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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이르러 인간관계에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아마 관계의 합리화일 것이다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사회 문화 전반에 합리적 고찰이 진행된 것처럼, 관계 역시 비슷한 변화를 겪었다. 이제 우리는 모든 관계에 이름표를 붙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름표에 관계의 목적에 대해 적기 시작할 것이다. ‘왜 우리는 만나는가? 우리가 맺는 관계의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가지고 관계를 꼼꼼히 해부해볼 것이다

목적이 분명하고 목적을 이루기 위한 효율성이 높은 관계는 좋은 관계로 평가될 것이고, 인맥은 일종의 자원으로 취급될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역사상 가장 합리적이고 성과지향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목적 없는 관계, 비효율적 관계를 용납하지 못한다

우리는 목적이 부재하는 관계, 이유 없는 관계는 폐기할 것이다. 또한 목적이 성취되는 순간, 해당 목적을 위해 맺었던 관계 역시 해체할 것이다

관계는 일종의 프로젝트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되고, 절차에 맞게 진행되며, 성과가 도출된 순간 해체된다

우리는 프로젝트의 주체이자 경영자로 화려한 경력을 쌓으며 성공을 향해 착착 나아갈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가 대두된다. 프로젝트의 궁극적 성공, 즉 성공적 관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효율 면에서 관계의 첨단을 살아가는 현대인이지만 성공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인구가 밀집된 대도시에서 주로 살아가지만 현대인은 외로움과 고독을 감기처럼 달고 다닌다

인터넷과 SNS 등을 이용해 고독감을 치료해보려 노력하지만 사태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홀로 사는 1인 가구가 늘어나고, 노인들은 고독사하며 은둔형 외톨이로 전락해 집안에 나오지 않는 사람 역시 늘어나고 있다

타인에 대해서 과도한 경계나 폭력성을 보이는 반사회적 성향 역시 과거보다 훨씬 많이 발견된다. 도대체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걸까

나는 그 원인을 관계의 합리화에서 찾고자 한다. 사실 인간이 친구를 선택하고 자유롭게 관계 맺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법적 경제적 이유 때문에 자유로운 이주가 제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곳에 살다 죽는 경우가 거의 전부였다. 이런 경우, 관계의 선택지는 매우 제한될 수밖에 없다.

주로 같은 마을에 사는 이들 외엔 사귈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한된 선택지는 한 가지 면에서는 장점을 가진다. 바로 안정적인 관계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마을에서, 동일한 구성원과 오랫동안 함께 살았다. 덕분에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가능했고, 숟가락 개수까지 알 정도로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그 결과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환경이 조성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반사회적 성향을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누구든 평생을 안락하게 살고 싶다면 억지로라도 반사회적 성향을 감추고 사람들과 어울려야만 했다.


이렇듯 전근대적 관계는 관계의 선택지가 매우 제한적이고 장기적으로 유지되다보니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왜 저 사람하고 친하게 지내느냐고 물으면 딱히 대답할 게 없는 게 전근대적 관계인 것이다

한 마을에서 비슷한 시기 태어나 같이 살다보니 친해졌을 뿐, 관계의 목적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거의 관계 그 자체가 목적인 경지, 전근대적 관계는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영위된다. 그러나 현대적 관계는 전근대적 관계와는 전혀 다르다

교통수단의 발전과 사회 환경의 변화로 자유로운 이주가 가능해졌고, 통신수단의 발달로 멀리 떨어진 사람과도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전근대 시기 인간을 속박했던 관계 선택지의 제한을 무너뜨렸다. 이제 우리는 누구와 관계 맺을지, 누구와는 더 이상 관계 맺지 않을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마치 페이스북의 친구 추가, 친구 끊기처럼. 그러나 제한성의 소멸은 곧 안정성의 소멸을 의미하기도 한다. 현대의 모든 관계는 이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성이 되었다

동시에 분명해진 목적의식은 효율적인 관계를 맺는 걸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효율적이지 않은 관계는 언제든 해체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결국 우리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으면서도, 누구와도 절교할 수 있는 사회에서 사는 셈이다.


