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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의 세계는 나의 세계가 아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한 실무자의 고백일 뿐이다. 소설가 각자의 작품에는 소설의 역사에 대한 어떤 함축적인 통찰이,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한 것 또한 바로 내 소설들에 내재한 이 '소설에 대한 생각'이었다."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1. 소설

<배신당한 유언들>에서 쿤데라는 '유머'를 모르면 소설을 즐길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소설의 도덕은 모든 도덕적 판단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못 박아버린다. 소설은 유머의 정신에서 수립되며 소설의 도덕은 다름 아닌 도덕의 부재라는 것이다. 이 말은 분명 소설에 익숙지 않은 독자에게 당황스럽게 들릴 것이다. 소설은 단지 웃음거리에 불과하다는 건가? 그리고 부도덕해야만 하고? 역시 미쳐야 예술을 하는구나.
유머와 도덕, 이 두 가지 요소에 대한 오해는 쿤데라에게 늘 골칫거리였다. 일례로 그가 프랑스에 망명했을 당시. 한 의학 교수가 그를 초대하더니 도덕성에 대한 비판을 가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쿤데라의 소설, <이별의 왈츠>가 정자 기증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것의 도덕적 아름다움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안이 벙벙한 쿤데라는 이에 대해 이렇게 반문한다. "소설은 희극적인 거라고! 당신은 환상을 품고 있다고!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진지하게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그러자 의사가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 소설들, 그것들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아야 한단 말인가?" 이 말을 들은 쿤데라는 깨닫는다. "유머를 이해시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도 없다는 것을" (배신당한 유언들 14p)

이 의학 교수가 웃음을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을까? 그가 사소한 일에도 웃지 못하는 사람이어서 소설을 이해하지 못한 걸까? 아니다. 그도 분명히 보통 사람들처럼 쾌활하게 웃을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둘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데, 의사가 웃음은 알았던 반면 유머를 몰랐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의사에게 유머는 협소한 영역에 속하는 반면에 쿤데라에게 유머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쿤데라의 유머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소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소설에 대한 쿤데라의 정의를 보자.

"소설: 작가가 실험적 자아(인물)를 통해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산문 형식."

쿤데라에게 소설이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실존의 여러가지 양상을 포착하는 산문이다. 그 탐사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소설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꽤 오래전에 주창되었다. 쿤데라는 이러한 소설의 시학을 생각해 낸 최초의 작가 중 한 명으로 헨리 필딩을 언급한다. 필딩에 따르면 소설은 "산문-희극-서사적인 글쓰기"이며 소설가의 의무는 "그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숨겨져 있던 인간 본성의 한 양상을 발견하는 것이다."(커튼 17~18p) 소설은 그러므로 인식의 산물이다. 필딩은 이를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대상의 진정한 본질을 신속하고 명민하게 꿰뚫어 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커튼 18p)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 본성의 한 양상'을 발견하고 '대상의 진정한 본질'을 파악한다는 건가? 그리고 이런 포착 행위에 있어 유머나 도덕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가? 이러한 질문들은 피상적인 논의로 답해질 수 없는 것들이다. 쿤데라 본인이 직접 든 예시를 통해서 보는 게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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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국적에 대한 설명이 선행되었다면 <인간의 양>은 정치적으로 읽혔을 수도 있다. 이 단편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미군의 악행이 아닌 '비겁함과 수치, 정의감이라는 허울을 쓴 경솔한 가학성'인데도 말이다. 쿤데라는 이런 식으로 예술 작품이 정치적, 혹은 사회적 차원으로 귀결되는 것에 반대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사비나가 어땠는지 생각해 보라. 어느 날 한 정치 단체가 사비나를 위해 작품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런데 이 단체는 그녀가 '체코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즉 러시아에 의해 침략당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순교자로 만들어버린다. 사비나가 이에 항의하자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뭐라고요? 공산주의가 현대 예술을 박해하는 것이 사실 아닌가요?" 그녀는 격분해서 대답한다. "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키치예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418p)


사비나의 전시회를 개최한 정치 단체처럼, 소설을 한 가지 차원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예술 작품에서 현실의 이런저런 측면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인식하고자 하는 의도를 찾는 게 아니라 어떤 태도(정치적, 철학적, 종교적 태도 등)를 찾고자" 한다.(배신당한 유언들 133p) 삶의 상황이 아닌 '태도'를 찾고자 하는 이들은 소설을 일종의 팸플릿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쿤데라는 오웰의 소설을 비판한다. 카프카는 "지극히 반시적인 세계", "개인의 자유를 위한 자리, 개인의 독창성을 위한 자리가 없어진 세계"에서도 K의 삶에 대한 갈망을 지극히 시적으로 표현한다. (생에 대한 갈증이 충만한 묘사가 그 예시다) 반면에 오웰은 "전체주의 사회의 무시무시한 초상화"만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배신당한 유언들 330p~333p)

