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고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다"라는 말들을 한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은 무척이나 자기 중심적이어서 데일 카네기는 "심지어 수감된 죄수들도 자기들은 선량하다고 생각"한다며 그걸 인간관계에서 항상 염두해두라고 말했다


다행히 인간에겐 공감이라는 능력이 있다. 거울뉴런에서 비롯되는 이 감각은 영장류는 대부분 가지고 있고 일부 무리생활을 하는 척추동물 역시 가지고들 있단다. 우리는 타인인 신발을 신어봄으로서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고 타인 역시 나만큼이나 복잡하며 나 역시 타인만큼이나 나쁘다는 걸 깨닫는다.


문학은 우리의 한계를 너머 타인의 신발을 신게 해주는 유용한 방법이다. 푸익의 소설을 읽으며 어설프게나마 동성애자의 마음을 알았고 아프리카인들의 비통함을 치누아 아체베를 통해 배웠다. 솔제니친에게서 시베리아의 혹한을, 카잔차키스에게서 자유로운 삶을, 위화에게서 중국 빈민의 고단함을 읽었다. 입센의 글을 넘는 여성주의 문학을 모르며, 해리엇보다 나은 흑인 문학은 몇이나 존재할까.


한국 소설들도 그랬다. 지금은 조롱거리로 전락했지만 신경숙은 내게 어머니의, 그녀들 역시 젊은 시절이 있었음을, 한 때 내 아비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했던 적도 있었음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알게했다. 김승옥이 묘사하는 인물 내면은 1960년대가 배경임에도 우리와 같음을, 그리하여 지금의 노인들이 젊었을 때 우리와 같았음을, 우리의 미래 역시 그들과 같음을 짐작하게 했다. 


그러나 요즘 문학은, 특히나 한국 문학은 읽지 못하겠다. 모두가 자기연민과 피해의식에 쌓인 세상이라 피해자행세(victimhood)가 권력으로 작동하는 문화에서, 문학은 이에 저항하거나 이를 전복하지 않고 이에 복종하며 확산시킨다. 문학은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고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다"를 해소하지 않고 강화한다.


젊은 작가-40줄의 그녀를 젊다고 하기엔 민망하지만 어쨌든 중위연령 아래이니-중 유일한 예외는 최은영이다. 그녀의 글 아래서 마냥 악역은 없고 언제나 우리가 그렇듯 모두가 이유가 있으며 모두의 신발을 신게 해준다. 그러니까 한국 젊은 작가를 읽으려면 최은영만 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