되는 것이다(그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어떤 것은 목적이고, 어떤 것은 수단이라는 전제를 미리 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인간이나 생명과 같은 요소가 목적이라고 가정한다는 점은 칸트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겠다. 하지만 결국 아무런 설명도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가독성을 낮추는 부분이다.)
이 다음으로는 위에서 종교도 '완성'의 한 축으로 든 것과 연관이 있는 부분이 나온다. 바로 그가 비국교도를 비판하고 국교도를 옹호한 부분이다(영국의 국교는 예나 지금이나 프로테스탄트 중에서도 오직 성공회만을 포함한다. 다른 프로테스탄트 세력들도 역시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영국 기준으로는 비국교도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아무런 근거도 없이 비국교도들은 진정한 프로테스탄트의 이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주장을 한다. 또한 역시 별다른 근거도 없이 비국교도들의 행실이 프로테스탄트적 내재적 규범에 기반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늘어놓는다(사실 근거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비국교도』지의 한 기자가 보인 행태를 두고 모든 비국교도의 행동으로 일반화 시킨 것이 문제다. 해당 예시를 통해 비국교도 전반의 행동을 지적하기에는 너무 근거가 불충분하다.) 이 점은 명백히 그의 종교에 관한 관점이 편향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부분은 그런 이유로 발간하자마자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이어서 그는 '속물'들의 이념인 '자유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잇는다. 그에 따르면 중간계급들은 자유주의를 방패 삼아 노동자와 언론인들을 실질적인 현장에 내몰고 있다. 그들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노동계급들도 그러한 흐름을 이어받고 있다는 진단을 내린다.
하지만 그의 자유주의 비판은 진정 불충분한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자유주의와 그 기반이 되는 사상들에 대하여 오직 인상비평만을 펼친다. 키케로의 『의무론』에 '소크라테스가 소개하고 다니던 도덕은 말에 있었고, 지혜는 종전까지의 사람들의 경험과 배치 되었다'고 쓰여있기 때문에 벤담의 말이 틀렸다고? 세상에 그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어디 있는가? 나는 그가 벤담을 읽어보기는 한 것인지 진심으로 의심이 된다.
어떠한 권위를 가진 새로운 견해가 기존 경험과 배치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경험적 판단 자체가 무용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는 없다. 오직 위 소크라테스 사례에서의 당시의 경험적 판단만이 틀린 것일 수도 있는 판단이다. 그런데 벤담의 주장이 그것과 어떤 직접적 연관이 있는가? 내가 알기로 벤담의 주장은 절대 고대 그리스에서 만연하던 여타 사상들과 똑같지 않다(에피쿠로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없지 않다. 그러나 절대 똑같지는 않다.) 그는 엘베시우스, 흄 등의 철학자들을 바탕으로 '공리의 원칙'을 체계화 해낸 사상가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사상(하물며 우리는 그것이 어떤 것들인지에 대해서도 정보가 많지 않다)을 그대로 답습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설령 아널드가 취한 결론이 받아들여질 수 있더라도 문제는 남아있다. 그는 벤담 사상의 어디가 그것과 부합하여 틀렸으며, 그 사실이 어떻게 그의 체계를 불충분하게 만드는지와 같은 것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오직 위에 제시한 지극히 불합리한 결론만을 놓고선, 벤담은 사상 속에 그의 편협함을 반영했다는 등의 '비난'만을 늘어놓을 뿐이다(물론 밀을 포함하여 후대의 공리주의자들은 벤담의 사상에서 포괄성이 부족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다만 벤담의 진지한 법철학, 정치철학적 관점에서의 논증을 이런 식으로 피상적이게 비하하는 것은 모욕임이 틀림없다. 내가 벤담을 무조건 비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서론』이나 『정부론』에서 그가 펼치는 논증이 여기서 아널드가 보여준 것보다는 훨씬 더 정교하다고 자신할 수 있다.) 이 저자는 막상 본인의 편협함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심지어 '노동계급이 국가 경제에 기여한다는 이유로 참정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속물적인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것은 금전적인 기여는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다는 그의 기계 장치에 대한 설명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는 본인이 말하는 '속물'적 배금주의 때문에 노동자들이 착취 당하는 것은 문제 삼으면서, 막상 노동자의 권리신장은 방해하려고 한다.
