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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어쨌든 자신의 전제에 대한 타당성을 떠나서, 그는 여기서도 이전의 인용을 바탕으로 주장을 전개한다. 다시 말해, 훔볼트와 르낭 등의 교육학자들의 저서를 바탕으로 '올바른 이성'과 '최상의 자아'에 대한 공적 인정이 필요함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 인정과 현재 영국의 지적 관습이 서로 상충한다는 데에 대한 근거와 원인을 해명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두 가지 힘이 있다.
첫번째는 '의무와 자제와 일에 대한 드높은 책임감, 우리가 가진 최상의 빛을 남자답게 준수하려는 열의' 등이고, 두번째는 '인간의 발전과 더불어 요구되는 생각의 새롭고 다른 조합에 대한 열정적인 감각, 그 생각을 완벽하게 알고 적용하려는 불굴의 충동' 등이다(그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나, 다소 수사적인 언어가 들어가있어 미묘한 방향으로 읽힌다. 지금까지 그가 해왔던 이야기를 감안했을 때는 이렇게 읽힐 수 있을 듯하다. 전자는 '행동'을 위한 힘이고, 후자는 '숙고'를 위한 힘이라고 말이다.) 그는 이 두 가지 힘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나 현재 영국에서는 전자가 너무 불균형하게 강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하인리히 하이네에게서 따온 용어로 이 두 가지 힘을 명명하는데, 그것이 이 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아널드는 전자의 힘은 헤브라이즘, 후자의 힘은 헬레니즘이라고 이름 붙인다. 이 이름은 보면 알 수 있듯, 특정한 문명에 대한 상징성을 담고 있다.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 문명의 미덕을, 헤브라이즘은 아브라함 계열 종교에서 통용되는 미덕을 상징한다(아널드의 이러한 해석이 정확한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행동하기보다 숙고했는지',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비롯한 아브라함 계열 종교인들은 숙고하기보다 행동했는지'와 같은 질문들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재단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경향성을 떠올리자면 어느 정도 일리는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처럼 이 두 가지 경향을 양분시킨 사상가들은 곧잘 이런 특징을 짚어내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세계가 이 두 가지 힘을 통해 움직이며 그 공통의 목표는 '인간의 완성' 내지 '구|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서로 종종 서로 대립하는데, 이는 어느 한 가지를 높이려는 시도들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로버트슨 신부를 헤브라이즘을 높이는 사람으로, 하이네를 헬레니즘을 높이는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의 기준에서 이러한 두 가지 시도들은 모두 특정한 힘에 대해 부당한 취급과 왜곡을 갖는다.
두 가지 힘의 목표는 상술한 대로 동일하다. 하지만 아널드는 그 방식은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헬레니즘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헤브라이즘은 실행하고 복종하는 것을 그 미덕으로 본다. 그래서 두 방향이 가지는 궁극적인 지복의 기준도 다르다. 헤브라이즘은 바르게 행동하는 것 자체를 지복으로 본다. 한편 헬레니즘은 바르게 생각하는 것을 지복으로 본다.
이 둘은 모두 육체와 욕망에 대해 경멸하지만 그 이유 역시 초점이 다르다.
아널드는 여기서 두 힘의 바탕이 모두 신에서 비롯되지만 그 방향성 역시 다르다고 말한다. 헤브라이즘은 앎이 이미 주어졌다고 보고, 이에 자신을 항상 종속시키는 데에 몰두한다. 반면 헬레니즘은 의식의 자발성을 중요한 이념적 경향으로 여긴다(아널드의 말이 맞다면, 이러한 차이는 결국 종교관의 문제일 수 있다. 헤브라이즘은 유일신교이고, 신에 대한 일말의 훼손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해왔다. 하지만 헬레니즘이 가지고 있었던 고대 그리스 종교는 다신교였고, 다양한 형태로 재창작 되었으며 그것을 행한 작가들이 명성을 얻기도 했다.)
