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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안영옥 번역 열린책들)


옛날부터 꼭 읽어야지 했는데 책 두께가 가져다주는 진입 장벽 덕분에 시도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이북 리더기를 사게 되었고 병크24 이슈 덕에 무료로 크레마 클럽 가입한 뒤 책을 읽게 되었다. 확실히 이북 리더기로 읽을 때는 책의 두꺼움이 주는 불편함이 상당히 완화되는 듯하다. 


 고전 소설을 재밌게 읽는 사람들은 많다. 애초에 어느정도 재미가 있으니까 고전으로 남은 것이지만. 아무튼 이러한 재미는 몰입에서 오는 재미, 인간 및 철학에 대한 통찰력에서 오는 재미, 배경 및 설정 묘사에서 오는 재미 등등이 꽤나 많다. 그렇지만 단순히 웃겨서 오는 재미의 비중이 큰 고전 소설은 흔하진 않을 것이다. 비극이 보편적인 감성을 노리기 상대적으로 쉬운 반면 코미디는 시대와 장소, 언어를 상당히 타기에 보편적인 웃음을 주기는 힘들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고전 소설이 아닌 다른 매체(만화, 드라마, 영화 등등)를 봐도 코미디는 시대가 지나면 주는 재미가 반감되기 쉽다.


 그렇지만 돈키호테는 확실히 재미가 있었고 그러한 재미에서 코미디적 상황에서 벌어지는 웃음이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높았다. 서문부터 웃음을 주려는 작가의 의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만물은 자신과 닮은 것을 만든다는 자연의 순리를 저 역시 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재주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제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낸 수 있겠습니까?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하는 잡다한 망상에 휩싸여 제멋대로 사는, 주름투성이에 삐쩍 마른 작자가 온갖 불편함이 자리를 잡고 모든 슬픈 소리가 거주하는 감옥에서 탄생시킨 이야기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흔히들 책 앞에 붙이는 서문이니 소네트니 경구니 찬사 같은 목록이나 수두룩한 장식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당신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었습니다. 이 책을 쓰는 데 힘이 들긴 했지만, 실은 당신이 읽고 있는 이 서문을 쓰는 게 가장 힘듭니다..... ] 


 서문부터 확실히 이 책이 어떠한 분위기일 지 짐작이 갔고 상당히 쉽게쉽게 읽혀졌다. 몇백년전 거의 지구 반의 반바퀴에서 발간된 책이 현대의 독자한테도 큰 웃음을 줄 수 있다는 점이 상당히 신기했다. 사소한 설정 오류, 이야기 전개와 전혀 상관없는 극중극 등의 문제도 오히려 작가의 인간미를 드러내 헛웃음을 짓게 해줬다. 목차마저도 상당히 재밌게 구성되었는데 예시를 들자면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할 수 없이 끌려가는 수많은 불행한 사람들에게 돈키호테가 베풀어 준 자유에 대하여]가 있다. 저 목차의 제목만 보면 노예 해방시켜주는 정의로운 기사 얘기로 들리지만 실상 돈키호테가 호송되는 죄수들 지멋대로 해방시키고 통수당하는 전개다. 이런 식으로 돈키호테 및 상황을 훌륭하게 비꼬는 제목 때문에 목차만 봐도 어떠한 내용이였는지 잘 기억이 난다. 인터넷 커뮤식으로 말하자면 안 본 사람은 이해 못하고 본 사람은 납득하는 요약이랄까


 재밌던 이야기를 꼽자면 극중극을 제외하고 전부 재밌어서 고르기 힘들지만 [죽은 목동의 절망에 찬 시들과 예기치 않았던 다른 사건들에 대하여]가 인상 깊었다. 일본 추리소설 제목 같은 목차지만 실상은 한 목동이 엄청 예쁜 여자 목동 짝사랑하다 상사병으로 자살하고 여자가 비난받다 참다못한 여인이 항변하던 얘기였다. 저 새끼가 나를 사랑하는 것도 자유듯이 내가 저새끼를 안 사랑하는 것도 자유인데 왜 나한테 지랄하냐 같은 내용이였는데 많은 연애프로그램 참가자들이 생각나던 구절이였다.


 내용 전반적으로 인상깊었던 요소는 주인공과 판초만 비정상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보통의 소설들은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미친놈이거나 진중한 경향이 강한데 여기 등장인물들은 주인공과 판초가 터트리는 민폐에 봉변을 당하거나 아니면 사고치는 것을 유도해서 그걸 즐기는 경향이 있다. 착해서 그 둘을 도와주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래도 둘이 미친놈인 것은 인지하고 그에 맞춰 구라를 섞어가며 도와준다. 분명 군상극이 아닌 주인공 위주의 소설이지만 조연들의 행동을 보는 맛이 상당히 쏠쏠했다. 


 돈키호테가 주는 코미디적 재미 위주로 후기를 남겼는데 그렇다고 다른 고전에서 보여주는 등장인물의 깊이나 구성의 정교함, 사유의 수준 등이 낮은 것은 절대로 아니다. 애초에 코미디는 캐릭터성과 연출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 아니던가. 오히려 현대 작가가 근대를 배경으로 썼다고 오해 가능할 만큼 굉장한 완성도가 느껴지는 소설이다. 돈키호테와 판초는 불멸의 콤비고 돈키호테의 궤변은 지금도 흥미롭다. 이러나 저러나 내가 성인되어서 읽은 소설중 가장 재밌게 읽은 소설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