쿤데라가 '정치 소설'에 가한 비판은 소설을 한 가지 영역으로 축소시키는 모든 것에 대한 비판이다. 이제 쿤데라가 왜 소설을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유보해야 한다고 했는지 납득이 갈 것이다. 소설을 일종의 대원칙, 예를 들어 종교나 이데올로기 혹은 도덕의 잣대로 판단하게 되는 순간, 소설은 "이해하기에 앞서 대뜸 판단"되기 때문이다. (배신당한 유언들 15p)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판단을 중지하는 것은 인간 삶의 모든 상황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의문시한다는 건 특정 경향을 반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언가를 반대하는 것 자체가 이미 뚜렷한 경계를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아나톨 프랑스의 <신들은 목마르다>에 관한 쿤데라의 말을 인용하겠다.




"가믈랭과 브로토는 소설을 구성하는 두 개의 축이다. 이들의 기묘한 대립에서, 범죄의 반대는 미덕이 아니다. 브로토는 그 어떤 투쟁도 주도하지 않는다. 지배적인 사상에 반대해서 자신의 사상을 강요하는 야심이 그에게는 없다. 수용이 불가능한 사상을 품을 수 있고, 혁명뿐 아니라 신이 창조한 모습 그대로의 인간에 대해 의심할 수 있는 권리만을 그는 주장할 뿐이다. 세상에 대한 내 입장이 형성되던 시기에 나는 브로토에 매혹되었다. 그의 구체적인 생각이 이러저러해서가 아니라 믿기를 거부하는 인간으로서의 그의 입장 때문이었다." (만남 79p)

모든 확신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믿기를 거부하는 태도, 쿤데라가 취하는 이러한 태도는 모호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오에 겐자부로의 단편에 대한 분석에서 보았듯이, 쿤데라에게 소설은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산문"이다. 쿤데라는 단순히 확신에서 벗어나기만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소설이 발견할 수 있는 것만을 발견하라."는 브로흐의 말을 빌려, 존재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발견하는 것을 소설의 도덕으로 삼는다. (소설의 기술 15p) 존재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은 각양각색이다. 곰브로비치가 페르디두르케에서 온갖 '형식'이 강요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행위를 취하는지 분석하는 것도 탐구다.(우리는 완전히 어린아이가 된다.) 브로흐가 <몽유병자들>에서 가치 퇴락의 시대에 우리 삶이 어떤 양상을 맞이하는지 분석하는 것도 탐구다.(우리는 모순을 일으킨다.) 카프카가 <소송>에서 관료화된 사회의 개인이 가지게 될 '죄의식'을 분석하는 것도 탐구다. (우리는 벌로부터 죄를 찾는다.) 쿤데라가 원했던 소설은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발견되는 실존의 지도다. 그곳에선 오로지 면밀한 '인간적 상황에 대한 분석'이 체계화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




2. 소설의 기술

쿤데라는 오웰의 소설을 전체주의 사회의 초상화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는 거기에 덧붙여 "오웰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평론이나 팸플릿을 통해서도 (어쩌면 오히려 그보다 더 잘)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라 말한다. 그에 반해 소설가들의 소설은 전체주의 그 자체가 아닌 특정 상황 속에서 "모든 실존적 범주들이 어떻게 돌연히 그 의미를 달리하게 되는가를" 포착한다며 말이다. (소설의 기술 24p) 에세이 <소설의 기술>은 이 '실존적 범주들'을 포착하는 방법에 관한 책이다. 비록 상세하게 나와있지는 않아도 소설사를 망라하여 그 방법을 탐구하는 쿤데라의시선은 여전히 놀랍기만 하다. 이 책은 그런 쿤데라의 시선을 통해 본 하나의 일관된 소설적 탐구이기도 하지만, 7개의 부로 나뉘어져 있어 파편적이다. 여기서 쿤데라의 각각의 단상들을 모두 그러모아 다루고 싶기는 하지만 양이 너무 길어질 거 같아 4가지 요소만 다루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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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는 소설을 창작할 때 중요한 요소로 4가지를 꼽는다. (유희, 꿈, 사고, 시간. 소설의 기술 30p)

