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경악스럽다. 스타니스와프 렘이 최고의 SF 작가라고 늘 믿어 의심치 않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생각이 몇 번이고 든 책이다. <절대 진공>과 <상상된 위대함>은 둘 다 단편집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실존하지 않는 책들에 대한 가상의 서평을 모은 책인데, 일부 애매한 것들이 종종 있지만, 대다수는 그 상상력이 놀라울 정도다. 보르헤스가 이 '장르'를 개척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문학 쪽으로 그 방향성이 겹치는 듯하면서도 SF의 영역으로 가면 보르헤스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을 방식의 기상천외한 과학적 상상력을 펼쳐 나간다. 그래서 사실 어떤 서평은 보르헤스의 단편을 렘의 방식으로 다시 쓴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존재주식회사>는 <바빌로니아의 복권>을, <기가메시>는 <허버트 퀘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를 연상시키고, 그 외에도 보르헤스의 잔향이 강렬한 글이 많다-단지 그 정도로 축소시키지 못할 만한 글이 많다.
전반적으로, 렘의 SF에서 강한 존재감을 풍기는 인간과 과학의 하찮음이나 정보 계산이라는 큰 틀에서 바라보는 우주관이 <절대>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등장한다. <새로운 우주생성론>에서는 더 큰 틀에서의 우주적 존재자-혹은 "게임" 참여자-들이 서로 간섭할 수 없을 정도로 동떨어진 거리를 유지해 서로간의 소통 가능성을 막으며 각자 독자적인 물리 법칙을 생성해나가는 우주론을 제시하는데, 우리가 법칙을 발견하는 것은 법칙을 확정짓는 과정일지도 모른다.1) <에룬티카>에서는 지능 없는 세균이라도 군집과 유전자는 결국 인류와의 싸움에서 늘 이겨왔다는 것을 믿고, 마치 머신러닝을 하듯 세균들이 모스 부호 형태로 자라나 언어를 표현하도록 몰살시키며 기어이 미래를 예견하는 듯한 문장을 쓸 수 있는 변종 군집까지 만드는 데에 성공한다. <오류로서의 문화>에서는 우리의 생물학적 한계를 의식적으로 기만할 수 있게 해줘 "필연적"인 수명은 단지 신화 속 우연적 사건에 의한 것으로, "우연적"인 신체 형태는 신과 닮게 만들어진 필연적인 것으로 믿을 수 있게 하며 인류를 달래주던 문화를 과학의 이름으로 버릴 수 있으리라 믿는, 사이버네틱스를 알게 된 오귀스트 콩트가 할 법한 논변을 보여준다.
개중-이미 <스타니스와프 렘> 단편집으로 읽은 글을 제외하고-가장 흥미로운 두 글은 <비트 문학의 역사>와 <베스트란드 엑스텔로페디아...>인데, 각각 컴퓨터 인공지능 시대에 컴퓨터가 작성하는 비트bit 문학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격변하는 세상 속에서 불안정하게 변화하는 지식을 따라가기 위해 가능한 모든 미래 가능성을 예상해 확률적으로 변화하는 백과사전을 다루고 있다. 이 둘 글 모두 기술 격변기에 어떻게 사람의 개입이 절대적인 수준이었다가 점차 사람의 통제권이 사라지고, 기계적 지능이 구현한 것을 사람이 '따라가야' 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비트 문학은 처음에는 마치 현재의 LLM이 작성하는 글처럼 단어를 자기 나름대로 토큰화시켜 이해하기 힘든 의미와 연결된 단어를 내뱉거나, 특정 작가가 '썼을 법한 더 나은 글'을 작성하는 "호모트로피아" 단계로 시작했다. 그러나 더욱 발전한 컴퓨터는 본격적으로 사람이 이해하기 위해 컴퓨터의 계산 시간과 맞먹을 정도의 번역 시간을 따로 거쳐야 할 만한 글을 쓰기 시작하고, 인간의 수학 체계(페아노 공리계)가 세상에 대한 올바른 기술이 되지 못한다거나, 최대가 아광속 수준으로 느린 우주와 별개로 존재하는 '하나의 타키온이 모든 가능한 위치에 동시에 존재하다가 서서히 감속하며 에너지가 무한에 가까워져 그 에너지로 느린 우주 하나를 창조했다가 다시 가속하는' 빠른 우주로 구성된 테라물리학을 제시하는가 하면, 사람의 이성을 해체하며 마치 튜링 테스트를 하듯 '사람이 생각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며 무한한 정보로 구성된, 컴퓨터와 닮은 신을 상정하는 자체적인 신학을 구축해 나간다.