노동자들이 그들의 투표권 획득의 명분으로서 경제적 기여를 내세운 것이 그들이 '속물', 그러니까 '기계 장치'인 금전을 숭배하기 때문인가? 그게 아니라 자신들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구성원 일반의 복리에 중대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유용한 수단을 생산해내는 데에 대한 기여를 인정해달라는 것과 그 수단을 숭배하는 것은 다르다. 굳이 숭배하지 않아도 수단적인 가치 자체는 인정되기 때문이다. 금전을 숭배하지 않는다고 해서, 교환을 위한 재화 자체가 필요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배금주의 사회든 아니든 모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나올 수 있는 명분이다.
그는 말한다. "이것은 사회적인 이념이며, 교양인은 진정한 평등의 사도들이다."
'진정한 평등의 사도들'이 평등을 위한 시도를 가로막는 상황이 너무도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이 더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편협하다며 모욕했던 벤담이 오늘날 민주공화정의 기반이 된 비밀투표와 보통선거를 최초로 체계화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2. 내키는 대로 하기
이 논고에서 아널드는 이전의 논고를 보충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이전 논고에서는 '단맛과 빛' 중 아름다움에 해당하는 '단맛'만이 소개되었다.
그러므로 이번 논고에서는 지성에 해당하는 '빛'에 대해 다뤄보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자신이 첫 논고를 발표한 뒤에 받았던 비판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주로 실천성에 대한 공격이었다.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이 저작의 발표 시기는 한창 사회 개혁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보니 그 비판들이 더욱 매섭다.
이에 대해 그는 이전 논고에서의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한 개혁들은 무질서 한 것이기 때문에 손을 빌려주지 않는 편이 낫다'고 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다음 부분을 보고 알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그는 에드먼드 버크와 동류거나, 적어도 동류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그가 당대의 자유주의 운동들을 보면서 하는 말을 들어보자.
그는 영국인들이 현재는 '자유'도 기계 장치처럼 숭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요컨대 자유의 진정한 목적은 모두가 잊은 상태라는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중세적 봉건 질서가 해체되고 '복종'이라는 관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주장은 무엇인가? 에드먼드 버크적 의미의 '개인의 합보다 더 거대한 이성으로서의' 국가라는 개념이 복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자유'가 국가 전체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필요하다는 그의 말도 부분적으로는 인정한다. 다만 나는 그가 '자유'의 개인적인 효용을 간과하는 데에 대해서는 벤담의 금언으로 답하겠다.
"개인의 이익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공동체의 이익을 이야기하는 것은 헛수고다."–제러미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서론』의 제1장.)
이어서 그는 하이드 파크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논평을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이 또한 영국인 특유의 '내키는 대로 하려는', 즉 개인적 자유를 추구하려는 성향 때문에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돌발 상황이 일어난 이유도 그들이 자유를 기계 장치처럼 숭배하나, 이성에 대해서는 적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무질서가 반복되면 결국 무정부적 상태가 초래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이 부분 역시 합당한 근거 없이 도약을 꾀하는 양상이 보인다.
하이드 파크 사건과 그 배경을 이루는 일련의 개혁적 움직임이 정말 '개인적 자유'만을 위해서 발생했는가? 그것은 엄연히 노동자 일반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겠다는 공적인 의도로 시작된 것이 아닌가? 뒤에도 나오겠지만, 실은 그의 '국가'와 그 '시민 일부'의 이익관계를 분리해서 보는 관점과 연관이 있다.)
상기한 무질서(실제로 그 모든 게 단순 '무질서'라고 치환될 수 있다면)를 막기 위해서는 그것을 조정할 수 있는 국가의 권위가 필요하다. 그에 따르면 이 권위는 각 계급들에서 자신들이 맡아야 한다고 앞다투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토마스 칼라일과 같은 전통주의 저술가들은 귀족계급이, 존 로와 같은 자유주의 저술가들은 중간계급이, 그리고 노동계급들은 자신들이 그 권위를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널드 자신은 셋 중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귀족계급에게는 '단맛'은 있어도 '빛'은 없다. 그들에게는 구시대의 품위가 있기 때문에 중간계급들의 천박함을 비추는 도구로서는 유용하지만, 정작 지성은 부족하다. 그것에 관심이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중간계급은 과하게 자족적이다. 그들은 이념의 시대에서 가장 적합한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교양의 두 가지 측면 모두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 '단맛'은 가지고 있지 않으며, '빛'은 너무 치우쳐 있어 더이상 빛이 아니다.