그는 솔로몬, 아리스토텔레스, 야고보, 에픽테투스, 플라톤 등을 들어, 그들이 유사한 말을 하고 있긴 하다고 말한다(물론 이는 당연한 것이다. 우리도 알다시피 그리스도교는 고대에는 플라톤, 중세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 사이에는 대척점이 있다. 아널드는 특히 내재적 규범의 목적과 '죄'라는 개념의 위치에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결국 내재적 규범이 실제 율법을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내재적 규범, 그의 용어 대로 하자면 '덕'은 지적인 성취에 가깝다. 헬레니즘은 명료한 사유를 마땅히 귀중한 위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헤브라이즘에서는 죄를 의식하는 깨달음을 그런 종류의 위업으로 본다.
그는 여기서 인간 본성에 대한 헬레니즘적 관점은 부적절 했음이 드러났으며, 당시로서는 시기상조였다고 본다. 왜냐하면 세계가 그것만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헬레니즘은 많은 장점이 있지만, 행실과 자제와 같은 토대 없이는 그가 말하는 '완성'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이 부분 역시 상당히 많은 설명이 생략 되어있다. 우리로서는 아널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읽어내기가 어렵다. 헬레니즘의 인간 본성에 대한 관점이 어째서 불건전 한가?
그는 그 이유는 물론이고, 헬레니즘이 생각하는 인간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추측해보는 수 밖에 없겠다. 아마도 그는 헬레니즘의 인간 본성을 그 힘 자체와 유사하게 보고 있는 듯하다. 요컨대 사유하고 숙고하는 경향만 가지고는 세계를 움직일 수 없다는 의미로 추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에 세계는 헤브라이즘이 지배했다고 그는 말힌다. 그 헤브라이즘의 헤게모니는 그리스도교였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모범적 인간상에 순응하는 게 목표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금욕주의와 고통에 대한 발상은 모두 이런 경향에서 탄생했으며, 그것은 세계에 널리 자기희생적 도덕을 퍼뜨렸다(그는 이 대목에서 거의 훗날 니체가 그리스도교에 대해 한 말과 공명한다. 단지 아널드는 헬레니즘만 추종하는 태도 역시 경계했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알다시피 니체는 아널드의 기준에서 보자면, 헬레니즘의 열렬한 찬양자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죄의식과 자기희생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어쩌면 헤브라이즘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내재적 규범의 실재를 긍정하는 것이므로, 근본부터 다르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뒤에서도 아널드는 '도덕적 충동'이라는 게 실존한다고 보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거나 논증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내 헤브라이즘이 오랜 시간 서구 세계를 지배했다고 해서, 인류 역사의 전부는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헬레니즘과 마찬가지로 그것도 한 가지 힘이다. 그리고 둘은 모두 인류 역사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하지만 두 가지 중 하나만 추구할 때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바울로가 『고린도서』의 15장에서, 플라톤이 『파이돈』에서 펼치는 작업들은 모두 불안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이는 아널드의 말이다. 두 사람에 대한 내 개인적인 평가가 아니다.)
반면 두 가지 힘이 번갈아 발휘된다면 인간 정신은 앞으로 나아간다고 아널드는 주장한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예시로 르네상스를 든다. 알다시피 르네상스는 그리스도교적 전제들을 여전히 유지하는 동시에, 고대 그리스 철학들도 더 광범위하게 포용한 움직임이었다.
아널드의 주장이 신빙성이 없는 것은 아닌 셈이다(물론 그의 헤브라이즘/헬레니즘 해석 자체가 논란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넘기도록 하자.)
그러나 르네상스와 시기가 겹치는 종교개혁에 대해서는 입장이 조금 다르다. 그는 종교개혁에 있어서는 결국 헤브라이즘으로의 회귀적 성향이 더 강했다고 본다. 프로테스탄트가 가톨릭에 비해 무언가 우위가 있다면 그것은 지적인 측면이 아니라 규범적인 측면이 된다(이 역시 꽤나 정확한 이야기이다. 실제로 마틴 루터나 장 칼벵 같은 종교개혁에서 중요했던 인물들은 그리스도교의 내재적 규범에 복종할 것을 강조했다. 애초에 그들이 당대의 가톨릭을 비판했던 것도 이러한 측면의 엇갈림에서 비롯된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그 뒤에 이야기하는 부분은 다소 부정확할 수 있다. 그는 상술한 르네상스가 내재적 규범과 이에 대한 기질을 약화시켰고, 그래서 프로테스탄트가 승기를 잡았다고 말한다.