(1). 유희

쿤데라는 <트리스트럼 샌디>와 <운명론자 자크>를 가벼움의 두 정상, 유희로 구상된 최고의 소설들이라 한다. 그러나 이후의 소설들은 "그럴듯함의 명령과 사실적 장식과 연대기적 엄격함에 스스로 속박"됐다고 한다. (소설의 기술 30p) 쿤데라가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를 애정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디드로의 작품을 그 자신의 방식으로 개작한 적도 있다) 그리고 <소설의 기술>에는 안나와있지만 그가 디드로에게서 매혹된 몇 가지 원칙에 대해 직접 밝히기도 했다. 그 원칙들이란
"1. 행복감을 주는 구성의 자유,
2. 자유분방한 이야기들과 철학적 성찰들의 부단한 이웃 관계,
3. 철학적 성찰들의 충격적이고 희화적이고 반어적인, 비진지성의 특성이다."(배신당한 유언들 114p)
이 세가지 원칙은 실제로 쿤데라의 소설에 전반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듯 보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만 봐도 그가 구성을 얼마나 자유롭게, 정확히는 그 자신의 미학적 의도만으로 구성하는지 알 수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구성은 줄거리의 통제를 벗어난다. 인물들의 죽음을 매우 빠르게 다루고 마지막은 목가적인 분위기로 느리게 전개하는 게 그 예이다. 2번 원칙은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보다 더 구체화한다. 이 소설에서 쿤데라는 천사들에 관한 여러가지 상이한 이야기들과 내용상 관련이 없는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병치시키는 방식을 통해 그는 오직 주제 상의 통일만을 이룩한다. 그 자신이 염두에 둔 주제적 통일 아래에 이야기들을, 여러가지 방식의 성찰을 배치시키는 것이다. 3번 원칙은 아마 원서로 보면 더 잘 다가왔겠지만, 번역서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방식이다. 예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6부 대장정은 키치에 대한 일련의 에세이다. 오직 '키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아래 신학과 소설, 기사를 넘나들며 오로지 가정적인 성찰을 이루어나간다. 성찰은 종종 과장스럽고, 희화적으로 진행된다. ("똥이 비윤리적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404p) 또한 그는 자신의 이러한 '명상적인' (인물들에서 벗어난 서술) 부분이 음악적으로 들렸으면 좋겠다고 하기도 했다. <소설의 기술> 6부에 나온 '리타니'의 정의를 볼 것.

"리타니: 반복, 음악 작곡의 원칙. 리타니, 음악이 된 말. 나는 소설이 명상적 구절들에서는 가끔 노래로 바뀌기를 바란다. <농담>에는 우리 집(chez moi)이라는 단어로 이루어진 리타니 문단이 있다. 그런데 첫 번째 불역 판에서 반복된 단어들은 모두 비슷한 말로 대체되었다. 동의어는 텍스트의 음악성뿐만 아니라 의미의 명증성까지도 파괴해 버린다." (소설의 기술 180p) 

(2). 꿈

경계를 확실히 해야 할 거 같다. 쿤데라를 매혹한 꿈적인 상상력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자신이 선택한 방법은 하나라고 말이다. 한쪽에는 카프카적 상상력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루슈디와 마르케스의 열대적인 상상력이 있다. 쿤데라 그 자신이 따르는 상상력은 카프카의 것으로, 카프카의 상상력은 최초로 "소설 예술에서 사실임 직하지 않음을 정당화"한 상상력이다.(배신당한 유언들 47p) . 그것은 "이성의 통제에섯 벗어난 상상력, 그럴듯함에 대한 조바심에서 벗어난 상상력이 이성적인 사고로는 접근할 수 없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서술이다. "<성>에서 K가 프리다와 처음으로 사랑을 하는 그 놀라운 부분이나 그가 초등학교 교실을 자신과 프리다와 두 조수의 침실로 바꾸는 부분을 보세요. 카프카 이전에는 그처럼 밀도 높은 상상력은 생각도 하지 못했죠." (소설의 기술 120~121p) 쿤데라는 카프카처럼 "통제되지 않은 상상력"을 "실존에 대한 유희적 탐구여야 하는 소설"에 통합시키고자 했고, 그 결과가 "다성적 대립"이다. (소설의 기술 120~121p) 다성적 구성에 관해선 <소설의 기술> 110~114p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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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 사고, 시간
(쿤데라의 소설 속 사고와 시간은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해서 같이 얘기하겠다)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쿤데라는 무질과 브로흐가 "인간이라는 존재를 밝혀 줄 수 있는 모든 수단, 합리적이거나 비합리적인, 서술적이거나 명상적인 것을 막론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고, 그 수단은 "소설을 가장 지적인 종합체"로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소설의 기술 30p) 여기서 지적인 종합체로써의 소설은 백과사전적 소설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무질과 브로흐의 소설은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의 <늦여름>에서처럼 지질학, 식물학, 동물학, 건축 등 다양한 학문적 지식을 전달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오직 소설만이 찾아낼 수 있는 것을 추적하기 위해, "모든 지적 방법과 시적 형식들을 동원"할 뿐이다. (소설의 기술 98p) 나는 여기서 그 방법에 대해 상세한 분석까지는 못 해도 조금이나마 논해보고자 한다.
브로흐는 끝내 자신의 소설이 '심리 소설'이 아님을 역설했다. 심리 소설이 아니라는 건 인간의 내면을 포착하기를 그만둔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내면의 무한함에서 눈을 돌려 외부와의 접촉 속에서의 인간적 상황을 추적한다는 의미다. 쿤데라가 보기에 이러한 전환은 카프카에 의해 이루어졌다.