노동계급은 두 가지 모두 부족하다. 그들은 스스로가 처한 환경 때문에 마땅히 읽고 쓰는 교육을 받지 못했으므로, 지성이고 아름다움이고 결여된 상태에 있다.
그렇다면 누가 담당해야 하는가? 답은 다시 교양이다. 그러나 그 선언만 본다면, 그가 이 논고의 결론부를 통해 내놓은 이야기는 꽤나 귀담아들을 만한 듯하다. 그는 각 계급들의 투쟁과 혼란으로서가 아니라, 건전한 정치 활동을 통해 개혁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첫번째 논고에 비하면 우리가 받아들일 만한 결론이 나왔다. 물론 이러한 결론을 내기 위해 과도한 일반화나 비난들을 담아내긴 했지만 말이다.
또 하나 문제가 있다면 그가 전체주의의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 될 수 있겠다. 그는 각 계급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들의 이익관계를 초월한 국가가 필요하다는 시점을 계속해서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단순히 보면 이상적일지 몰라도 현실적으로 경계돼야 한다. 왜냐하면 계급적 이익관계(그의 이런 대분류가 실제로 맞다면)를 가진 사람들이 실제 국가의 인민들이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내가 벤담을 인용하면서 말했듯이, 그들 각자의 이익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국가 전체의 이익도 없다. 하지만 아널드의 말 대로 그들의 이해에서 상당 부분은 각자 다르므로 시시각각 충돌한다.
이에 대해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결론을 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실제로 국가를 구성하는 인민이며, 스스로의 이익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그들 각자가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을 초월한 국가(이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사람들은 현대에도 없지 않다)가 구성된다고 한들, 각각의 대표자들보다 그들의 이익에 대한 대표성을 가질 수는 없다.
적절한 대표성을 가지지 못하는 이들이 국가에 중심에 서는 것이, 정말 구성원 전체의 통합적 이익을 실현하는 데에 적합한가?
아마도 아널드가 이 말을 듣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진정한 교양을 갖춘 사람이란 '사심 없는 상태를 지닌 이'라고 자기가 말하지 않았는가 하고 말이다.
그 말은 좋다. 하지만 우리는 유구한 정치의 역사 속에서 사심이 사라지는 꼴은 전혀 본 적이 없다. 적어도 정치권력 전반에서 사심 없는 상태는 한 번도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다.
무엇보다 '국가 전체의 이익'도 타국 입장에서는 사심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이를 논한다면 애초에 사심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결국 본인이 포괄하는 범위에서의 공익 추구도, 다른 집단 기준으로는 사심이 들어간 관점임이 발각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차치하더라도, 이미 국내 정치에서만 해도 사심이라는 것을 배제하는 일은 상당히 요원해보인다. 다양한 사람들이 분업을 이루는 대의정부라면 말이다(전제정이라면 일반 시민에게는 교양이 전혀 필요 없을 것이다. 아널드는 첫번째 논고에서부터 교양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해왔으며, 줄곧 영국을 대상으로 논의를 이어나갔다. 따라서 이는 군주정이나 공화정 등의 대의정부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충분한 이야기라고 본다.) 다음의 인용문은 그러한 대의정부의 본질을 잘 담고 있다.
"파벌의 원인을 제거하는 데는 다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파벌의 존립에 필수적인 자유를 말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시민들에게 동일한 의견, 동일한 정념, 동일한 이해관계를 부여하는 것이다.
(...)두 번째 처방은, 첫 번째 처방이 어리석은 만큼이나 실현 불가능하다. 인간의 이성이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고 또 한 인간이 자유롭게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한, 상이한 의견들은 형성되기 마련이다."(제임스 매디슨 외, 『연방주의자 논집』의 제10번 논문.)
그럼 결국 어떻게 해야된다는 것인가?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사심이 서로 견제하도록 만드는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아널드가 존경한다고 밝힌 몽테스키외가 일찍이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인용문의 매디슨 역시 결론부에서 그런 주장을 한 바가 있다.
