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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들어서 유독 무더웠던 7월이 끝나가고 있다. 이번달은 개인적으로 일이 2배 정도 늘어났고 몸도 아팠던지라, 지난달과 비교해 많은 책을 읽진 못했다. 그래도 읽었던 책들이 하나같이 다 좋은 책들이어서 만족스럽기도 했다. 남은 하반기 동안 더 열심히 읽어볼 것을 다짐하면서 지난 한 달 동안 읽었던 책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1. 상호부조론 (Mutual 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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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돕고자 하는 인간의 성향은 그 기원이 매우 오래되었고, 과거에 인류가 진화해 온 모든 과정과 아주 깊이 얽혀 있기에, 역사 속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인류가 유지해오고 있다. (The mutual-aid tendency in man has so remote an origin, and is so deeply interwoven with all the past evolution of the human race, that it has been maintained by mankind up to the present time, notwithstanding all vicissitudes of history.)”

- 상호부조론 中 -

제정 러시아 태생의 아나키즘 혁명가이면서, 열성적인 학자였던 표트르 크로포트킨(Пётр Кропоткин, 1842 - 1921)의 사회과학 에세이이자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상호부조론을 영어 원서로 읽어봤다. 저자는 본래 러시아에서 손에 꼽히는 명문가에서 태어난 귀족이었고,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시종무관으로도 임관한 엘리트 군인이었지만, 동시에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이 가길 꺼렸던 시베리아 오지 부임을 자원하면서 시베리아의 지질과 생태계를 열성적으로 연구했던 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혹독한 환경에서 탐구를 하면서 자신의 호화로운 삶과 대비되는 러시아 민중이 처한 열악한 환경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그는 자신이 지닌 부와 명예를 모두 버리고 아나키스트 혁명가의 길을 걷기로 했다. 열성적으로 혁명활동을 하던 중 그는 차르 정권으로부터 꼬리가 잡혀 체포된 후 시베리아의 감옥에 수감되지만, 그와 뜻을 같이하는 동료 혁명가의 도움을 받아 탈옥을 하였고 서유럽으로 망명을 떠났다. 이번에 읽어본 이책은 그가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영어로 집필했던 책이다. 내가 이책을 읽어보게 된 계기도 사실 상술한 바와 같은 저자의 일생을 알게된 덕분이었다. 난 크로포트킨의 일생에 큰 감명을 받았지만 정작 그의 저작은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재작년 서점을 구경하다가 이책을 우연히 발견했는데, 이땐 정말 운명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고민도 않고 책을 샀었다. 그렇게 이책을 사놓고도 2년 가까이 묵혀두다가 이번에 적당히 시간이 나면서 한 번 읽어봤다.