특히 17세기 영국에서 영국인의 내재적 규범에 대한 열의가 헬레니즘의 부활을 경계하면서, 자연히 프로테스탄티즘을 성행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에는 분명히 어폐가 있다. 그 당시 영국 내전에서 의회파가 승리하고, 국교회주의가 성행한 것은 내재적 규범에 대한 열의와는 별개로 보는 것이 맞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정쟁이었다. 크롬웰의 국교회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도 적지 않았다. 국왕의 폭정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었고, 의회파는 반대 세력이라서 승리한 것이라고 인식하는 편이 더 타당해보인다.
실은 르네상스가 그리스도교적 내재적 규범을 약화시켰다고 볼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강렬한 규범적 이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독실한 가톨릭교도였다.)
이후 그는 영국인들이 잘못된 선택을 해왔다고 말한다. 지난 200년 가까이 세계는 헬레니즘을 향했으나, 영국은 헤브라이즘 하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전한 질서와 권위를 새로이 확립해야 하며, 이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헬레니즘적 관점을 확대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아널드보다 한 세대 이전에 있었던 헬레니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계몽주의는 주로 가톨릭에 대해 저항했다. 그들이 과도하게 헤브라이즘적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또 볼테르나 몽테스키외 등의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영국의 헬레니즘적 성취에 대한 호감을 표하기도 했다—볼테르는 꾸준히 영국의 경험주의 전통과 그 성과를 예찬해왔다. 몽테스키외는 아예 영국식 군주정을 이상적으로 보기도 했다.—게다가 당시 전 유럽이 계몽주의의 흐름 하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실은 영국인이 헤브라이즘에 지배되고 있었는지 여부도 의문이다.)
여기서 아널드는 이전 장에서의 '숙고의 부족'을 전제해놓고 시작하므로, 그에 대한 비판 역시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당대의 개혁 움직임 뒤에는 일정한 사상적 배경이 존재했다. 분명히 그 사상들은 누군가의 숙고로 인해 탄생한 것인데, 거기에 힘입어 진행되는 개혁들을 두고 단순히 행동이 앞서는 성향 정도로 치환하는 게 적절한가 싶다.

5. 그러나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그는 앞선 논고들을 통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개개인의 제1의 권리이자 행복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 기저에는 올바른 이성에 대한 불신이 있다는 점을 밝혀냈다'고 말한다(뭘 밝혀냈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앞에서는 영국인들이 헤브라이즘에 휩싸여 있다고 말했는데, 이제는 또 본인들 내키는 대로 한다는 견해로 되돌아갔다.
결국 이게 다 무슨 말인지는 또 추론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그가 말한 헤브라이즘적 현상이라는 게 '개인의 자유'를 맹목적으로 믿는 모습과 연결된 것이 아닌가 싶다. 상술한 청교도주의가 아니고 말이다. 앞서 설명했던 기계 장치에 대한 숭배라던지, 내키는 대로 하기와 같은 지적들과 연관시키면 어느 정도 일관성이 확보된다. 요컨대 자유나 금전과 같은 요소들을 신앙처럼 여기며, 이를 판단하는 이성이 결여 되어있다는 지적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전혀 부연설명이 없기 때문에, 아널드의 진의는 알 수 없다. 단순 독자 입장에서의 추측일 뿐이다.
그렇다고 한들 앞에서 다룬 반박들로 인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게 된다는 맹점이 있다. 사실은 그에 더해 맹점이 하나 더 있는데, 그가 영국인이 헤브라이즘에 휩싸인 계기를 청교도주의로 설명했다는 점이다. 청교도주의에 대한 맹목이 자유나 기계 장치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다면 그 배경을 설명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는 언제 어떻게 변했는지는 고사하고, 아예 그렇게 됐다는 언급마저 생략하고 있다. 이래서야 두 가지—청교도주의/방종주의 혹은 물신주의?—를 동일시 하는 것 자체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후 그는 인간 본성에는 도덕적인 측면과 지적인 측면이 있으며, 이는 번갈아 작용한다고 설명한다(아마도 이것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구분의 연장선에 있는 듯하다. 도덕성, 그러니까 내재적 규범적인 측면이 지적인 측면과 이분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심을 낳는다. 그의 이분법은 지나치게 일반화 돼있을 수 있다.)