나는 아널드가 스스로의 주장에 대해 다소 검토해보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사심 없는 인간'들이 하나의 대의정부를 이룰만큼 확보될 수 있다면, 나도 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랬던 적이 없기 때문에, 비판자들은 그의 주장을 가능성이 낮은 의견으로 치부할 수 밖에 없다. 아널드가 말한 건전한 정치 활동은 '사심 없음'이 아니라 '사심의 상호견제'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3. 야만인, 속물, 우중
이 논고의 시작 부분에서 아널드는 자신을 두고 '철학적 엄밀함이 없다'고 지적한 이들을 조롱하며 시작한다. 아무래도 자신이 귀족, 중간, 노동의 세 계층의 결점을 철저히 밝혀내지 않아서 그런 듯하다며 말이다. 즉, 이 논고에서 그가 새로 적어내려는 사항은 영국을 구성하는 세 계급들에 대한 더욱 상세한 관찰이다.
그는 먼저 귀족계급을 공격한다. 전술했듯이 그가 생각하는 귀족계급의 장점은 기사도적 품격이며, 그 과잉은 호전적인 태도이다. 그렇다면 결함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현실에서는 그들의 미덕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대책 없는 부적응이나 수구적 심리를 보인다는 데에 있다. 중간계급들이 하려는 개혁에 지금까지 귀족계급들은 전혀 대책도 없이 반대만을 해왔다. 그들은 지나치게 '머무르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아널드는 이를 '기성사실적인'이라고 적었다. 수구적이고 반지성적인 경향이라고 보면 충분할 듯하다.) 이것이 아널드가 말한 귀족계급의 현실적 결함이다.
다음으로는 중간계급에 대해서다. 중간계급의 장점은 자족적 심리이다. 이 심리의 유용함은 그에 힘입어 끝까지 본인들이 추구하는 바를 실현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그 과잉이란 아널드가 이전 논고에서 말한 '이성에 대해서 적게 생각하는', 다시 말해 숙고가 부족한 모습이다. 그는 여기서 '결함 있는' 중간계급으로서 자신을 지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지한 자아비판이라기보다, 반대파에 대한 비아냥거리기에 가깝다. 요컨대 자신은 지나치게 자족감이 없고 매사 숙고하기 때문에 중간계급답지 않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이는 중간계급 개혁가들의 진보성에 대한 비판으로 읽힌다.
마지막으로는 노동계급에 대해서다. 그는 노동계급의 장점에 대해서는 소개하지 않는다. 결함의 경우 이전 논고에서 제시한 것과 유사하다. 노동계급들은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에 파멸적인 생활습관에 이르기 쉽고, 그렇게 된다면 결국 그들이 주도하는 운동들도 일관적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관찰에서는 중간계급들과 대조되는 지점이다. 중간계급의 장점은 개혁에 있어 일관된 태도를 보이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각각의 계급에게 새로운 명칭을 붙이기로 한다. 중간계급은 빛(계속해서 설명해왔던 대로, 그의 체계에서는 지성을 뜻한다)이 아니라 '편의에 따라 행동한다'는 점에서 '속물'이다(그는 중간계급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붙이지 않는다. 다만 후술할 노동계급 부분에서 두 계급을 동시에 비난한다.)
귀족계급은 단맛(계속해서 설명해왔던 대로, 그의 체계에서는 아름다움을 뜻한다)만 가지고 있을 뿐, '그들의 습관에 빠져 있어 빛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야만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교양 있다'고 부르지만, 실상 외적인 측면에 한정될 뿐이다. 그들이 가지는 교양은 귀족계급들의 기원인 야만적인 품성(풍모, 용기, 기백, 자신감 등)에서 온다(이는 의외로 프리드리히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좋음과 나쁨'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 대목과 연관된다.
