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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다른 것들에 주의가 분산되지 않고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어릴 때 학교에서부터 이후 직장에서까지 늘 듣게 되는 이 말은 무슨 강령이라기보다는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는 현실적 조언 및 규율에 가깝다. 우리는 텔레비전, 광고, 영화, 게임, SNS 등 다양한 관심 경제 상품에 익숙하며, 어릴 때부터 그런 상품1)에 너무 과하게 몰입하지 않도록 훈련받는다. 이를 실패하는 사람은 정도에 따라 ADD(주의력 결핍 장애) 및 ADHD 진단을 받고 이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추천받는데, 아동기에 흔히 발견되는 ADD/ADHD에 비해 성인기의 후천적 ADD/ADHD는 어떤 생리적 질병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업무 역량/성취의 부진함에 대한 사후설명과 함께하곤 한다. 이렇게 보면 주의력 분산을 의도하는 관심 상품은 다른 상품처럼 주변을 맴돌며 모기처럼 자본을 빨아먹는 존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지각의 정지>는 그 관점이 호도된 것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벤야민을 위시한 문화 비판에서 흔히 이야기하듯 현대 사회가 사람들의 주의를 흩뜨려놓고자 한다는 주장에는, 애초에 그 주의attention가 19세기에 새롭게 창출된 것이라는 맥락이 빠져 있다. 주의의 형성은 관심 경제의 발전2)과 발을 맞췄다. 그리고 그 뒤에는 19세기 초반에 발견된, 무시할 수 없는 생물학적 지식이 있었다.



칸트의 시대까지만 해도 주의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의 의식은 그저 수동적인 관찰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경험을 체험하는 존재에 가까웠고, 이 경험이 어떠한 것인가를 논하는 것만이 중요했다. 이 당시 시각과 의식에 대한 중심 모델은 카메라 옵스큐라, 곧 세상의 상이 빛을 따라 그대로 맺히고 이 상을 최대한 온전하게 관찰할 수 있는 능력에 기반했다. 그러나 생리학적 지식은 우리가 막연히 감각이 왜곡될 수 있다고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감각이 못 믿을만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전해주었다. 암흑 속에서 색깔이 구분되지 않듯 시각 현상이 거짓될 수 있다는 소박한 주장은 시각의 체계적인 왜곡, 뚜렷한 초점과 흐릿한 주변부, 눈 속의 혈관과 부유물이 형성하는 비문 등 시각 현상이 우리의 의식에서 체계적으로 숨기는 노이즈를 우리가 어떻게 무시할 수 있냐는 더욱 강력한 주장으로 대체되었다. 이를 강박적으로 분명하게 측정할 수도 있었지만, 누구나 조금의 '주의'만 기울이면 실제로 시각이 이러한 현상을 우리 의식에서 최대한 숨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주의 없이 다시 그 모든 왜곡 현상은 의식에서 사라지며 일상적인 시각이 그렇듯 깔끔하고 분명한 시각이 다시 돌아왔다.



서서히, 감각은 수동적인 경험이 아닌 주도적인 체계화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한다. 시각을 포함한 온갖 감각은 주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자극을 능숙하게 정돈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로 만들되, 그 형태에서 벗어나는 모든 자극을 의식조차 할 수 없도록 무시한다. 쇼펜하우어나 니체 같은 사상가에게뿐 아니라 윌리엄 제임스, 헤르만 폰 헬름홀츠 같은 심리학자에게 있어 의식보다 앞선 주의가 중요해졌는데, 우리는 생물적/사회적 조건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자극에 선택적 주의를 기울이며, 이 선택적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상태야말로 의식을 흩뜨려놓고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범이었던 것이다. <지각의>는 이러한 "주의의 계보학" 맥락 속에서 세 모더니즘 화가, 마네, 쇠라, 세잔을 분석하는데, 주의 없이 그림에 몰입하는 수동적 '관조'3)라는 문제적인 미학 개념이 이 계보학 속에서 도저히 자리잡을 수 없다는 입장에서 이 세 화가가 어떻게 주의에 대한 당대의 맥락에서 자기 나름대로 시각과 주의에 대한 생각을 펼쳐보였는가를 보이는 것이다.



이 세 화가는 분명하게 주의의 형성 및 분산에 대해 의식하고 있었다. 마네의 <온실에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아무렇게나 어지럽혀지고 흩어지는 감각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그 스스로의 의식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지를 다룬다. 쇠라의 점묘화와 <서커스 선전 공연>은 어디까지나 관찰자가 스스로의 위치를 조정해 주의를 기울여야 상이 이루어지는 그림 속에서 당대 원시-영화가 어떻게 탈신비화된 스펙터클을 다루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세잔의 <생빅투아르산> 같은 후기작은 관조와 표상의 신화가 완전히 무너져, 관찰에 집중할수록 오히려 상이 뚜렷해지기보다는 불분명해지며 과거의 인상이 현재의 관찰에-베르그송의 맥락에서-침투해 들어오는 현상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세 화가의 그림을 단순히 환원한다기보다는, 19세기 지각의 담론장에 세 화가가 분명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깊게 관여해 있었고 각각의 그림이 담론장의 좋은 예화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은 제각기 다양한 방식의 스펙터클이 사람들의 주의를 창출하고, 잡아끄는 것을 보며 회화에서 그 효과를 재현하거나 최소한 이를 무시하지 않고자 했다.



