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는 일말의 형이상학적 관심도 없이, 일말의 구성주의에도 경도됨이 없이, 일말의 위안도 얻으려는 기색이 없이 체험에 다가선다." 이보다 더 프루스트에 관한 진실을 표현해주는 말이 없다. 그리하여 프루스트가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이라고 지칠 줄 모르게 주장하는 이 작품의 기본 인물들도 전혀 인위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손바닥의 손금이 뻗어나간 모습이나 꽃받침 속 꽃술의 배열과 같은 의미에서는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이다. (...) 또한 비자의적 기억에 떠오르는 형상들도 대다수 고립된, 다만 수수께기처럼 나타나는 얼굴의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프루스트 문학의 가장 내밀한 진동에 자신을 의식적으로 내맡기기 위해서는 이 비자의적 기억 작업의 특이하고 깊은 층에 자신을 침잠시켜야만 한다. 그 심층에서 기억의 요인들이 더는 개별적으로, 즉 이미지들로서가 아니라, 마치 그물의 무게가 고기가 얼마나 잡혔는지를 어부에게 알려주듯이, 이미지도 없고 형태도 없이, 또 불확실하면서 묵직하게 전체에 관해 알려준다. 냄새는 여기서 잃어버린 시간에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사람(프루스트)의, 무게를 느끼는 감각이다. 그리고 그의 문장들은 예지적 신체의 전 근육운동이며, 이 그물을 들어 올리는 형언할 수 없는 노력 전체를 담고 있다. 그 밖에 이처럼 규정된 창작과 이처럼 규정된 고통이 얼마나 내밀한 공생관계에 있었는지 보통 창조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딛고 일어설 때의 영웅적인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프루스트에게서는 결코 터져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또 다른 시각에서 이렇게 말해도 좋다. 즉 프루스트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세상사나 삶과의 깊은 공모관계는 그처럼 깊고 부단한 고통이 아닌 다른 토대에서라면 틀림없이 비천하고 나태한 만족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을 거라는 점이다. 그러나 프루스트의 고통은 아무런 소망과 후회도 없는 열정에 의해 그의 위대한 창작 과정에서 그것이 차지할 위치를 지정받도록 정해져 있었다.
— <서사, 기억, 비평의 자리>, 발터 벤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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