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세상에 널리고 널린 일개 아무개의 견해가 진지하게 궁금한 사람은 없을테지만, 나도 하루키 꽤 읽고 좋아했는데 그 문학성에 대해 논하는 글을 보니까 한 숟갈 얹고 싶어서 급하게 적어봄.



하루키를 처음 접한 건 스물~ 스물 하나 언저리에 <노르웨이의 숲>을 읽은 것으로, 고딩 때까지는 그냥 겉핥기로 책 좀 읽으면서 나 좀 멋있을지도, 이런 생각정도 했었음. 놀숲 읽으면서 문학의 맛이 이런걸까 느꼈고 그 이후로 이런저런 책들을 찾아 읽게 됨. 그리고 십년 가까이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여러 작가들과 하루키의 다른 작품들을 다수 거치게 되고, 같은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평가들을 보면서 문학성이란 무엇일까 생각도 하게 됐음.


개인적인 정의(솔직히 말하면 일반적인 정의의 문학성이란 게 뭔지도 모름)로 문학성은 독자가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함. 일상에서 벗어난(자기 자신을 벗어난) 스스로의 질문에 스스로가 대답하면서 독자는 자기 자신을 확장할 기회를 얻게 됨. 이게 내가 생각하는 문학성과 그 가치인데 나라는 독자에게 문학성이 소설의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 되어주진 못했음. 내가 느끼기에 문학성과 함께 독서를 이끄는 쌍두마차는 재미(흔히들 도파민이라 부르는 그것-엄밀히 말하면 예상을 그럴듯하게 빗겨나가는 전개)이기 때문.


하루키 소설들은 그 둘이 밸런스있게 잘 잡힌 경우임. 한쪽만 엄격하게 따지면 훨 나은 소설들 이름 많이 나옴. 근데 그 밸런스라는 게 참 잘 맞아 떨어져서 너무 부드럽게 읽힘. 그래서 독서경력 별로 안되는 사람에게 권하기도 괜찮음. 문학이란 대륙의 항구같은 느낌으로다가. 다만 꾸준히 읽다보면 결점이 뚜렷함. 왜냐면 대다수의 서사의 구조가 너무 비슷해서. 다양한 질문을 던질 수가 없음.


하루키 스스로도 어설프다 평하는 초기작을 제외하고 진지한 하루키의 소설은 대부분이 같은 구조를 반복함.


주인공을 비롯한 대다수의 인물들이 상실(과 그에 따른 고독)을 겪음.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는 그것을 치유받지 못함. 여기서 하루키는 초월적인 시공을 만들어서(어릴 때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노는 것과 비슷함) 그곳에서 잃어버린 A를 다시 찾을 수 있게 함. 이 세계는 상실과 상처가 없는 세계이고 그러기 위해서 그곳은 닫힌 세계, 즉 일종의 자폐적 공간일 수 밖에 없음. 이곳에서는 상실을 겪은 주인공이 비로소 치유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님. 그 이유는 각자 다르지만 결국 주인공들은 다시 현실로 돌아가게 됨. 다만, 그 과정에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던가 함.


하루키가 용두사미 스토리로 까이는 이유는 보통 상실을 극복하게 위해 불러낸 초현실적 요소를 벗어나 주인공이 우리가 발 딛는 현실로 돌려놓는 과정에서 그럴듯하게 연결(또는 극복)해내지 못 하기 때문인듯함. 개인적인 하루키 문학의 저평가 지점은 그 구조와 반복이 주요한듯. 이러한 서사가 가장 그럴듯하게 이어지는 게 <해변의 카프카> 정도라고 생각 (2부의 진짜 뜬금없는 철학과 여대생 매춘부 섹스판타지는 기가 찰 노릇이지만) 



애초에 하루키가 직접 최근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후기에서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작가들은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통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가는 것 뿐'라는 보르헤스의 말을 직접 인용하면서 이미 밝힌 바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하루키는 루틴으로 정형화된 하루를 살아가기 때문에 더 고정되어 가는 게 아닐까 하는 쌉뇌피셜도 한 숟갈 얹어봄.


이쯤되면 하루키는 자기 소설처럼 진짜 찐사랑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서 그 상실을 지금껏 곱씹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하루키~ 한 때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였던 적도 있고, 문학에 흥미를 붙이게 해줘서 늘 감사한 마음이지만 다음 작품이 나와도 그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뭔가를 가져오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함. 그래도... 다들 하루키 사랑하시죠?


그럼 이만 줄이기로 하고 뭣한 결론도 없는 중구난방 잡소리 여기까지 들어줘서 고마워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