또한 앞서 설명한 단맛과 빛은 헬레니즘적인 인간상과 명백한 관계가 있다고 밝힌다. 그에 따르면 이것의 정수는 플라톤이 말하는 변증법이다. 그것은 자연에 관한 충실성을 담보한다. 아널드는 여기서 단맛과 빛을 지향한다는 것이 곧 헬레니즘을 지향한다는 것이나 다름없다고까지 말한다.
시즈윅과의 논쟁도 이 대목에서 언급되고 있다. 아널드는 그에게 반론하면서 그리스인들에 대한 예찬을 시작한다. 사물의 진리는 동시에 아름다움이기도 하며, 그리스인들은 근대인과 다르게 광신주의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말이다. 또, 헬레니즘은 내재적 규범의 측면에서 실질적 만족은 주지 못했지만, 그 측면에서도 포괄적으로 부응하며 대립하는 가치들을 화해시켰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헬레니즘적 사고방식은 철학적으로 가장 가치 있으며, 근대인에게는 최선의 교훈이 된다는 것이 그의 논변이다(실질적 만족은 주지 못했지만 부응하기는 했다는 표현이 무슨 말인지 해석하기가 어렵다. 앞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양립해야만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헬레니즘을 상징하는 그리스인들이 이미 내재적 규범의 측면에서도 지적 측면만큼이나 훌륭했다면, 헤브라이즘은 왜 필요한가? 헤브라이즘이 내재적 규범에 대한 요구 때문에 서구를 지배해왔다는 전제 자체에도 의문이 생기지 않는가? 일단 단순히 보면 분명히 앞 부분과 호응이 잘 맞지 않는 지점이다.)
그는 상기한 헬레니즘적 사고방식의 확대를 계속해서 역설한다. 제목에서 말하는 '한 가지' 역시 그것과 연관이 깊다. 그 '한 가지'란 결국 앞서 말한 교양의 개념과 일치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항상 최선에 도달하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아널드는 청교주의에 대한 비판을 보여준다. 그는 청교도들이 바울로와 같은 사도들의 저서(그러니까 성경이다)들을 그저 기계적으로만 외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들은 바울로의 진의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며, 단순히 문자 그대로만 맹목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이들이 은총, 믿음, 선택, 의로움 같은 용어들을 모두 괴이한 희화화로만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내세운다.
또 '부활'이라는 표현은 비단 청교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전체가 편협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는 여기서 바울로가 말한 부활의 개념에 대해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이는 본업이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그의 문학적인 역량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헤브라이즘의 광신도들을 비판하기 위해 쓰였는데, 그의 다음과 같은 설교를 보면 알 수 있다. "[헤브라이즘 가라사대, 그는 그의 성경을 아노니!]—를 들을 때면 언제나,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면 언제나 우리로서는 교양을 공들여 옹호할 필요도 없이 그저 이렇게 답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다른 어떤 것도 모르는 사람은 그의 성경도 알지 못하노니]라고."
적절한 비판이었는지는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나는 성서 비평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다시 헬레니즘의 변호를 잇는다.
그에 따르면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지 않으면 참된 본성에서나 실제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 많다. 행위도 그것이 아름답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고 정신에 그 행위를 설명해주지도 않으며, 존재 이유를 보여주지도 않는다."라고 한다. 그리고 담론이나 숭배 등도 모두 마찬가지라는 말을 첨언한다(이 부분 역시 무슨 말인지 해석하기가 어렵다. 각종 행위들이 '아름다워야만' 이해할 수 있으며, 존재 이유도 파악할 수 있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가 말하는 아름다운 행동, 담론, 숭배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가? 그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천하거나 속되거나 역한 것 등을 내세우지만, 이 역시 똑같은 문제를 앓는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냐는 문제 말이다.
그는 상기한 부정적인 측면의 사례로서 마이클 페러데이의 종교적 성향을 문제 삼고 있다. 그러나 페러데이가 소속되었던 샌디먼파가 천하거나 속되거나 역하다는 것은 아널드 본인의 사고방식에서 그칠 뿐이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이 왜 그런 가치판단을 하고 있는지도 설명하지 않는다. 요컨대 우리는 '천하거나 속되거나 역한—아널드의 철학에서—' 사례가 무엇 때문에 천하거나 속되거나 역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헤브라이즘과 상술한 속물의 연관성에 관해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헤브라이즘의 과잉이 영혼의 구|원에 대한 기계적인 방식을 제기했기 때문에, 금전의 숭배와 같은 천한 쪽의 관심사가 대두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받아들여진다면, 후자 역시 전자처럼 기계적인 방식으로 변하게 된다(위에서 그의 헤브라이즘과 기계 장치를 엮는 방식이 불충분 하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혼의 구|원에 몰두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그 관심사가 기계 장치를 향하게 되는가? 그런 식으로 단정 짓는 일은 논리적 비약임이 자명하다.)