이책은 사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 - 1882)이 진화론과 적자생존을 주창한 이래로 생존을 위한 경쟁에만 치중해서 생물들끼리 피 튀기는 경쟁 끝에 강한 개체만이 살아남아 진화가 이뤄졌다는 학설을 주장한 당대 학자들에 대한 반박서의 성격을 띄고 있다. 크로포트킨은 자신이 소싯적 시베리아를 답사하면서 겪은 일화와 수많은 생물학자와 동물학자의 자료를 인용하며, 진화는 각 개체간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험난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체들끼리 서로 도우면서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상호간의 협력을 통해 종의 수명을 연장하고 진화를 거듭해 온 것은 개미, 조류, 설치류, 반추동물, 육식동물 뿐만 아니라 인간도 헤당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류의 발전사에서도 인류가 서로 도우면서 발전했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나는데, 원시적인 씨족 사회부터 야만인의 촌락공동제, 그리고 중세 시대의 자유도시와 길드를 보면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을 통해 쌓인 집단적 경험의 산물이 아니라 열악한 상황에 있는 구성원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구성원간의 불화를 공동체 차원에서 효과적으로 중재해오면서 발전해 온 인류의 기관이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서로를 돕고자하는 인간의 행동 양상은 종의 본능으로 각인되어 있는 성향이고, 진화를 거듭하며 지적으로도 진보하여 이런 성향이 발전된 결과물이 도덕률이라는 점을 저자는 피력한다. 냉소를 띈 채 약육강식과 각자도생이 자연의 순리라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크로포트킨의 이론은 제법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이책을 읽으면서 내 눈길을 끌었던 점을 한가지 더 꼽자면 저자가 강력한 단일 국가의 대두 이후 근대화를 거치면서 서로 돕는 법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생활상을 지적했다는 점이었다. 상술한 인류의 공동체였던 씨족 사회, 촌락 공동체, 자유 도시 모두 단일하고 강력한 구심점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체제가 아니라 수많은 소공동체들이 느슨하게 연합하면서 만들어졌고 작은 공동체끼리 서로 무수히 협력하면서 운영되는 체제였다. 그러나 중세 이후 왕권 강화를 기치로 내세우면서 두각을 드러낸 국가가 이들을 무력으로 병합하면서 상호간의 협력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시스템이 붕괴되었다. 이후 국가는 각 개인과 소공동체들이 서로를 도우면서 탄탄히 구축된 사회 안전망을 관료주의에 기반한 제도 도입만으로 대체하였다. 이런 까닭에 이전 시대 사람들은 이웃으로 연결된 타인들끼리 상부상조하며 난국을 헤쳐나갔던데 반해, 근대인들은 길거리에서 싸움을 목격하면 이를 적극적으로 말리기 보다는 경찰을 부르는 정도로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가난한 이웃이 있어도 세금으로 돌아가는 복지 예산이나 기부금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구빈원에서 굶어가는 타인들을 방치하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물론 저자가 국가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아나키스트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고, 저 또한 저자의 사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점차 사람들이 연대 의식을 잃어가는 작금의 상황을 목도하고 있는 터라 작가의 지적에는 공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송파 세 모녀 사건과 같이 국가가 운영하는 복지 제도의 사각 지대에 놓여 삶을 비관한 우리네 사례들이 떠올라서 책을 읽는 내내 씁쓸한 심정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보태며 마무리하자면, 원래 내가 이책을 꺼내들면서 예상했던 것은 혁명가의 열의에 찬 선언문 같은 것이었지만 막상 읽어보니 이책은 꽤나 차가운 논리에 기반한 과학 서적이었다. 보통 아나키즘의 경우 현실성이 결여된 이상주의로만 치부되기도 하지만, 이책을 읽음으로써 아나키즘 또한 철저하게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논리에서 쌓아올려진 이론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또 나는 뼛속까지 냉소적이진 않았지만 비관적인 전망과 전쟁으로 얼룩진 요즘 뉴스를 보며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었는데, 통념과는 반대로 서로 돕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는 저자의 책을 보며 적잖은 희망을 얻었던 것 같다. 물론 작가가 서양인인만큼 인류의 발전사를 탐구하는 내용에서 보다 서양의 사례를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만큼 다소 상이한 발전사를 거쳤던 동양에서 나고 자란 저로서는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대목이 조금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자료와 일관되고 우직한 논리로 연대의 중요성을 부르짖는 이 책은 연대의식을 잃어가는 현대 한국인도 충분히 읽어볼 만큼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이 책에 관심이 생겼다면 '만물은 서로를 돕는다'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국역본도 있으니 기회가 있다면 꼭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2. 향수 (Das Parf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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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것, 끔찍한 것, 아름다운 것 앞에서 눈을 감을 수는 있다. 달콤한 멜로디나 유혹의 말에도 귀를 막을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냄새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다. 냄새는 호흡과 한 형제이기 때문이다.”

- 향수 中 -

독일 암바흐 태생의 소설가이자 작품을 통해 대중과 비평가 모두로부터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타인의 관심이 부담스러워 평생을 은둔자로 지내고 있는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üskind, 1949 - )의 유일한 장편소설 향수를 읽어봤다. 이책을 찾아서 읽어보게 된데에는 주변 사람들의 추천이 있었다. 예전 지인 중에 독어독문학과를 전공했던 사람이 본작이 재밌다며 강력 추천을 했던 것도 있고, 책을 좋아하는 내 이모도 이책을 가지고 있는데 좋은 책이라며 일독을 권했던 적이 있었다. 주변인들의 추천에 작품이 다루는 소재 자체도 흥미로워 보여서, 이모께 부탁드려 책을 구해 이번 기회에 읽어봤다.

본작은 18세기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장바티스트 그르누이라는 소름끼치는 한 천재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그르누이는 난쟁이에 비유될 정도로 왜소한 체격을 지니고 얼굴에 흉터와 농포가 있는 흉측한 몰골을 한데다 태어날 때부터 몸에서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이에 기이함을 느낀 타인들로부터 배척받고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초인적인 후각을 지녀 아무리 희미한 냄새라도 또렷이 맡을 수 있어 눈으로 보지 않고도 냄새만으로 지형지물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기억력도 비상해 맡았던 모든 냄새를 정확히 기억해 머릿속에 저장해 놓을 수 있었다. 비록 자신에게서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았지만 냄새에 누구보다도 더 민감한 후각을 지닌 그는 우연히 아리따운 소녀의 몸에서 나는 매혹적인 향기를 맡게 되었고, 이윽고 그 향기를 반드시 소유하겠다는 강렬한 욕구에 사로잡혀 소녀를 목졸라 죽인 채 게걸스럽게 체취를 맡는다. 이 일을 계기로 그르누이는 모든 향기의 창조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조향사가 되었고, 본작의 스토리라인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향기를 얻고자 하는 그의 섬뜩한 행적을 따라가고 있다.

