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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보자 뭐가 보이는가?


사과 4개.


우리는 위 사진에 있는 물체를 '사과' 라고 부른다.


각 '사과'는 형태가 다르지만 왜 '사과'라고 부를 수 있을까?





표상, 우리 눈에 나타나는 현상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이 물음은 인류 역사 오랜 시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과다움'이라는 이상(Ideal)이 있어 이 물체를 사과라고 부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사과'라는 이상적인 속성은 이데아에 있어서 우린 볼 수 없으며,


현상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고 이데아의 파편만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물의 본성이 존재하는 이데아를 가정하며 순수한 '사과'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고대 서양 철학은 위로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며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를 상정한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렇게 세상물정을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했느냐? 그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어디에 땅을 받치는 기둥이 박혀 있느냐? 그 누가 세상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욥이 야훼께 대답하였다.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욥기-










하지만 '사과다움'이란 무엇일까? 빨갛고 둥그런 물체?


순수한 사과를 정의하긴 쉽지 않다.


불교에서는 아래로 한없이 아래로 내려간다.


그리고 사물의 심연에는 '공' 이 존재했다.


사과라는 것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바뀐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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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사과를 고르시오 (5점) )















습관적으로 우리는 물체가 가진 속성은 고정되었다고 믿는다.


우리가 대상을 기술할때를 보자



삼각형은 세 변을 가진 도형 사각형은 네 변을 가진 도형....


즉 A라는 대상은 B라고 생각한다.


A=B , C = D


이런 연역법은 순수한 이성에서는 잘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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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제 세계로 넘어가보자.


사과를 기술해보자.



'사과는 빨갛다.', '사과는 동그랗다.'


A=B 가 아니다.


A ⊆ B 이거나 A ∩ B 등등 A를 간접적으로 기술한다. (A=B 라는 언어체계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긴 했다.)


이는 생존을 위해 발달한 우리 뇌의 산물이며 오류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사과' 라는 것은 고정 불변하는 자성이 없고 원인과 결과로 얽힌 상호의존적인 것, 이것이 불교에서 내린 결론이다.


이러한 '공 사상'의 핵심을 적은 것이 반야심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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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골라야 할까?)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반야심경(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뜻은 '일체를 초월하는 지혜로 피안에 도달하는 가장 핵심되는 부처님의 말씀.' 이다.


여기서 '일체를 초월하는 지혜'는 '공 사상'이며 이것을 알면 피안(고통이 없는 상태)에 도달 한다고 주장한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느니라.




인생은 고통이라고 부처는 말했다[1].  우리가 기뻐하는 일조차 고통인 이유는 언젠가 그것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은 고통이며 '생즉고'라고 설명했다.


고통의 원인은 집착에서 비롯되며 이는 '집착의 대상', '집착의 마음', '집착하는 주체' 모두가 공(오온이 공하다.)한 것을 알지 못함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관자재보살은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느끼며 온갖 고통을 건너 피안에 이른다.












[1]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다.[1]] 싫어하는 [대상]들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대상]들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데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2] 자체가 괴로움이다.”

초기불전연구1원, 상윳따니까야 6권, 초전법륜경(S56: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