아널드는 초기 그리스도교가 이러한 병폐를 헬레니즘의 도입을 통해 완화한 바가 있다고 밝힌다. 구체적으로는 바울로가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배반을 헬레니즘적으로 보고 비판하였으며, 그것으로 그들을 구제했다고 연결시킨다.
이 이야기의 진의는 바울로 때의 유대인들에 당대의 청교도들을 대입시키는 데에 있다. 작금의 청교도들도 종교적 실천보다는 금전을 숭배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같은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헬레니즘적 처방이 필요하다는 뜻이다(이는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종교의 교리들에 대해 주장한 바와 공명한다. 그 역시 교리들은 활발하게 토론될 수 있고, 그것으로 수정까지 고려될 수 있을 때 진리로서의 일면을 지닌다고 보았다.)
아널드에 따르면 당대 영국에서 가장 큰 가치를 가졌던 대상이란 산업적 기획, 체육, 그리고 자유이다. 영국인들은 주변 국가들보다 이러한 가치들에 대한 성취를 빠른 시기에 이루어냈다.
그러나 세상은 영국인들의 자유, 체육, 산업에 대해 관심을 두면서도 경탄이나 열중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상기한 가치들이 영국에서 인간의 완성이 아니라 기계적인 방식으로만 추구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경탄이나 열중을 보인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는 참으로 애매하다. 그러나 내 생각에 아널드의 견해보다는 영국의 성취에 대한 주목이 당시에도 적지 않았다. 위에서도 한 번 언급된 대로 몽테스키외는 영국의 정체를 이상적으로 보았다. 또 미국에서도 해밀턴을 포함한 건국의 아버지들 중 상당수는 영국의 산업을 따라잡는 것을 목표로 했다. 체육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무하기에, 특별히 반론을 내세울 여지가 없다.) 반면에 그리스인들은 똑같이 자유를 추구했지만, 영국과는 다르게 궁극적으로 인간의 완성과 행복을 위했기 때문에 모두가 경탄을 표하고 있는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실은 이 부분도 사실이 아니다.
그리스인들이 행복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 나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을 궁극적인 가치로 강조했다는 사실은 모르지 않는다. 다만 영국에선 그것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는 견해에 어폐가 있다는 이야기다.
특히 그가 첫번째 논고에서 비난했던, 제러미 벤담과 같은 공리주의자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만인의 행복을 극대화 하는 것이었다.
"The said truth is that is 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 that is the measure of right and wrong."—제러미 벤담, 『정부론』의 서문. 국역된 적이 없어서 원문을 그대로 인용했다.
아널드의 억측과는 다르게, 그들은 이유도 없이 맹목적으로 개혁을 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처럼 행복이라는 이상으로 향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널드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교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물의 이해가능한 법칙을 추구하고, 신선한 생각의 흐름이 고정된 관습을 부술 수 있도록 하는 본성, 다시 말해 헬레니즘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이다. 상술한 대로 그에 따르면 이 헬레니즘적 본성은 교양에서 탄생한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교양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금의 개혁 움직임은 '병든 영혼'들이 주도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교양 있는 비행동'으로 일관해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한다.

6. 우리의 자유주의 실천가들
그는 이 마지막 논고를 통해 자신의 주장의 진실성을 입증하겠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당대의 자유주의 운동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장이 된다.
첫번째로 논하는 것은 아일랜드 비국교화 운동이다(이와 관련된 배경도 간략하게 설명해야만 하겠다. 1800년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에 합병된다. 이후 잉글랜드의 국교인 성공회가 아일랜드에서도 국교로 기능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일랜드는 전통적으로 가톨릭의 텃밭이었다. 영국 정부에서는 국교회 신자들과 성직자들을 아일랜드로 보냈으나, 그럼에도 전체 인구 중 고작 10퍼센트 남짓이었다.