본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소재는 바로 냄새로, 만물에서 나며 대상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존재로 작중에서 묘사된다. 그리고 냄새의 특성상 어떤 뚜렷한 형태를 띄고 있진 않기에 대상의 외견보다는 무의식에 잠재된 내면을 드러내는 무언가로도 그려진다. 즉,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체취는 인간성을 은유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와 동시에 냄새는 눈, 귀만 틀어막으면 인식을 차단할 수 있는 시청각 요소와는 다르게 호흡과 직결된 코로 감각하기에 반드시 인식할 수 밖에 없는 불가역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이렇듯 작품 속에서 냄새는 아무런 저항없이 사람에게 파고드는데, 그르누이가 아예 작정하고 사람들을 홀릴 작정으로 연출된 향기를 뿜어내는 향수를 만들어내고 이를 시연해 보는 과정에서 냄새의 속성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작중 등장인물들은 그르누이가 만들어낸 향수에서 나는 냄새에 도취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홀린 이유가 향기 때문이라는 것은 전혀 눈치채지도 못한다. 향기가 더 강렬할수록 냄새를 뿜어대는 대상에 대한 이미지도 왜곡되는데, 왜곡된 이미지는 사람의 마음 속 깊이 자리한 욕망과 조응하여 이상화된 이미지로 탈바꿈하고 사람을 완전히 굴복시키기까지 한다. 이러한 대목은 인간이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경험한 것으로만 행동하기 보다는 각자의 마음 속 깊이 자리한 욕망에 호응해 주는 비합리적인 환상에 휘둘리며 행동해 왔다는 점을 예술적으로 폭로한다. 작가는 허무맹랑해 보이는 소재를 통해 인간의 근원적인 비합리성을 날카롭게 묘파해냈다.

또 본작의 매력 포인트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에도 있다. 작중에서 그르누이가 여러가지 향기를 교묘하게 조합하면서도 뭇 사람들을 홀리는 향수를 만들어내듯이, 작가도 각자가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닌 문학 양식을 적절히 배합하여 이야기의 골자를 만든 다음에 흡인력 있는 내러티브로 내용물을 꽉꽉 채워 독자들을 유혹해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본작을 살펴보면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이 18세기 프랑스의 생활상과 자연풍광이 세밀하게 묘사되는 점에서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이 연상되고, 중간중간 그르누이의 독백 속에서 추상적인 관념들이 부딪히면서 주인공이 방황하는 장면에서는 독일 낭만주의 문학도 연상이 되고, 기묘한 우연에 의해 황당한 일이 아무렇게 벌어지는 전개에서는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도 연상된다. 그리고 상술하였듯이 본작이 더 파면 팔수록 쉽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매혹적이고 유려한 문체와 자극적인 스토리라인을 가미하여 주제의 난해함을 교묘히 가리고 독자들이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고 이야기에 푹 빠지도록 만들었다. 이책을 덮고 나서 작가가 향수가 지닌 특성과 만들어지는 과정을 치밀하게 모방해서 작품을 집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보태자면 당초 이책을 읽었을 때는 퇴폐적인 스릴러 정도를 기대하고 읽었었다. 그러나 끝까지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제 예상보다 훨씬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어 꽤나 흡족했었다. 이 이야기를 한 편의 재밌는 스릴러로 볼 수도 있고 사변적인 관념 소설로도 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본작이 구사하는 다층적인 스토리텔링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책의 소재가 제법 자극적이고 전개도 충격적인 편이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지만, 재미와 완성도를 모두 잡은 명작인 만큼 기회가 된다면 이책을 읽어보는 걸 강력히 추천한다.

