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본인은 아직 독린이임을 밝히며 이 글은 그저 본인의 개인적 사견임을 밝힌다. 일반적 비난이나 비방이 아닌 비판은 적극 원하며 또한 수용 할 것이다.
본인은 지금 껏 시대를 관통한 대표적 일본 문학가의 작품을 읽어왔다.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작 인간실격,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들(작가)은 각각 다이쇼 시대와 쇼와 시대, 헤이세이 시대를 대표한다. -물론 시대 구분이 완벽히 맞지는 않다.-
여기서 도련님은 1회독, 인간실격은 2회독, 노르웨이의 숲은 2회독이다. - 이는 본인의 독서량을 강조한것이 아닌 신뢰성을 얻기 위함이나 도련님은 나쓰메 소세키의 초기 작품이며 1회독을 했다는 점에서 신뢰성이 떨어짐은 어쩔 수 없다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내가 이렇게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단 하나의 대담때문이었다.
바로 위의 대담이다.
뭐 위의 대담이면 길게 얘기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박경리 선생님의 말에 오가와 선생님께서 한 것 처럼 적극 동의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야만이며 갸냘픈 로맨티시즘의 나라라는 것이다.
이는 충분히 반박의 소지가 있으나 본인은 거시적 관점에서 보자면 들어 맞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먼저 첫번째 예시로는 인간실격의 오오바 요조를 들 수 있다.
오오바 요조는 결국 사람을 이해치 못한다.
이는 현대인의 고독함을 나타냄이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얼추 들어 맞는 얘기이다.
다만 일본의 가는 로맨티시즘과 야만을 더 이해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오오바 요조는 창부에게서 인간을 찬양한다. -어쩌면 그 이상의 것을-
이는 과잉해석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랑이 아닌 정사를 원함으로써 인간이란 것을 잘못 이해한다고 느꼈다.
인간은 본능에게 구속당한 존재이지만 그 구속을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다.
하지만 오오바 요조는 되레 본능에 순종함으로서 본능의 길 즉 야만에 빠지게 된다. -이 주장은 사견이기에 경도된 감이 있다.-
그렇게 오오바 요조는 야만에 들어선 죄(표현이 웃기긴하나 적절한 표현이 없다.)로 자기 파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가는 로맨티시즘의 한계이다.
관념의 늪에 빠져 관념에 집착하다가 결국 파괴로 이어진것이다.
두번째로 노르웨이의 숲의 수 많은 자살한 등장인물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오코의 입을 빌려 (정확히는 나오코가 자신의 언니 이야기를 하면서) 무언가 깨닫게 되면서 자살하게 된다고 한다고 말한다. -본인의 해석이 잘못된 감이 있다.-
하지만 이는 가는 로맨티시즘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자살은 수동적 허무주의의 끝이다. -그렇다고 자살을 완전 부정하는것은 아니다.-
나오코의 예를 들자면 나오코는 인생의 한부분(절대적 존재, 소설에서는 기즈키로 나온다.)의 부재로 인해 극도의 허무함에 빠지며 자살로 이어지게 된다.
이게 왜 가는 로맨티시즘의 한계인지 잘 모를 수 있다. -본인도 해석하는데 애먹었던 부분이다.-
이게 왜 가는 로맨티시즘의 한계이냐면 기즈키를 인생의 한부분으로 상정하며 자신의 인생지분을 로맨티시즘을 헌신한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로 인한 대가는 컸다.
진정한 로맨티시즘은 자기애를 기반으로 타인에게 베푸는것이다. -사견이다.-
하지만 공허한 로맨티시즘은 자신을 내어 버린다.
이는 곳 사랑을 시험하기 위한 정사로 이어질 뿐이다.
그렇게 일본 문학 더 나아가 일본은 성찰 없는 2500년을 보내 온것이다.
본인의 알맹이도 없고 근거 없는 주장을 읽어 주었든 안 읽어 주었든 감사한 바이다.
이후에는 좀 더 제대로 된 공부를 한뒤 찾아뵙겠다.
아 그리고 사족으로 본인은 관념문학과 일본문학을 좋아한다.
3줄 요악
일본은 야만과 가는 로맨티시즘이다.
오오바 요조는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야만에 치닫는다.
나오코는 진정한 사랑을 이해하지 못함, 즉 가는 로맨티시즘의 대가, 자살을 선택한다.
본인은 지금 껏 시대를 관통한 대표적 일본 문학가의 작품을 읽어왔다.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다자이 오사무의 대표작 인간실격,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들(작가)은 각각 다이쇼 시대와 쇼와 시대, 헤이세이 시대를 대표한다. -물론 시대 구분이 완벽히 맞지는 않다.-
여기서 도련님은 1회독, 인간실격은 2회독, 노르웨이의 숲은 2회독이다. - 이는 본인의 독서량을 강조한것이 아닌 신뢰성을 얻기 위함이나 도련님은 나쓰메 소세키의 초기 작품이며 1회독을 했다는 점에서 신뢰성이 떨어짐은 어쩔 수 없다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내가 이렇게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단 하나의 대담때문이었다.
