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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뭔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 기억력의 문제이기도 하나, 카프카 본연의 문제일 것이다. 비교적 "변신"처럼 명료한 이야기도 있는 한편, 이런 모호한 이야기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파악하기엔 내 식견이 부족한 것 같다. 또한 앞서 말한 기억력의 문제로 주인공의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점을 유의하고 보길 바란다.
우선 사건은 3인칭으로 진행된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봐도 무방하나 의문들이 있다. 아버지와 주인공의 갈등 속에서 서로 모순이 생긴다는 것이다. 물론, 아버지의 정신 상태가 비이성적인 것임은 틀림이 없으나, 그게 꼭 거짓이라 볼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만약을 가정한다. 스스로를 3인칭으로 부르는 1인칭 시점이었다면? 그렇게 된다면 아버지의 말들에 정당성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라면 그저 아버지가 미친 것일 뿐이다. 전자로 가정하면 이것은 일종의 꿈 같은 것으로 보인다(꿈에서는 스스로를 다른 타자로 보는 게 가능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화자는 주인공의 무의식이었던 것인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이 둘을 잇는 것은 친구일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존재다. 우선 전자의 얘기부터 하자(어머니에 관해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소설은 주인공이 친구한테 전할 편지를 중심으로 시작이 전개된다. 그는 자신의 친구에게 보내지 않는 까닭으로 이리 말한다. 친구를 위한 배려라고. 그리고 그 이유를 열거하기 시작한다(이것이 주인공의 독백임을 기억해라.). 그는 자신의 약혼녀에게도 이를 전한다. 하지만 어느새 마음이 바뀌어 그것을 전하려 아버지와 상담을 하려 한다. 그는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에게 동정심을 느끼기도 한다. 그가 상담을 하려 하나 실패하고, 아버지를 옮겨 침대에 뉘일 때, 마침내 아버지는 열분을 토한다. 나는 아쉽게도 이 대화의 상세한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 기억으로 더듬어 보면 그것은 아버지가 주인공에게 하는 모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이렇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깔본다고. 친구도 자신을 통해 주인공이 이뤄낸 성과를 이미 안다고. 그렇기에 자신의 편지를 보지, 주인공의 편지는 보지도 않는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호의는 주변인들에게는 일종의 기만으로 보였던 것 아닌가? 주인공은 자신의 친구와 아버지를 동정했다. 하지만 동정이란 것도 일종의 멸시가 아니던가? 주인공이 죽음을 택할 때도 자신은 아버지를 사랑했다는 걸 봐서는 그것이 의도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이뤄진 것이 아니던가? 설령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서, 상대가 후에 알 가능성도 있는 것 아니던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가 자신의 백성들을 동정했다고 해서 그것이 모욕이던가? 그것은 사랑이 아니던가? 동정과 멸시는 절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왜 그리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가? 친구의 불행에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그들에게(적어도 그의 아버지에게는) 그것을 모욕이라 여기지 않았던가? 이는 그들이 가상의 계급을 부여했기 때문이 아니던가? 만약 주인공이 가난했더라도 그들이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까? 내 생각에는 오히려 그들은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했기에 그들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깔본다는 말로 주인공을 모욕하려 했던 거였지만 오히려 자신의 시선을 보인 것이다.
이게 맞는 해석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엉뚱한 해석일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이것을 해석한다 하는 것이 우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자기 전 보았던 선고의 개인적인 감상이란 점은 안다. 물론, 기억이 맞는지는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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