위 대목에서 '야만인'이라는 다소 멸칭에 가까운 별명이 붙었지만, 줄곧 이야기한 대로 아널드는 그들이 교양의 반쪽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니체나 칼라일처럼 귀족의 속성을 모두 긍정하지는 않지만, 그 역시 일부는 긍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아이러니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가 여기서 칼라일을 직접적으로 언급까지 해가면서 조롱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은 것은 하나 뿐이니, 그의 기준에서 노동계급은 '우중'이 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아널드가 하는 말은 자세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당시의 개혁 국면에서는 중간계급 정치인과 노동계급 인사들의 협력이 있었다. 아널드는 이것을 서로의 이해관계가 하나된 것으로 보고 '속물'로 취급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실태를 아주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중간계급 자유주의자들이 '본인들만의 천년왕국'을 세우기 위해 노동계급들을 끌어들인 악의 넘치는 행동으로 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들 집단은 최상의 자아가 아니라 통상적 자아에 의존 중이며, 그것은 내면적인 완성이 아니라 산업적인 기계 장치로 구성 되어있다(이 부분 역시 굉장히 모호한 언어로 되어있어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할 듯 싶다.
그가 말하는 '통상적 자아'는 '최상의 자아'와 대치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계 장치'로 구성 되어있다. 다시 첫번째 논고로 돌아가보자. '기계 장치'란 무엇이었는가?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고, 오직 수단적이기만 한 것들이다. 자아가 그것들로 구성 되어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나는 그것들을 목적으로서 추종하는 경향, 즉 아널드가 이야기한 '속물'적인 자아를 말한다고 추정한다. 이는 그것을 '내면적인 완성'과 대립시키고 있는 데에서 짚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와 대립되는 '내면적인 완성'으로 구성된 '최상의 자아'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가 말하는 '교양'을 갖춘 '사심 없는' 자아일 것이다. 앞서 그는 교양이 '내면적인 완성을 위한 공부'라고 정의한 바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의미를 짚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중간계급들과 연결점이 적은 나머지 노동계급들은 어떠한가? 이전 논고에서 그가 이야기한 대로, 그들은 어떠한 숙고도 없이 '모든 것을 내키는 대로 하려'고 하므로 '우중'들이다(논점 자체도 이전 논고에서와 유사하다. 그는 여전히 하이드 파크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이러한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아널드에 따르면, 이 세 계급 사이에서도 상술한 '완성에 대한 추구', 다시 말해 교양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 논고에서 '이방인'으로 분류된다. 그는 그들에게도 '최상의 자아'와 본인들이 명목상 속한 계급의 '통상적 자아'가 동시에 있다고 설명한다. 그들이 전자를 끌어내면 '교양'을 갖춘 사람이, 후자를 끌어내면 야만인이나 우중이나 속물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상의 자아'를 가진 사람의 수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그는 이들의 취향(특히 정치에 대해 이 말이 적절한지 모르겠다)은 '평범한' 세 계층에 대해서는 우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정 '올바른 이성'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위는 문학, 종교, 정치를 막론하고 존재한다. 현재(아널드의 시점에서 하는 이야기이므로 당대를 말한다)의 영국에는 진정한 사상이 없는데, 이유는 올바른 이성과 정신이 세우는 권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범한 것에 대한 타고난 취향'에 잠식된 사람들만 한가득 있다.
그는 이 다음 부분에서 정치와 교육에 대한 의제를 통해 사실상 군주의 권위를 옹호하고 있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군주가 실효 통치하는 국가에서는 피통치자의 직접적인 동의 없이도 '올바른 이성'으로 권위를 내세울 수 있지만, 영국은 대의제 국가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이러한 정치 지형 때문에 정치인들은 본인을 지지하는 계층들을 위해 올바른 이성보다는 계급 분쟁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또, 독일에서 군주는 직접 저명한 학자들에게 자문을 받아 학교를 설립했지만, 영국에서 통치자는 '외판업자 학교' 같은 허접한 시설에 가서 박수나 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별론이지만, 이는 그의 교육에 대한 관심을 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주석에 따르면, 실제로 그가 장학사로서의 용무 때문에 독일에 들렀을 때 경험한 바를 토대로 하고 있다고 한다.)
이어서 그는 진정한 권위로서의 '최상의 자아'와 '올바른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반박하겠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당대에 상기한 주장을 보이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번째는 우리의 자아와 취향들이 무수히 많으며, 이들 간의 우열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이 경우 최상의 자아라는 건 없다. 혹은 있다고 해도 우리는 정확히 인지할 수 없고, 이용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두번째는 자아와 취향에서 우열이 있긴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추구할 이유는 없다는 주장이다. 이 경우 오히려 자연스럽게 우리는 우리 본성에서 최고를 찾을 것이라는 견해가 이어진다.