"새로운 지향, 프루스트 이후의 지향을 펼친 사람은 바로 카프카예요. 그가 자아를 생각하는 방식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죠." (소설의 기술 43p)
카프카의 소설에서 인물의 자아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규정지어진다. 그의 소설 속 인물은 모두 상황에 묶여있다. K를 개별적인 존재이게끔 하는 건 "그의 신체적인 외모(전혀 알려지지 않았지요.)에 의해서도 아니고, 개인적인 이력(우리는 이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에 의해서도 아니고, 그의 이름(그에게는 이름이라고는 없습니다.)에 의해서도 아니고, 또 그에 대한 추억이나 버릇, 콤플렉스에 의해서도" 아니다. (소설의 기술 43p)
그렇다면 K의 존재는 어떻게 규정되는가? 그의 내면적 생각에 의해서다. 카프카는 끊임없이 자신의 인물들의 내면을 뒤쫓는다. 하지만 여기서 기존의 심리 추적과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K 본인이 인지한 내면적 동기가 더 이상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과성의 법칙에서 벗어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소설의 기술> 3부에서 쿤데라는 이러한 인과성의 법칙에 대해 다시 한번 논한다.
"옛날 소설가들은 삶이라는 기이하고도 혼란스러운 재료에서 명징한 합리성의 실마리를 찾아내려 애썼다. 이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행위를 만들어 내는 것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동기며, 하나의 행위는 다른 행위를 유발하는 것이다. 또 모험이란 명백히 인과적인 행위들의 연쇄다." (소설의 기술 88p)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고통>에서 베르테르는 친구의 부인을 사랑한다. 그런 그는 친구를 배신할 수도 없고 자신의 사랑을 부정할 수도 없다. 결국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한다. 베르테르의 선택은 합리적이며, 인과관계가 명료하다. 그러나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는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가? 쿤데라에 의하면 톨스토이는 인물의 선택에 따라붙는 비합리성의 잔재를 추적한 (거의) 최초의 작가다. 안나는 브론스키를 마중하러 나오지만, 갑작스러운 충동으로 기차 밑으로 몸을 던진다. 사실 이런 돌연한 충동은 갑작스럽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스쳐 지나가는 충동, 파편적인 생각들의 미묘한 얽힘 속에서 탄생한 선택이니 말이다. 쿤데라는 톨스토이의 이런 통찰이 준 영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톨스토이를 참조함으로써 브로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리는 결정에서 비합리적인 것이 맡는 역할에 대한 탐구'라는, 유럽 소설의 위대한 탐구의 맥락 속에 자리 잡게 된다. ( 소설의 기술 90p)
브로흐가 이러한 '비합리적인' 요인들을 탐구하는 방식은 쿤데라 본인이 든 예시를 통해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파제노는 루체나라는 체코 창녀에게 드나든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엘리자베트라는, 그들과 같은 계층에 속한 아가씨와의 결혼을 주선한다. 파제노는 조금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그녀에게 마음이 끌린다. 바르게 말하면 그의 마음을 끄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가 표상하는 모든 것이다. 처음 그녀를 만나러 가는 날, 그녀가 사는 동네의 길과 집과 정원들에서는 '섬나라 같은 훌륭한 안정감'이 넘친다. 엘리자베트의 집은 '친밀감의 보호 아래 깃든 안정감과 부드러움'의 행복한 분위기로 그를 맞아 준다. 그 친밀감은 언젠가는 '사랑으로 바뀔 것'이며 '또한 사랑은 언젠가는 친밀감으로 식어 버릴 것'이다. 파제노가 바라는 가치(가정의 안정감)는 (모르는 사이에, 본성을 어기고서라도) 이 가치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될 여자를 보기도 전에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소설의 기술 91~91p)