<베스트란드>는 몇 십 년 뒤의 미래 세계의 가능성을 최대한 다양하고 정확하게 점쳐 나가며 실시간으로 가능성을 동기화해 미래의 언어와 개념을 설명해주는 백과사전을 설명한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미묘하게 합쳐 놓은 듯한-사실 집필 시기로 보면 후자가 더 뒤긴 하다-이 괴상한 백과사전은 특정 개념을 설명해나가다가도 그 개념이 실존하게 될 가능성이 극히 낮아지면 즉시 정지하며, 몇 십 초의 동기화 과정을 거친 후 이를 삭제해버리곤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자연 언어, 0언어를 예측하기 위해 이를 효율적으로 축약시킨 메타언어1, 그 메타언어를 더 축약시킨 메타언어2, 메타언어3 등을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보량은 상상을 초월할 수준이라 이를 자연어로 바꾼다면 135년 정도의 발화가 완성된다. 이 예견언어학은 자기 스스로를 파괴하는 언어 GOLEM처럼 여러 메타언어적 패러독스를 품고 있으며, 이를 성공적으로 통제하는 것 역시 베스트란드 엑스텔로페디아의 장점 중 하나다.
그 밖에도 흥미로운 단편이 많지만-<율리시스>와 <피네간의 경야>를 확장해 하나의 글자마다 거의 무한할 정도로 다양한 함의를 품고 있도록 저술한 <길가메시 서사시> 기반 <기가메시>라든가, 극소수의 현학적 독자를 제외하면 아무도 읽지 않아 훼손할 가치조차 느끼지 않는 문학의 하찮음을 냉소적으로 논하는 <두 유어셀프 어 북>이라든가-SF 작가로서의 렘의 장점이 가장 두드러지는 건 이런 글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렘은 그 어떤 작가보다도 진지한 SF 묵시록을 써내려가는데,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이 불규칙하게 변형되며 우주적 계산을 해나가는 행성을 다루는 <솔라리스>나, 바로 지근거리에 있음에도 서로의 물리적 상태가 너무나 달라 상대방을 완전히 파괴시키고도 이 참극을 눈치채지 못하는 <헛수고Fiasko> 등 무한히 뻗어나가는 학문의 가지와 별개로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공약 불가능성을 다소 참담할 수준으로 다루곤 한다.
이것이 렘의 시대에는 우주론을 필히 경유했었다면, 지금은 꼭 그럴 필요도 없는 듯하지만 말이다. 마이크로초 단위로 상품을 사고팔며 번역되기 위해 수십 시간이 걸릴 정보량을 다루고 있는 전세계적 체계가 질문하게 될 날도 그리 머지 않았을 테니까. "사람이 행동과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의식 상태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장할 만한 측정 절차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차 검증을 위한 병렬 계산을 승인하시겠습니까?"
P. S. 정말 아쉬운 점은 <골렘 XIV>가 누락되었다는 점이다. 읽다가 마지막에 당황해서 잠시 멈췄는데, <골렘 XIV>가 이후 가공의 서평 이상으로 확장되어 따로 책으로 나온 것과는 별개로 그 가공의 서평이 <상상된 위대함>에 실려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번역 대상이었던 2012년 폴란드 판본에서는 이 글이 빠져 있었던 걸까 싶지만, 참 아쉬운 부분이다.
P. S. S. 예전에 현대문학에서 낸 <스타니스와프 렘> 단편집도 같은 역자가 일부 옮긴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단편집과 겹치는 글이 몇 개 있다. 살짝 대조해보니 심각한 오역으로 지적을 받았던 부분들이 꽤나 고쳐져 있는 듯했다. (예시) 예전에 번역한 글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일은 없어서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
1) 찰스 샌더스 퍼스의 실용주의적 우주관이 살짝 공명하는 듯한 설정이다. 그는 확률적인 우주 속에서 마찬가지로 확률적인 우리가 특정 방식으로 스스로를 알아가고 우주를 알아가고 있고, 그 과정이 마찬가지로 아직 자신의 형태가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우주가 우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알아가고 만들어가고 있어 우리의 발견이 우주의 실제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믿는다. 우주론에서 흔히 있는 소우주-대우주 관계가 퍼스에게선 이런 식으로 나타난 것이겠지만, 사실 이 정도까지 가면 확실히 제임스나 듀이의 더 소박한 실용주의보다는 훨씬 더 앞서 나간 형이상학이긴 하다.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