그는 이에 대해 비판하면서 독일과 프랑스의 사례를 들고 있는데, 결국 제대로 된 반박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피상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중요한 첫번째 주장에 대해서는 거의 유효한 반박 자체가 제시되지 않은 것은 덤이다. 그에 대한 나의 감상은 바로 다음 부분에서 잇도록 하겠다.
이쯤에서 우리는 그의 견해들이 적절한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분명히 지적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를 적는다.
가장 첫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당대 개혁 논제를 두고 이루어진 자유주의자들과 노동계급의 협력을 그가 단순히 '속물 무리들'로 환원한 부분이다. 아무래도 이 부분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지난 첫번째 논고에 대한 감상에서 이야기한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유는 그의 인식 자체가 '노동자들의 개혁 요구는 기계 장치를 숭배하는 속물적 경향에서 나온다'는 독단적인 가정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상술한 대로 그렇게 단언할 수 없음을 충분히 이야기했다.
두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래서 '최상의 자아'와 그것을 구성하는 '올바른 이성'이라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가 하는 부분이다.
이 역시 앞에서부터 줄곧 말했지만, 읽는 입장에서 전혀 짐작이 가는 방식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정말로 그들이 '평범한 취향'보다 절대적으로 우수하게 평가될 만한 근거가 있다면, 그는 이것을 면밀하게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그것을 통해 '국가의 권위'를 세우고, 우리를 계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데에 어떻게 납득 하겠는가? 이대로만 본다면 어떠한 특별하고 우월한 인간상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그것으로 자의적 지배를 한다는 것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세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결국 상기한 두 개념이 존재하기는 하냐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개념에 관해 제시된 두 가지 반론에 제대로 답변하지 않았다. 두번째 반론에 대해서는 빌헬름 폰 훔볼트의 『정부의 영역과 의무』를 인용하여, 우리가 향상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할 것을 역설한 바가 있다. 하지만 첫번째 반론에 대해서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이상 아널드의 전제는 논증될 수 없다. 우리가 훔볼트의 견해를 통해 인정할 수 있는 것은 '교육을 통해 더 나은 지평을 추구할 수 있다' 정도가 된다. 그것은 '완성'으로서의 '최상의 자아'라던가 '사심 없는 상태'가 존재한다는 걸 말해줄 수 없다.
네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정말로 중간계급 자유주의자들의 속성이 '숙고의 부족'인가 하는 것이다. 그는 줄곧 중간계급들은 '개혁에 있어 일관적이지만, 지나치게 본인들의 생각에 자족하여 이성이 부족'하다고 묘사해왔다.
나는 당대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한 중간계급 자유주의자의 이야기를 통해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그 주인공은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존 스튜어트 밀이다. 그는 해당 선거 개혁 과정 전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당대 자유주의자의 상징격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여기서 그를 거론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내가 그의 저작을 통해 아는 한, 밀은 '매사 자족하며 숙고가 없는' 사람은 분명히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항상 중용을 추구하려고 애쓰는 인물이었다(아널드가 밀과 동시대인이긴 하지만, 내가 그보다 밀에 대해 모를 이유도 없다. 아널드 역시 공식적으로 밀과 대면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즉, 아널드와 나는 모두 밀을 기록으로만 접했으므로 공평하다.) 그는 일찍이 『벤담론』과 『콜리지론』을 통해 대립되는 두 사상가의 타당성을 동시에 인정하며, 이를 절충해야 된다는 견해를 낸 바가 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하나인 『자유론』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밀은 해당 저작에서 자기 의견이 옳다고 권위적으로 주장하기는 커녕, 모두의 표현의 자유와 검증을 위한 토론을 옹호했다. 독선적이고 숙고가 없는 인간상과는 역으로 거리가 멀었던 셈이다(여담으로 이 『자유론』은 아널드가 위에서 언급한 훔볼트의 『정부의 영역과 의무』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서두에서 하이드 파크 사건에 대해서 소개한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듯, 밀이 이 일련의 개혁들의 중심축에 서있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아널드의 '개혁을 위해 노동계급과 손잡은 작금의 중간계급 자유주의자들은 모두 그렇다'는 식의 환원은 그다지 일리 있는 견해는 아닐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