문제는 국교회의 지위이다. 당시 국교회는 토지와 재산을 거의 전부 독차지 하고, 아일랜드 국민들에게 교회세를 걷는 등 막강한 권위를 누렸다. 또, 국교회는 국가로부터 교회의 설립 및 운영 비용을 지원 받았지만, 인구 중 가장 많았던 가톨릭은 받지 못했다. 심지어는 아일랜드 의회마저도 국교도 의원들이 항상 다수를 차지하게 되어있었다.
상황이 이러했기에, 이 책이 쓰인 1868년 당시 총리였던 글래드스턴은 아일랜드 국교회 폐지 법안을 추진하게 된다. 결국 1869년에 해당 안이 가결되며, 성공회는 아일랜드 국교회가 아니게 되었다.)
그는 일단 국교회가 아일랜드에서 모든 교회재산을 독차지 하고 있는 상황이 불합리하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아일랜드를 비국교도화 하고, 교회의 기본재산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개혁파들에게는 반대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널드는 그들이 한 세대 전에 내세웠던 '주요 종파들에게 교회 재산을 공평하게 배분하기'에 찬성하기 때문이다. 아널드 입장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더 합리적인데, 지금에 와서 정책을 바꾼 것이 '이성'과 '정의'에 기반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아일랜드 비국교도들의 국교회에 대한 반감을 이용하고 있다고 추측한다. 근거는 당대 자유주의 정치인으로 유명했던 브라이트에게 한 침례교 선교자가 보낸 편지이다. 해당 편지에서는 가톨릭에게 교회재산이 가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면, 현재의 불합리를 내버려 두는 편이 더 낫다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아널드는 이러한 일들이 이성과 정의가 아니라 비국교도들의 물신 성향 때문에 추구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도 사랑과 감사를 일깨울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물신이나 기계적 경향은, 상대편에서 또 다른 물신을 구사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그는 그 예시로 해당 조치에 반발하는 국교도 세력들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이성과 정의의 힘으로 행하는 조치들은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가진다고 설명한다(내 생각에는 이 예시들을 가지고 양자가 물신성을 보여주었다고 말하기에는 불충분하다. 비국교도들은 그의 말과 현실의 역사에 의하면, 자신들의 교회재산 비중을 늘리고자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본적 교회재산이라는 개념 자체를 폐지하는 데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재화에 대한 욕심 때문에 개혁을 지지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또는 그가 '국교회 해체 시에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토지와 재산들이 이전될 것을 기대하고 힘을 모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이 경우는 아마도 첫번째 논고에서 노동계급의 투쟁에 대해 아널드가 했던 말과 같은 맥락으로 취급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반박도 같다. 설령 무언가 쟁취하길 원해서 한 일이라고 한들, 그 자체로 그것을 숭배하는 것으로 치부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보수당을 비롯한 국교도들 역시 물신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결론은 단순히 도출될 수 없다.
그가 제시한 국교도주의자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번째는 영국의 헌정질서가 흔들린다는 데에 대한 염려, 두번째는 종교개혁의 대의가 종식되고 다시 가톨릭 시대로 돌아갈 것이라는 망상, 세번째는 가톨릭 타도를 외치는 구호들이 있다.
그런데 이 중 어디에 물신적인 이해관계가 있는가? 세번째 견해는 그에 앞선 대의에 따라 달라질 것이므로 논외로 하자. 첫번째 반응은 그 자체로는 정체에 대한 내용일 뿐이다. 만약에 여기에 물신적 논리가 숨어있다는 식으로 확대해석 한다면, 상술한 아널드의 정치적 제안들도 전부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두번째 역시 그 자체로는 '프로테스탄트의 가톨릭에 대한 우월성' 같은 담론에 집착하는 근본주의적 모습만을 보여줄 뿐이다. 이는 물신성보다는 차라리 종교적인 광신성을 띤다.)
