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우 최근 건축계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철학에서도 많이 논의되고 있지요. 특히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 François Lyotard와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에 의해서 말입니다. 역사적 참조historical reference와 언어 놀이language play는 분명히 근대의 에피스테메épistémè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당신은 건축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또 그것이 제기하는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들과 관련해 포스트모더니즘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요?

푸코 나는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아주 널리 퍼진 안이한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적으로 막 떠오른 대상을 마치 그것이 늘 우리가 해방을 갈구했던 억압의 주된 형태였던 것인 양 지목하는 경향 말입니다. 그와 같은 단순한 태도는 이제 여러 가지 위험한 결과를 수반합니다. 첫째, 사람들은 결코 누린 적 없는 과거의 상상적인 행복이나 싸구려 의고주의archaism를 추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에서 동시대의 섹슈얼리티가 얼마나 끔찍한 것으로 기술되는지를 살펴보면 아주 재미있지요. 오늘날에는 일단 텔레비전을 꺼야지만! 대량 생산된 침대에서나! 섹스가 가능하다는 식입니다. ‘멋졌던 옛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글쎄, 멋졌던 그 시절에는 사람들이 하루에 열여덟 시간씩 일을 하고 여섯 명이 한 침대에서 잠을 잤습니다. 물론 운 좋게 집에 침대가 하나라도 있을 경우에 말입니다! 현재 또는 아주 가까운 과거에 대한 이러한 증오에는 완전히 신화적인 과거를 소환하려는 위험한 경향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음으로 하버마스가 제기하는 문제가 있지요. 예컨대, 만일 칸트Emmanuel Kant나 베버Max Weber의 작업을 방기한다면 우리는 비합리성 속으로 굴러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난 이 말에 완전히 동의합니다만, 동시에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는 상당히 다른 것입니다. 나는 18세기 이래 철학과 비판적 사유의 중심 이슈는 언제나-지금도 여전히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다음과 같은 질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이 이성reason은 무엇인가? 그것의 역사적 효과는 무엇인가? 그 한계는 무엇이며, 그 위험은 무엇인가? 어떻게 우리는 각종 내생적 위험들이 불행하게 가로지르는 합리성을 다행스럽게도 헌신적으로 실천하는, 합리적인 존재로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가급적 가까이 머물러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중심적인 문제인 동시에 아주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점을 명심하면서 말이지요. 더욱이 이성을 제거해야만 할 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극히 위험한 만큼, 합리성에 대한 어떠한 비판적 문제제기도 우리를 비합리성에 빠트릴 위험이 있다고 말하는 것 또한 지극히 위험합니다. 인종주의가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의 현란한 합리성을 기반으로 정식화되었으며, 이는 다시 나치즘의 가장 지속적이면서도 강력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합리성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태가 얼마나 모호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물론 비합리성이겠지만, 결국에는 합리성의 형식을 띤 비합리성이었지요・・・
우리는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 있으며, 이에 맞서 싸워야만 합니다. 만일 지식인 일반에 어떤 기능이 있다면, 비판적 사유에 어떤 기능이 있다면, 훨씬 더 구체적으로 비판적 사유 안에서 철학에 어떤 기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합리성의 나선, 합리성의 회전문을 인정하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를 합리성의 필요성과 불가피성, 그리고 동시에 그 내생적 위험으로 되돌려 보내는 나선, 또는 회전문 말입니다.

레비나우 종합해보건대, 당신은 하버마스 같은 철학자보다는 역사주의historicism와 역사적 참조의 작용에 대해 두려움을 덜 느낀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한편 건축 분야에서 모더니즘의 수호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문명의 위기라는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장식과 모티브로의 경박한 회귀를 위해서 근대 건축을 포기한다면, 이는 일정 정도 문명을 포기하는 셈이라고까지 주장하면서 말이지요. 반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역사적 참조 그 자체는 나름대로 의미 있으며, 지나치게 합리화된 세계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푸코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점을 말해두고 싶습니다. 우리는 회귀라고 주장하는 그 모든 것을 전적으로, 또 절대적으로 의심해야 합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논리적인 것입니다. 사실 회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역사[그 자체], 그리고 역사에 기울여지는 세심한 관심은 확실히 회귀라는 주제에 대한 가장 좋은 방어책 중 하나입니다. 내가 내놓은 광기의 역사라든지 감옥에 대한 연구는 정확히 그런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다음과 같은 점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현재에 대한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 역사 연구를 수행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내 연구를 가지고] ‘18세기 광인들이 ~하던 좋았던 옛 시절로 돌아가자’ 거나 ‘감옥이 ~의 주요 수단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 시대로 되돌아가자’ 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 말입니다. 이는 사실 많은 이들을 약 오르게 만들었지요. 나는 역사가 우리를 그런 종류의 회귀 이데올로기로부터 지켜준다고 생각합니다.

- 미셸 푸코, <공간, 지식, 권력 ~ 폴 레비나우와의 인터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