자유로우면서도 불안정한 관계의 문화는 관계에 대한 현대인의 태도를 굉장히 모순적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관계에서 오는 구속이나 속박,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환경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다

집안에서조차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말하는 게 현대인이다. 그러나 동시에 외로움을 많이 타고, 안정적 관계를 갈구하는 성향 역시 과거보다 훨씬 강해졌다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끌려 다니거나 이별 살인처럼 관계의 해체를 극단적으로 거부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가정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집에서는 각자 방에 틀어박혀 가족과 한 마디도 안 하지만, <국제시장> 같은 영화가 아직도 잘 팔리는 게 오늘날 한국이다

그리고 재밌게도 일본 역시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가족이라는 병>은 자극적 제목을 달고 있는 책이지만, 그 내용은 사실 별 게 없다. 가족에 대한 저자의 태도 중 반복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가족은 타인들로 구성된 집단이다. 따라서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고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가족이 좋은 가족이다.’라는 식의 태도이다. 일종의 개인주의인 셈인데, 이는 현대인의 자유로운 성향을 보여준다

다른 하나는 개인주의와는 상당히 다른 태도로, 가족에게 의지하고자 하고, 가족 역시 자신에게 기대주었으면 하는 태도이다

죽은 숙모에 대한 저자의 태도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가족은 타인에 불과하다고 말하던 저자는 숙모의 죽음 앞에서 새삼 이렇게 말한다.


왜 내 주변 사람들은 내게 폐가 되고 싶지 않다면서, 말 그대로 그렇게 급하게 떠나가는 것일까.

숙모도, 좀 더 자주 찾아뵙고 싶었다. 내게 억지라도 부렸으면 싶었다. 내가 의지가 되지 않았던 걸까, 하고 자신을 책망하기도 했다. 나는 가족이라는 역할을 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일까.

가족이라는 병, 시모주 아키코(下重 暁子) , 김난주 , 살림, 2015. p157.


가족은 타인에 불과하다고 말하던 저자는 놀랍게도 타인의 죽음에 이렇게 슬퍼하고, 섭섭함을 보인다더 재밌는 것은 저자가 늙은 부모를 모시는 걸 적극 권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모의 노년을 함께하면 부모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고, 가족 간 화해를 촉진한다는 주장인데, 나로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들다

저자의 말대로 가족이 타인에 불과하다면, 요양원에 입원시킨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이 있는가

거기다 저자는 타인의 집단인 가족이 서로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세상 떠난 가족에게 쓰는 편지라는 제목이 붙은 마지막 장()이다

일제 시대 장교로 복무했던 아버지에 대해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저자는 이 부분에서 사실 아버지를 동경하고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강인하고 남자다웠던 아버지에 대한 동경과 전후 시기 몰락해버린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동정. 아버지에 대한 양가적 감정은 가족 전반에 대한 저자의 감정을 유추할 수 있게끔 한다

화목한 가정을 누구보다 갖고 싶어 했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알기에 지레 포기해버리는 나약한 마음. 더없이 약하지만 약한 모습을 인정할 수 없어 되레 강하게 말하는 태도

끝없이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모습. 글 너머에서 이러한 저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국적을 떠나서 나 역시 그녀와 크게 다를 바 없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자유롭고도 불안한 관계 속에서 살고 있기에.


제목이 상당히 자극적인데, 내용은 생각보다 그렇지 못하다

저자는 나름대로 센 발언이라고 생각하며 던진 것 같은데, 고독사와 유아살해, 이별살인이 일상이 된 한국인에겐 별로 충격적이지도 않다

, 가족에 대한 저자의 이중적 태도를 살피면서 읽으면 꽤 흥미롭다

저자가 현대인 전체를 대표하진 않지만, 저자의 태도를 통해서 현대인이 관계 속에서 앓는 질병을 조금이나마 유추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맹탕 같은 책이기에 이혼 가정이나 곡절이 많은 가정에서 지낸 독자는 시시할 수 있다. 그래서 가족에 대해 냉소적인 사람에겐 추천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화목한 가정에서 안정적으로 자란 독자가 있다면 추천하고 싶다. 가족에 대해 다르지만, 그리 독하지 않고 색다른 충고를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 문제와 관련해 이것보다 하드한 책을 읽고 싶은 독자라면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느릅나무 밑의 욕망>, 스트린드베리의 <꿈 연극> 같은 책을 추천한다

특히 <느릅나무 밑의 욕망><꿈 연극>을 추천하고 싶은데, 이 작품들은 가족 관계 역시 일종의 정치 관계이며 가정은 권력 투쟁과 경쟁의 장이라고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