이어서 비국교도들이 구사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나의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니라"라는 구절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다. 당대 비국교도들은 그 구절을 이용해서 '국가 자체에 봉사하도록 만들어진 국교도는 부정한 것'이라는 논변을 주로 내세웠던 모양이다. 아널드는 이에 대해 '그렇다면 비국교도들의 연합인 해방협회와 같은 단체들도 모두 부정한 게 아니냐'고 말한다(이 부분도 무리한 환원이 엿보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발언은 차치하고, 국교회와 해방협회는 서로 동일시 될 수 없다. 국교회는 엄연히 국가의 배타적인 지원을 받는, 그 자체로 중앙 정치와 연결된 집단이다—여기서 배타적이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다른 교회들과 다르게 국가로부터 특혜를 받고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그러나 해방협회는 어떤가? 그것은 단순히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는 국교회 종파들끼리 도모한 연대일 뿐이다. 설령 정치적인 단체라고 한들, 현실에 존재하는 왕정과 담합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 아닌 나라'에 충성하는 내재적 모순이 없다. 반면 그들 입장에서 옳든 그르든—나는 그리스도 교도가 아니다. 교리의 옳고 그름은 관계 없다. 다만 이 시절은 물론이고 현재까지도 영국 국교회가 지도층 전반과 연관이 없지 않다는 것만은 안다.—국교회는 이러한 모순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비국교도들이 예수를 들먹인 것도 결국 이러한 이유에서일텐데, 그는 이에 대해 성서 비평 같은 소리로만 대답한다. 예수의 진의가 무엇이었든—물론 아널드의 해석이 그가 말하는 것처럼 확실하다고는 자신할 수 없다. 그는 예수가 아니기 때문이다.—두 가지 상이한 대상의 무리한 동일시를 적확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이어지는 그의 예배에 대한 생각은 아마도 그리스도교적이지 않을 수도 있을 듯하다. 그는 주베르의 『명상록』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배를 인상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공공성, 외적인 현시, 음향, 장엄함, 우리의 외적•내적 삶 모든 세목을 빠짐없이 나타나게 하는 식전"이라고 말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예배는 공적이며, 국가적인 교회의 사안이라고 주장한다. 이후의 발언들은 내 생각에 충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공적이고 국가적인 설비에 크게 미흡한 수많은 사립 또는 개인의 종교적 예배소들을 곧장 마주치게 되면, 종교를 영혼을 설득하는 힘으로 만들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 완전히 무위로 돌아갔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곳에서 대체 어떤 설득이 가능하겠는가?"
나로서는 이 발언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할 말인지 모르겠다. 겉보기에 웅장하고 장엄한 장소가 아니면 예배의 설득력이 반감된다니, 이보다 (실제 사전적 의미에서) '속물'에 가까운 발언이 또 있을까?
그가 두번째로 논하는 개혁은 무유언 부동산 유산 법안 개정의 문제다. 이 법안은 종래까지 해악을 유발하던 장자 상속 관행을 시정하기 위해 제시되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개인 재산의 자의적인 처분이 자연법적 권리라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아널드가 문제 삼으려는 것도 이 지점에 있다. 그는 권리라는 것이 실상 고정관념일 수 있다고 운을 뗀다. 다시 말해 의무가 상호적이기 때문에 권리라는 개념이 생겨난다는 논변인데, 사실 그렇게 엄밀하지는 않다. 대표적인 자연권 중 하나인 자기보존권이 그런 식으로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타인을 의도적으로 위험에 처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가 이 권리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보존권을 너무 협소하게 해석한 것이다. 자기보존을 추구할 권리 역시 자기보존권에 포함된다. 즉,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 뿐만 아니라, 식량을 획득하거나 치료를 받거나 할 수 있는 권리도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타인에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반드시 식량이나 치료를 제공해야만 한다는 의무가 존재하는가? 그것은 조건 여하—대표적으로는 급부의 제공이 있다—에 달린 일이므로 의무가 아니다. 따라서 권리의 진짜 정체가 모두 의무라는 단순한 환원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자식들 모두에게 재산을 동등한 몫으로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책무가 없으니, 그런 권리도 없다."라는 그의 귀결은 틀린 셈이 된다(물론 그가 그 논변을 통해 궁극적으로 조명하려는 재분배나 재정 정책의 여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나 또한 일부 근본적인 권리들을 무시하지 않는 선에서는, 구성원 일반의 복리가 우선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대목의 논변은 틀렸기에, 그걸 가지고는 자유로운 재산 처분의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세번째로 논하는 쟁점은 "부인이 작고한 뒤에 처제였던 사람과 이어서 혼인하는 것이 합법화 되어야 하는가?"이다. 아널드는 이 대목에서 당대의 자유주의 개혁가들과 성경에 대한 인용을 폭넓게 펼치면서 쟁론하고 있다. 하지만 난 이 부분은 자세히 논할 생각이 없다. 