바로 위의 대담이다.
뭐 위의 대담이면 길게 얘기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박경리 선생님의 말에 오가와 선생님께서 한 것 처럼 적극 동의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야만이며 갸냘픈 로맨티시즘의 나라라는 것이다.
이는 충분히 반박의 소지가 있으나 본인은 거시적 관점에서 보자면 들어 맞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먼저 첫번째 예시로는 인간실격의 오오바 요조를 들 수 있다.
오오바 요조는 결국 사람을 이해치 못한다.
이는 현대인의 고독함을 나타냄이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얼추 들어 맞는 얘기이다.
다만 일본의 가는 로맨티시즘과 야만을 더 이해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오오바 요조는 창부에게서 인간을 찬양한다. -어쩌면 그 이상의 것을-
이는 과잉해석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랑이 아닌 정사를 원함으로써 인간이란 것을 잘못 이해한다고 느꼈다.
인간은 본능에게 구속당한 존재이지만 그 구속을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다.
하지만 오오바 요조는 되레 본능에 순종함으로서 본능의 길 즉 야만에 빠지게 된다. -이 주장은 사견이기에 경도된 감이 있다.-
그렇게 오오바 요조는 야만에 들어선 죄(표현이 웃기긴하나 적절한 표현이 없다.)로 자기 파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가는 로맨티시즘의 한계이다.
관념의 늪에 빠져 관념에 집착하다가 결국 파괴로 이어진것이다.
두번째로 노르웨이의 숲의 수 많은 자살한 등장인물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오코의 입을 빌려 (정확히는 나오코가 자신의 언니 이야기를 하면서) 무언가 깨닫게 되면서 자살하게 된다고 한다고 말한다. -본인의 해석이 잘못된 감이 있다.-
하지만 이는 가는 로맨티시즘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자살은 수동적 허무주의의 끝이다. -그렇다고 자살을 완전 부정하는것은 아니다.-
나오코의 예를 들자면 나오코는 인생의 한부분(절대적 존재, 소설에서는 기즈키로 나온다.)의 부재로 인해 극도의 허무함에 빠지며 자살로 이어지게 된다.
이게 왜 가는 로맨티시즘의 한계인지 잘 모를 수 있다. -본인도 해석하는데 애먹었던 부분이다.-
이게 왜 가는 로맨티시즘의 한계이냐면 기즈키를 인생의 한부분으로 상정하며 자신의 인생지분을 로맨티시즘을 헌신한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로 인한 대가는 컸다.
진정한 로맨티시즘은 자기애를 기반으로 타인에게 베푸는것이다. -사견이다.-
하지만 공허한 로맨티시즘은 자신을 내어 버린다.
이는 곳 사랑을 시험하기 위한 정사로 이어질 뿐이다.
그렇게 일본 문학 더 나아가 일본은 성찰 없는 2500년을 보내 온것이다.
본인의 알맹이도 없고 근거 없는 주장을 읽어 주었든 안 읽어 주었든 감사한 바이다.
이후에는 좀 더 제대로 된 공부를 한뒤 찾아뵙겠다.
아 그리고 사족으로 본인은 관념문학과 일본문학을 좋아한다.
3줄 요악
일본은 야만과 가는 로맨티시즘이다.
오오바 요조는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야만에 치닫는다.
나오코는 진정한 사랑을 이해하지 못함, 즉 가는 로맨티시즘의 대가, 자살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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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무지다. 더욱 가르침을 주기를 바란다.
열등감이 있으면 상대를 긍정하고 그걸 넘어설 생각을 해야 하는데 무조건 남을 부정하면 자기가 높아지는양 착각하고 있으니...
본인이 열등감이 있으며 부정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내가 높아지는 양 착각한 것은 아니다. 본인의 첫 평이라 그런지 냉정치 못한 감은 있으나 높아지고 싶다는 주제 넘은 소리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선생님께서 보기엔 본인이 부족한 점이 많아 보일 것이다. 그러니 가르침을 더욱 주기를 바란다.
아니 너 말고 경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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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말이다. 다만 본인은 저 세권에서 얻은 본인의 느낌을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속보) 스웨덴 한림원 이에 수긍하여 야만국의 문학상 수상내역 회수 후 사과...이청준 김승옥 이문열에게 재수상할 예정
본인이 일본문학 근간을 의심한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일본문학을 낮게 본다거나 한국문학을 높이 사는것도 아니다. 일본문학에게서는 배울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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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무지이다. 본인의 사견이 문제일 수도 있겠다.
박경리가 저런말한줄은 첨알았네
ㄹㅇ 독린이인데 말투는 왜이리 위엄넘치노
본인의 작문 습관이다.