3. 타타르인의 사막 (Il deserto dei Tart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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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고통을 겪는다면 그건 온전히 그의 몫일 뿐, 그 고통의 작은 부분이라도 다른 누군가 대신 짊어져줄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군가 괴로워할 때면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그를 사랑한다 해도 그와 똑같이 고통을 느끼지는 않으며, 바로 여기서 삶이 고독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 타타르인의 사막 中 -

이탈리아 북부 벨루노에서 태어나 밀라노에서 일생을 보낸 기자, 소설가 겸 화가이자 이탈리아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중 하나로 꼽히는 디노 부차티(Dino Buzzati, 1906 - 1972)의 대표작인 장편소설 타타르인의 사막을 읽어봤다. 이책을 찾아 읽어보게 된 계기는 언젠가 이탈리아 문학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읽어봤던 이탈리아 문학은 한국에서는 영역본을 중역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Il nome della rosa)하고, 읽기는 했지만 너무 어려워서 제대로 이해는 했는지 의심스러웠던 단테의 신곡(La comedìa)이 전부였다. 이탈리아 문학이 현대까지도 제법 명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제가 근현대 이탈리아 문학은 많이 읽어보지 못해서 어떤 작품을 읽어보는 게 좋을지 고심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 작품을 물색해 보던 중 본작이 적당한 분량을 갖춘데다 제가 좋아하는 장르인 마술적 사실주의풍의 작품이라는 평이 있어서, 이번 기회에 이책을 구해 한 번 읽어봤다.

본작은 초임 장교인 조반니 드로고 중위가 바스티아니 요새라는 곳으로 부임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바스티아니 요새는 황량하기 짝이 없는 사막과 험준한 산세를 마주한 허름한 요새로 북방 민족인 타타르인들이 언젠가 침입해 올 것이라는 전설이 떠돌던 곳이었다. 이런 곳을 첫 임지로 배정 받게된 드로고 중위는 임지에 처음 도착할 때만 하더라도 열악한 근무환경에 경악하며 꾀병을 부려서라도 임지를 바꾸려고 한다. 이후 정기 건강검진이 열리는 4달 뒤 까지 기다리다 가라는 요새 부사령관의 회유가 있어 기다렸다. 막상 건강검진 때 드로고 중위는 황량한 요새 밖에 풍광이랑 언젠가 요새로 처들어올 적군을 물리쳐 전공을 세울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타 임지로 전출을 거부하고 기약없이 요새에서 계속 주둔한다. 불가사의한 주인공의 군생활을 따라가다 보니 내가 이전에 읽었던 두 작품이 연상되었다. 복잡하고 체계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무의미한 행동만을 반복하는 관료제 하에서 영락하는 개인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프란츠 카프카의 성(Das Schloss)이 연상되었고, 주인공이 원래 있던 세계와는 단절된 곳에서 예정되었던 시간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고찰해 본다는 점에서 토마스 만의 마의 산(Der Zauberberg)도 연상되었다.

본작은 상술한 작품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지만, 부차티는 두 작품의 테마를 개성있게 변용하여 자신만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우선 작품의 주 무대가 되는 요새와 사막 지대는 현실 세계와는 확연히 동떨어지면서도 불가사의하고 신화적인 공간으로 묘사된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바스티아니 요새는 황량하기 짝이 없고 낙후된 곳이라 굳이 오래남을 만한 곳인가라는 생각부터 들지만, 그 황량함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다는 막연함이란 감정이 마력처럼 뿜어져나와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을 사로잡아 이들의 발을 묶어둔다. 마찬가지로 막연하지만 암담함만을 자아내는 카프카 작품 속의 성과는 분명히 결이 다르다. 또 드로고 중위가 요새에서 기약없는 군생활을 이어가면서 흘러보내는 시간에 관한 고찰도 괄목할 만하다. 작중 3인칭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션은 주인공이 품는 희망 그리고 자신의 장래에 대한 고민을 직접적으로 풀어내는데 이와 동시에 매정하게 흘러가버리는 시간을 차가운 필치로 조망한다. 드로고 중위의 짠내나는 인생과 잔인하리만치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겹쳐봄으로써 인생이 얼마나 한없이 덧없어질 수 있는지 곱씹어 보게 된다. 이또한 너무 사변적인 내용에 치우쳐 삼천포로 빠져 버리는 토마스 만표 단상하고는 어느 정도 차별점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작가는 환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세계관을 구축하고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와닿을만한 소재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차가운 문체로 이야기를 끌어가면서 독자들에게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마지막으로 작품에 대한 내 개인적인 인상을 얘기하면서 마치면, 처음 책장을 펼칠때만 하더라도 이야기가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점점 책장을 넘겨갈수록 본작이 절제된 형식미와 작가의 뛰어난 통찰력이 담긴 작품이라는 점을 알게되어 책을 덮을 때 꽤나 만족했었던 것 같았다. 조금 늘어지는 템포의 전개와 재미하고는 거리가 있는 건조한 작풍 때문에 모든 사람이 좋아할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지만,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고 취향만 맞는다면 충분히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작품이기에 기회가 있다면 한 번 정도 읽어보는 것을 추천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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