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이 글은 도서관 독후감공모전에 낼 목적으로 쓴 글이다. 그래서 좀 있어보이게 쓰려고 노력했다.
그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감상을 말하자면 딱 표지스러운 내용이다. 제목만 보면 다 본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표지에서는 "적자생존은 틀렸다!"이딴 소리를 하는데 내용에서는 "인간이 적응한 방식은 다정한 것" 정도의 뉘앙스다.
----시작----
유럽에 도래한 계몽주의의 시대 이래로 철학은 한 가지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인간성의 토대 위에 도덕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신학적 체계를 거부하고 인간성의 토대 위에 도덕을 비롯한 정치체, 정의 등의 가치를 정초하고자 했다. 문제는 그러한 기획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다수결이라는 힘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는 것이 폭로되었다.
계몽의 시대가 끝난 후 소위 인간적 도덕주의라 부를만한 이것은 자식을 낳았다. 그중 하나를 과학적 도덕주의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같은 생물학, 고생물학, 인류학과 같은 과학 분야는 진화론에 기초하여 도덕의 정당화를 시도했다. “우리는 이러한 진화적 과정을 거쳐 이렇게 진화해 왔다. 따라서 우리는 이에 맞게 이러한 도덕법칙을 따라야 한다”라고 간접적으로 주장한다. 이러한 과학적 도덕주의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사실로부터 가치가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물질의 기본 운동은 정지다”라고 했을 때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고정된 진리가 존재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하지만 뉴턴이 “물질의 기본 운동은 등속직선운동이다”라고 했을 때 이것은 물리학적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뉴턴역학은 철학의 이야기를 바꾸는 변화를 초래했지만, 이것은 철학의 문제였지 과학의 문제는 아니었다. 우리는 진화생물학의 발전을 통해 도덕법칙은 정초할 수 없다. 우리가 생물학적 기전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면 문명은 존재할 수 없다. 문명은 본성을 억제하는 방법을 배움으로서만 성립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과학적 도덕주의의 형제인 우생학이다. 미국과 독일의 의사들, 이탈리아의 범죄학자들은 인간의 형질에 따라 누가 범죄자가 될지, 누가 우수한 인종인지, 누가 번식하고 살아남아야 하는지 합리적으로 결정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그 결과를 역사의 교훈으로써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노동은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
다행히 저자는 우생학에 대해 경계한다.
“우리의 본성 가운데 어두운 부분은 하나하나 제거하고 바람직한 형질만 살려 번식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안타깝지만 이런 생각은 으레 우생학으로 통하게 되어있다” - 저자 -
비록 사실에서 가치를 도출하는 논리적 우를 범했지만, 그것이 과격한 방법으로 실현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저자의 방식은 설득이다. 그럼에도 우생학과 과학적 도덕주의는 형제이고 쌍둥이다. 이들은 사실에서 가치를 도출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약자를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문제를 갖고 있다. 우생학은 비교적 명확하게 작용한다. 과학적 도덕주의는 후술하겠지만 보다 은밀하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명백히 과학적 도덕주의에 해당하는 책이다. 저자는 인간이 스스로 사회성이 높고, 서로 협력하고, 보살피는 존재로 만들어왔고, 그러한 다정함이 적용되는 내집단의 범위를 확장해 온 역사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말은 일견 타당하다. 현재 인간은 ‘감정적으로 교류하는 가축’을 만들고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유일한 종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간은 외집단은 제거하고, 자원을 독점하고, 무기를 발전시켜 온 역사를 갖는다. 사실로부터 가치를 도출할 수 없는 이유는 사실을 취사선택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인간의 ‘자기가축화(사회성이 높아짐으로써 생기는 외형, 내적 특성의 변화)’의 특성을 인간이 다른 인류종으로부터 분화된 후 수협채집 사회에서 발전한 것으로 본다. 그 후 농업사회에 진입하고 집단의 크기와 자원의 양이 많아지면서 독재적 특성이 발현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이것이 유목민족의 역사와 괴베클리 테페 연구와 정면충돌한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루소적 자연 상태의 문제는 이를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은 보노보의 친척이면서 침팬지의 친척이다. 저자는 인간종의 족보를 찢어 침팬지와의 연결점을 부정하는 것 처럼도 보인다. 이러한 주장은 어떤 성격을 갖을까?
저자의 주장대로 우리가 다정함을 갖도록 진화해 왔다고 해서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건 아니다. 내집단 범위를 넓혀왔기 때문에 민주주의자는 독재를 옹호하는 사람은 내집단으로 포함시켜야 하나? 사람은 사람 잡아먹는 호랑이를 집에 들여야 하나? 이런 과학적 도덕주의는 정치적 주장이나. 리처드 도킨스가 전투적 무신론을 주장하며 미국 내 기독교 진영을 공격한 것은 그러한 맥락에 위치한다.