상기한 대로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라서 애초에 같은 반석에 서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형태의 결혼이 금지 되어있는 것은 내재적 규범과 큰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것은 법리적•사실적인 측면에서 상속, 친권, 후견과 같은 가족관계에 혼선이나 쟁점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금지된 것이다. 단순히 '사회상규가 허락하지 않아서'가 원인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내재적 규범의 측면에서 따진다면, 이 사안이 금지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물론 두 사람이 모두 동의했을 때에 한정된 이야기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살펴보는 쟁점은 자유무역이다. 그는 당대의 자유무역 흐름이 그저 기계적인 물물교환일 뿐이며, 거기에는 속물적인 의미만 있다는 독설을 날린다. 나로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사실 할 말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왜냐하면 첫번째 논고에서부터 아널드가 언급해온 '기계 장치'와 '속물' 담론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앞서 재화를 획득하려는 것 자체가 기계 장치의 추종은 아니라고, 그리고 개혁가들의 궁극적인 이상에는 만인의 행복도 있었다고 계속해서 이야기 해왔다. 그 모든 논변을 다시 한 번 반복하기에는 이제 너무 지겨워졌다.
다만 인구와 식량에 관한 부분은 조금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그는 이 부분에서 흡사 멜서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구를 증진시키고, 이를 통해 생산력을 증강하여 궁극적으로 국부를 탄탄하게 만들어봐야, 결국 식료품 가격은 하락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무작정 인구를 수단으로만 보고 속물처럼 늘리는 것은 오히려 구성원의 복리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 아널드가 지적한 것들 대부분은 항상 의도적으로만 이루어지는 단일 현상들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꼭 국가에서 생산력 증대를 위해 인구 충원을 운운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명시적으로 의도하지 않더라도, 생산력이 증대되면 인구는 늘어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즉, 아널드의 추측과 다르게 인과관계는 반대일 수 있다.
물론 식량 문제야 합성 비료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해결될 수 없었으므로 납득을 못할 것은 아니다(실은 이미 산업혁명을 통한 기술 발전으로 어느 정도 이전 시대보다는 생산량이 늘어난 상태이긴 했다. 그래도 식량의 경우 공산품들 만한 증가는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무역의 효용이 없지는 않다. 결국 자유무역으로 각종 공산품이나 필수 품목들의 가격이 하락한다면, 식량을 구매하는 데에 쓸 여유 자산이 늘어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구성원 일반의 총 생활비는 절감되면서도 실제 효용은 증가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공동체의 관점에서도 유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이 시기에 자유무역을 추구하던 개혁파들 대다수는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을 논거로 했기 때문에, 의도 자체도 공익을 위하지 않았다고는 보기 어렵다('비교우위론'에서는, 각 경제 주체들이 서로 다른 재화를 '특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상호 거래가 이루어질 때 모든 주체가 이득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특화란 상대적으로 기회비용 측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산업을 중심 육성한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한 국가가 아무런 원천 자원이 없고 지극히 가난한 상태에 있다고 가정하자. 아마도 그들은 원자재를 수입하여 이를 가공하는 산업을 특화할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비교우위는 제조업에서의 인건비인 것이다. 더 저렴한 비용으로 가공되었기 때문에 해당 상품은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무역 상대국의 딜러들은 이를 수입할 것이다.
또한 이렇게 생산된 수익이 국내에서 다시 소비·투자·임금 지급 등에 사용되어 다른 산업과 가계에 혜택을 주기도 한다. 어떤 주체가 이득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꼭 다른 주체가 무한히 가난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 셈이다.—지난번에 작성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감상문에서 비교우위론을 언급했던 부분을 그대로 가져왔다—)
이러한 원리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무역을 단순히 '일반적 복리와는 무관한 물물교환'으로만 취급하는 것은 편협한 시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이미 이 책이 쓰이기 수십년 전에 리카도가 남긴 이론에 기반한 설명이고, 밀과 같은 동시대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따라서 시대의 한계가 아니라, 그의 당대 학문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됐다고 간주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