덕분에 <지각의>에서 보여주는 미술 비평은 저자의 의도보다 더 기술적인 비평에 가까운 함의를 갖는 듯하다. 각 그림의 분산된 시선과 무너진 원근감, 존재를 감춘 소실점 등 시각성에 주목하는 비평은 그와 동시에 어떻게 각 회화가 미묘하게 분산되고 산만해진 자극을 다루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쇠라의 점묘화 기법에 대한 비평은 기실 종교화를 재현하고자 하는 원시적인 컴퓨터 비전을 다루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사실 쇠라의 의도 자체가 색채의 혼합 대신 이 픽셀의 미묘한 대비를 다루고자 했던 걸 생각하면, 고전적인 화풍과의 연결성과는 별개로 보다 더 '현대'적인 화가라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기도 하다) 이는 의식과 시각의 절대성이 무너져내리며 어떻게 주의를 집중시켜야할지에 대한 고민에서, 어떻게 주의를 기울여도 이 감각을 완전히 통일시킬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는 불길한 깨달음까지 이어지는데,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할 수 없다는 이 감각이 니체와 이어진다. 그러나 무시해서는 안 될 점은, 이 불안은 '더 이상'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변화보다 오히려 예전까지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었던 시대에서 비로소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기술적 깨달음과 함께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욱 더 사회적으로 자신을 통제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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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많은 폐쇄병동이 그렇겠지만, 아동 주의력 장애를 관리하는 병동에 전자기기를 반입하는 것은 더더욱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지인의 말로는, 그 어떤 것에도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산만하게 분산되던 주의가 전자기기 앞에서 얼마나 질서정연하고 떼어놓을 수 없이 고착되는지를 보는 건 상당히 소름돋아 별 생각 없이 쓰던 휴대폰에 불현듯 불안감을 느끼게 해준다나. 이들이 이끌리는 건 매체의 내용이 아닌 매체 그 자체로, 하다못해 텔레비전이나 휴대폰에서 꽤나 따분하게 느껴질 만한 광고만 나오고 있어도 여기에서 시선을 조금도 떼지 않은 채 완전한 몰입 상태에 돌입한다. 이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고 있자니, 치킨 스톡처럼 현대에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고농축 조미료를 전근대 사람에게 준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진다.



2) <지각의 정지>는 어디까지나 19세기(1820년대~1900년)에 주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서적에 가깝기 때문에 이렇게 형성된 주의가 본격적으로 차출되기 시작하는 역사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그 역사는 에필로그에서 인용하는 프로이트의 편지에서 이어지는데, 여기에 관심 있다면 팀 우의 <주목하지 않을 권리>를 한번 읽어볼 만하다. 어떻게 근대 국가가 본격적으로 국민을 동원하기 위해 대중의 주의를 끌어당기고자 했는지, 이것이 어떻게 광고 및 영화에 사용되었으며 파시즘에서 꽃피웠고 이후 전후 자본주의 사회에서 활용되고 강화되었는지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책이다. 좀 더 최신으로는 다크패턴을 다루는 책(예를 들어 <다크패턴의 비밀>)이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의 <모두 거짓말을 한다>에서 설명하듯 아주 약간의 UI 변화로 무언가 사용자의 관심을 더 이끌어낼 수 있기를 바라는 수많은 미시적 시도가 꽃피는 곳이 다크패턴인지라.



3) 관조를 통해 자신 안의 표상을 보다 또렷하게 관찰할 수 있다는 칸트식 미학은 분명히 카메라 옵스큐라 모델에 가까운 것이었고, 이 모델은 실제로 그렇게 집중해본 세잔 같은 화가에 의해 완전히 무너져내린다. 무언가에 시선을 집중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것을 더 분명하고 면밀하게 보도록 만들어주기보다는 그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으로 주의를 계속 이동시키는 과정에 가깝고, 그러지 않으면 서서히 주의가 분산되거나 방금 전에 보았던 상이 현재의 상으로 서서히 삼투해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관조에 들어가는 노력의 방향성은 완전히 정반대로 돌아섰으며, 최대한 힘을 빼고 표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최대한 억제에 힘을 넣어 주의를 집중시키는 경직된 상태로의 몰입에 가깝다. 이 "억제"라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해진 것도 주의의 계보학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