1) 인간이 본능의 구속을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다라는 계몽주의적 단언은 인간 혹은 인간성에 대한 편견이 아닐지? 2) 낭만주의가 언제부터 자기애를 바탕에 두어 타인에게 베푸는 이타주의가 되었는지? 워즈워스 빼고 다 요절한 영국 낭만주의 시인들과 후에 반도덕적인 것에 빠져들어 40대를 넘긴 작가가 없는 영국 유미주의/데카당스 문학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으련지? 글은 꽤 인상적이었는데 일본 문학과 낭만주의, 야만을 억지로 단정짓고 연결한 느낌이 없잖아 있음 - dc App
본인의 무지를 지적한 것은 무척이나 감사하다. 본인의 부족한 필력과 지식이 탈로난 것 같다. 실은 본인도 인상을 받아 글을 쓰기는 했으나 실질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근거와 내용이 빈약해 애를 먹었다. 다시금 좋은 지적 감사하다.
탄로
자기 몇 학년이얌? 책 좀 더 많이 읽으셈
맞는 말이다. 본인의 지적 수준이 탄로난 것 같다.
개인적으로 박경리의 평은 공감하는 편. 다만 일본의 그 가냘픈 로맨티시즘이라는 것도 일본 문화의 독특한 미의식이고, 그것이 꼭 가벼운 것만도 아니라고 생각함. 박경리의 비판은 일본 문화를 꽤나 이해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이걸 일본인 학자가 동의했다는 건 그 역시 맥락을 정확히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봄. - dc App
맞는 말이다. 본인의 부족한 지식으로 덤비려 했다가 지적 수준이 탄로난 것 같아 부끄럽다.
야만, 폭력, 섹스, 자살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묘사하는 게 일본 문화의 문제점일 수는 있다. 근데 그걸 보고 공감한다는 건 우리도 인간적으로 그들의 미의식을 이해 못할 게 아니라는 거지. 허무, 상실감, 장렬한 죽음의 (당사자에게만) 무거움과 (세상에는 좆도 아닌) 가벼움이 공존하는 데서 느껴지는 서글픔과 아름다움을 우리는 같이 느끼니까. - dc App
너 말에 동감. 가날픈 로맨티시즘이란 말과 일본 문학의 로맨티시즘은 (내용, 주제, 형식 면이) 빈약하다, 가볍다란 말은 언뜻 보기엔 유사한 말 같아도 속에 품고있는 의미는 꽤 다른 것 같음.. - dc App
근데 독린이가 크면 뭐가되는거? 독붕? 독침붕?
박경리 토지보면 저 내용 상세히 다룸. 예전에 이거 주제로 글 쓴거 있는데 나중에 요약해서 올리겠음 ㅇㅇ.
일본을 긍정적으로 보려면 반드시 실패한다는 주장은 아주 사적인, 감정 가득한 주장에 불과. 그러면 이어지는 본질적인 야만, 선이 가는 센티멘털리즘 역시 어느정도 걸러서 받아들여야 함. 민족주의가 없고, 야만국에 불과하다고 열변할수록 굉장히 감정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인상만 강해질 뿐임. 본문은 이 주장에 의거해서 어느정도 재단비평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처럼 보임. 인용한 두 작가는 분명 일본문학의 거두로 보이는데, 그러면 그 작가들은 '일본적'인가? 인용한 작품들은 '일본적'인가? 정말 저 두 작품으로 일본을 설명하기에 충분한가? 졸렬하게 두 작품이 아니라 영역을 더 확대해서 접근해보자. 작가 몇 명을 데려와서 "일본은 성찰 없는 2500년을 보내온 것이다" 라고 결론낼 수 있는가? 황당할 따름.
토지 5부에 등장하는 이홍의 장녀 상의 에피소드가 작가 자전적 에피소드자나. 그거 보면 가뜩이나 남들보다도 훨씬 내성적이고 감수성 예민한 소녀가 일본 군국주의 시절을 거치며 얼마나 상처를 많이 받는지 나오지. 박경리 선생은 그 시절 입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평생 극복하지 못했던 것 같음. 굉장한 명편인 1, 2부와 그보다는 좀 떨어지지만 역시 뛰어난 3부를 거쳐 작가가 실제로 살았던 시대로 접어든 4부부터 이상하게 내용 전개가 감정적으로 바뀌는 게 그때문인 거 같음. 도저히 객관적으로는 그 시절을 증언할 수 없었던, 지극히 인간적인 변모라고 나는 받아들였음. 실제로 그만큼 광기의 시대이기도 했고
이건 좀 인정인게 토지는 4,5부 들어와서 몰입도가 떨어짐. 특히 상의 여고 다니는 에피소드는 유별나게 재미없는 에피 중 하나인듯.
그런데 또 해방되자마자 전쟁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었으니... 자기는 행복했다면 절대로 문학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작가의 말은 진심일 거라 생각함. 정말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인 엄청난 사건들을 서른 살도 되기 전에 모두 겪어냈으니. 얼마나 괴로웠으면 스물 아홉 살 이전에는 일본어로만 글을 썼고 한국어로는 글을 써 본 적도 없었다는 작가가 피를 머금고 그런 대단한 작품들을 써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