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의 기본적 본질은 부조리를 자유로 바꾸며, 연결성의 결핍이나 무의미함을 보상하는 것이다. 동시에 인간은 자신의 무한성에 대한 주장을 거부하고 오히려 인간 한계에 대한 변증법적 승인을 추구하여야 한다. 물론 여기서 변증법적이라는 말 자체는 상당히 모호한 표현으로 그 자체가 좀더 세밀하게 논의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숭고에 관한 논의는 서구의 경우 롱기누스, 버크, 칸트 등에 의해서 지속되어왔으며, 중국의 경우 현대기에 차이위안페이, 주광쳰(朱光譖) 등이 독일 관념론 철학을 바탕으로 숭고의 미적 범주에 관한 논의를 전개한 바 있다. 숭고란 엄밀한 의미에서 주체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주체와 관련된 경험으로서의 숭고는 따지고 보면 주체 바깥의 객체, 즉 (자연)대상과의 일정한 관계맺음을 통해 생성된다.
우리가 숭고에 대한 담론에서 항상 주목하는 것은 과연 숭고함에 대한 본질, 또는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근원을 제공하는 그 실체가 도대체 인식 주체에 있는 것인지, 혹은 인식 주체의 외부 대상에 내재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모호함이다. 이러한 주ー객간의 모호함이 생성되는 숭고 체험과 관련하여 토마스 위스켈은 숭고의 요인이 현실과 현실에 대한 상상적인 이해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지는 이성의 확대라고 평가한다. 동시에 숭고란 가상적인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며, 그것이 의식적으로 주어지거나 재현되면, 우리로부터 사라진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성의 증대”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 숭고의 체험 자체가 실제에서는 가장 가상적인 문맥 속에서 체현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명료함을 상징하는 이성의 영역이 몽롱함을 전제하는 ‘가상성’과 어우러지면서 형성되는 ‘숭고’의 체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점에 대해 토마스 위스켈은 숭고의 경우 자연계의 대상이 경외를 불러들이고, 경외를 다시 주체 자신에게로 돌림과 동시에 숭고는 ‘무조건적인 것’을 실현하기 위해 가상을 전복하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버크는 이러한 숭고의 본질을 격정passion이라는 개념으로 풀이한다. 즉 어떠한 자연 과학적 범주 체계에도 귀속될 수 없는 인간 정서의 한 중요한 부분에 대한 규정, 그리고 어떠한 규정 체계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이러한 영역을 버크는 ‘숭고’의 개념으로 설명해 내려간다. 버크의 숭고론에서는 ‘과다excess’를 새로운 차원의 주체로 설립하고자 하는데, 여기에 비하여 미는 상대적으로 훨씬 ‘순화된tempered’ 영역으로 파악된다. 전체적으로 버크의 숭고는 한도를 초과하는 과다, 범주화를 초월하는 위대함, 그리고 불가지성과 연계되는 일종의 공포의 감정을 지시한다. 루쉰이 「악마파 시의 힘」에서 조화와 질서를 혼돈과 전쟁의 하위 범주로 설정했던 것이나 버크가 숭고 범주를 미적 범주보다 강력한 것으로 간주했던 부분은 양자가 상응하는 지점이다.
해석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숭고의 본질을 규명해 들어갈 때, 주관ー객관의 관계와 유사한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텍스트와 독자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이다. 숭고는 미적 범주와 달리 주ー객간의 가상적인 조화나 합일을 거부하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이원적 세계의 현존을 고착화시키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자면 주ー객의 실제적 분리나 단절에서 주체의 숭고성은 대상의 압도적 권위를 통해 생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경외・압도에서 고양으로 연결되는 숭고 미학의 기본 테마이다. 이는 물론 일종의 ‘가상적 느낌’에 해당하는데 이러한 경험은 비단 숭고 미학만이 아니라 낭만주의론에서도 자주 제기되는 문제의 하나이다. 실제로 숭고의 기본 전제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성취 불가능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며, 그것이 파지 가능한 것이 되는 순간 숭고의 의미는 자체적으로 소멸・붕괴된다. 칸트의 경우 쾌락은 자신의 패배를 느끼는 상상의 불쾌와 연결되어 있으며, 쾌의 강도가 이성이라는 규범적 생각의 획득 불가능성에 비례한다고 함은 이러한 논리와 상응한다. 그렇다면 “칸트의 숭고가 본질적으로 위안이고 (고통에 대한) 경감일 뿐, 인간의 한계나 그것의 비극적 의미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한 골드만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루쉰은 예술의 실제적 기능을 이러한 숭고의 논리와 유사한 문맥에서 파악하고 있다.
“뛰어난 예술과 문학 중에는 보고 읽은 뒤에도 우리에게 별 도움되는 바가 없는 듯한 것이 왕왕 있다. 그러나 우리가 즐겁게 보고 읽는 것은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으니, 눈 앞에 펼쳐진 드넓은 바다에서 파도 속을 헤엄쳐 다니다가 수영이 끝나고 나면 정신과 육체 모두에 변화가 생겨난다. 그 바다는 실로 파도가 이는 곳일 뿐, 마음이 있는 곳도 결코 아니요, 교훈이나 격언이라고는 단 한 가지도 주는 바가 없다. 그렇지만 헤엄치는 사람의 원기와 체력은 그로 인해 급격히 증대된다.”
예술의 본질에 대한 루쉰의 비유는 특이하다. 망망대해 자체가 사상을 가지고 우리에게 직접 진리를 전수하거나 우리를 새로운 인간으로 환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의 만남에서 스스로 교훈을 얻고서 그로부터 원기를 강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의 인간과 두 번째 인간 사이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자연의 공능(功能)인가, 인간 스스로의 내부적인 역량을 근거로 한 것인가? 두 가지 가능성은 단지 그 자체가 명료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뿐이지만, 이 경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술과 인간이 어떻게 만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양자가 만난 이후 어떠한 변화가 발생하는가의 문제이다. 숭고의 구조에 빗대어 말하자면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나”의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의 문제가 되는 셈이다.
「악마파 시의 힘」에 등장하는 초인은 엄격히 보자면 가상적 실체이다. 그것이 가상적이라는 의미는 세계ー이데아라는 상이한 단층의 분리가 전제되고 그러한 차원에서 모사론의 형식이 개입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텍스트 속에서의 합일화가 공고해질수록, 그것은 현실과의 괴리를 심화시키는 결과로 치솟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텍스트의 이러한 원리는 어떤 의미에서 현실 세계에 대한 상징적 행위로 전이될 수 있는 기폭제의 빌미를 확보한다. 모더니즘 미학론이 리얼리즘의 모사론적 기제를 떨쳐버리고 자체적 지시성auto-referentia lity을 추구하는 것이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의 물신화 과정에 대한 상징적 저항 행위로 비쳐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제임슨의 장르론이 밝히고자 했던 형식적 기제 자체의 내포된 상징적 의미망에 대한 고찰은 이와 유사한 문맥에서 읽힐 수 있다. 그렇다면 “초인”이 갖는 의미 자체도 엄밀히 말해 하나의 개인화된 영웅의 형상이라는 관점에서 그 본질을 파악하기보다는 오히려 중국의 현대가 처해 있던 구체적 역사성에 대한 상징적 저항 행위 또는 가상적 해법으로 파악하는 것이 오히려 적합할 것이다.
정진배, <중국 현대 문학과 현대성 이데올로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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