이러한 논의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생물학적 기전을 우리가 좋은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나?” 그 말은 맞다. 하지만 그러려면 이 책의 분류는 교양 과학, 인문 교양이면서 정치여야 한다. 이 책의 8장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진화인류학의 탈을 쓴 (미국인에 대한) 정치 프로파간다이다. 진영논리에 매몰된 저급한 프로파간다는 아니다. 진영과 무관하게 설득과 같은 평화적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는 가여운 비둘기의 울음소리다.
이러한 기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 과학적 토대 위에 도덕률을 정초할 수 있을까? 지난날의 시도는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비판마저 가해진다. “당신이 말하는 평화적 방법은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약자를 억압하는 건 아닌가?” 우리 독립 투사들은 스스로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했다. 역사적으로 테러는 약자의 방법론이었다. 폭력은 정치적 발언의 최후의 보루다.
물론 약자의 목소리가 정의의 언어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도덕을 정당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화상대주의 또는 다양성이라는 것을 도입했다. 답을 알 수 없으니까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은 원칙은 약자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이조차도 주어지지 못하는 약자에게서 폭력마저 빼앗는 것은 약자에 대한 철저한 억압으로 작용할 수 있다. 폭력으로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은 누구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공허한 메아리다.
저자는 인간화/비인간화를 통해 상대 집단에 대한 반응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말 그대로 내집단은 사람이고, 외집단은 사람이 아니다. 흑인 백인 외에는 열등종이라고 했던 것처럼. 나와 남을 가르는 기준은 ‘우리’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구성하는가의 문제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기 때문에 모두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하지만 그 방법을 찾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검토해 볼 때 다양한 사람들은 결속한 고대 로마제국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서유럽에서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지역에까지 걸친 거대한 제국에서 다양한 지역에서 황제와 원로원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가치를 나누지 않았다. 이해관계를 공유했다. 서로 다투고 빼앗고 죽이기도 했지만, 로마라는 틀을 공유했다. 그렇게 평화를 지킬 수 있었다. 물론 천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외적과 싸웠고, 결국은 무너졌다. 어쩌면 저자는 불가능한 이상을 주장하는 것 같다.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이라는 책을 써서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에 대한 밑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 그러한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는 이제껏 존재한 적 없고, 지금도 존재하지 않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 그는 계몽주의 철학자로 분류되면서도 계몽주의의 기획이 실패할 것이라는 걸 예고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학적 도덕주의는 실패할 것이다. 다정한 것만이 살아남지 않았다. 보노보와 마찬가지로 침팬지도 살아남았다. 만약 환경이 더 척박해진다면 보노보는 살아남을까? 인간은 살아남을 것이다. 외집단을 배척하고 자원을 독점하는 방식으로 쿼카가 키위새와 달리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정한 인간을 만났느냐, 잔악한 인간을 만났느냐의 차이뿐이다.
마치면서 과학적 도덕주의는 인간적 도덕주의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점이 있다. 그것은 평화의 메시지다. 대부분의 사람은 평온한 지금의 삶을 지키려 할 뿐이다. 오직 생존을 위해 현상 변경이 강요되는 소수의 인간만이 폭력을 택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소수의 사람이 마주하는 억압을 인지하지 못한다. 식민지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받던 억압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조선인 하인들에게 다정했을 것이다. 거대한 폭력의 구조속에서 다정함은 도덕이 아니라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다.
니체가 말했듯 도덕의 현대적 형식은 비도덕주의다. 기존 도덕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변를 추구하는 것만이 도덕주의의 현대적 형식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답을 알 수 없어도 괜찮다.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를 바라지 않아도 괜찮다. 문제가 해결된 상태를 바랄 수 없어도, 문제가 해결되어 가는 과정 속에 놓일 수는 있다. 이 끊임없는 과정 그 자체가 도덕이다.
과학은 답을 줄 수 없다. 당위는 사실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일단 마주 보고 입을 열어야 한다. 다정한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고성과 비난이 오가더라도, 우리는 대화해해야 한다. 세계시민을 꿈꾸던 철학자들과 평온한 삶을 꿈꾸는 난민들과 정치적 반대자를 적으로 보는 모든 사람이 하나의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가능성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 아킬레우스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거북이의 뒷모습을 쫓으면서 바랄 것이다, 거북이와 마주 보고 싶다고.
나같은 히키모솔아다는 번식탈락이 답이라는 그런 이야기인가요
표지 짤 보니까 3대 500찍을 덩치네. 어떻게는 살아남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