브로흐의 파제노는 보수적인 가치를 고수하는 청년으로 그가 가진 감정은 이런 식으로 복잡미묘한, 알아차리기 힘든 메커니즘에 의해 형성된다. 쿤데라 본인도 이런 식으로 인물들의 내면을 추적한다. 다만, 그는 그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실존적 약호"에 의해 이런 방식을 구사한다. (소설의 기술 48p) 파제노처럼 상대방을 만나기도 전에 상대방에 대한 이미지를 만드는 인물이 쿤데라에게도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프란츠가 그런 인물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마리클로드가 프란츠에게 절박하게 고백하자, 프란츠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녀와 결혼하기로 선택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내재된 여자를 존중하리라" 다짐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54p) 무슨 말인가? 왜 프란츠는 여자가 아닌 그녀에게 내재된 여자를 존중하려 하는가? 쿤데라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안에 깃든 여자란 다름 아닌 프란츠의 어머니이며, 프란츠는 어린 시절 봤던 어머니의 애잔한 모습을 깊이 마음에 두고 살아왔다고. 그래서 마리클로드가 그에게 고백했을 때 프란츠가 본 건, 지켜줘야할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쿤데라는 이것을 과거의 우물이라 부른다. 그는 더 이상 인물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행위도, 내면생활도, 사상들도, 세계관도 (도스토옙스키의 방식)도 아니라고 한다. (토마스 만이 발견한 대로) 우리를 조종하는 것은 오로지 "격세유전하는 원형들", 까마득히 먼 옛날의 습관들"이라 한다. 이어서 그는 만의 말을 인용한다.



"만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자아는 옹색하게 한정되어 있고 자신의 일시적인 육체적 한계들 속에 완전히 갇혀 있는가? 하지만 그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이 그에 선행하는 외부 세계에 속하는 것들 아닌가? (중략) 예전에는 일반적으로 정신이라고 하는 것과 개인적 정신 사이의 구분이 요즘처럼 강력하게 사람들에게 강요되지는 않았다.'
또 이렇게도 말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모방 혹은 연장이라 명명하고 싶은 한 가지 현상에 직면했는지도 모른다. 기존의 특정 형태들, 말하자면 선조들이 세워 놓은 특정 신화적 도식들을 되살려 그것들을 환생시키는 것이 개개인의 역할이라고 보는 그런 인생관에 말이다." (배신당한 유언들 22p)

맨 처음에 쿤데라에게 있어 사고가, 정확히는 무질과 브로흐의 사고가 역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시로 <몽유병자들>에서 브로흐는 에슈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그를 역사속 인물인 마르틴 루터와 비교한다. 사람들은 흔히 한 인물의 뿌리를 그의 유년 시절에서 찾는 데 반해, 브로흐는 역사 속에서 찾는다. 쿤데라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브로흐에게 인물은 모방할 수 없는 존재, 스쳐 가는 유일성, 사라질 운명의 기적적인 한순간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루터와 에슈, 과거와 현재가 서로 만나는 시간 위에 세워진 튼튼한 다리로 구상되었다. <몽유병자들>에서 브로흐가 소설의 미래 가능성을 미리 그려 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역사철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보는 새로운 방식(여러 세기들의 하늘 아래에서 인간을 보는 방식)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의 기술 84p)



인간을 보는 새로운 방식은 한 인물의 과거만을 반영하는 식으로 (앞서 본 프란츠처럼) 나타나기도 하지만, "유럽의 시간이라는 집단적 수수께끼"로 영역을 확장하기도 한다. (소설의 기술 31p). "볼테르의 신랄한 정신을 바탕으로 자라는 공산주의의 화신인 루드비크, 민속으로 전승되는 가부장적 과거를 재건하려는 욕망으로서의 공산주의를 구현하는 인물 야로슬라프, 그리고 복음서에 접목된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구현하는 인물 코스트카와 호모 센티멘탈리스 열정의 원천으로서의 공산주의를 구현하는 헬레나"처럼 말이다. (배신당한 유언들 24p) 이렇게 상이한 역사적 시기들을 한데 모으는 것을 쿤데라는 시간의 부름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적 융합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브로흐와 무질적 사고에 의해서만 구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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