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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일부러 사 모은 적 없습니다.
그냥 읽고싶은 책을 사 읽다보니 쌓인 것이죠.
가족 모두가 책 읽기를 즐기고 특히 어머니께서 독서량이 많으셔서,
책을 사 읽으면 어느 사이에 일가족이 돌려 읽곤 하여서...
기왕 읽을 것이면 책을 사서 읽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여기에는 문제가 딱 하나 있었는데,
어머니께서는 무협과 하드보일드 추리물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추리는 홈즈, 뤼팽, 브라운 신부 시리즈 정도만 허락 가능한 범위였죠.
SF 팬터지는 어머니도 좋아하셔서 자유롭게 사 읽고 가족들이 돌려 읽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지간한 국내문학이나 세계문학, SF 팬터지를 섭렵하다시피 읽어왔는데,
무협과 추리는 거의 읽지 않거나 몇 편 주어다 본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쪽 책들을 마음놓고 사 읽기 시작한 것은 결혼하고 분가해 나온 이후였습니다.
  
김용 무협을 제대로 읽기 시작한 것은 2013년부터입니다.
영웅문 시리즈와 대륙의 별(천룡팔부) 등은 중학교 시절 학교에서 친구들과 돌려보면서 조금 읽긴 하였는데,
아무래도 책을 사서 마음놓고 읽고 또 마음에 들면 여러 번 보는 습관이 있는지라...
제대로 읽은 것은 무협을 사 읽은 이후부터라고 하겠죠.
김용 책들은 마음에 들어서, 짬날 때나 다른책 읽다가 지쳤을 한 편씩 사서 읽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요 장편은 거의 다 읽은 셈이 되었습니다.
위 짤방의 사진는 2013년 5월부터 2019년 6월까지 대략 6년동안 사 읽은 김용 무협인데,
비호외전을 제외하면 거의 다 사 읽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김용 책 중 가장 높게 평가하는 작품과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다릅니다.
가장 즐겁게 읽은 책은 영웅문 시리즈 3부에 해당하는 의천도룡기였고, 영웅문 버전부터 여러가지 버전으로 읽었습니다.
여러 버전마다 세밀한 내용이 좀 달랐고 김영사에서 나온 최신본이 오히려 더 어색한 개작인 된 듯한 면도 있었지만,
그래도 서유기를 번역했던 임홍빈 선생 번역은 다른 판들보다 압도적으로 좋았습니다.
의천도룡기는 그렇지 않아도 김용 장편 중 읽는 재미가 가장 잘 살아있는 작품이라고 여겨지는 데,
임홍빈 선생은 번역을 참 감칠맛나게 잘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시중에서 소오강호가 여러 번 재출간되고 있는데도, 임홍빈 선생이 번역한 아 만리성 판본이 수 십 만원에 거래되는 이유가 되겠죠.
  
가장 높게 평가하는 작품은 녹정기입니다.
작가의 마지막 책이고, 사실상 무공으로 활약하는 주인공을 그리는 무협이라는 장르의 본질을 죄다 깨버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무협은 글자 그대로 주인공의 무공과 협기어린 행동을 통해 독자에게 대리만족을 주는 장르인데,
본래 김용은 나름의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더라도 이러한 무협의 본질적 특징은 잘 지키던 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녹정기에서만큼은 주인공이 아예 수련을 싫어해서 무공 실력 자체가 끝까지 사실상 없다시피하고,
주인공의 성격 역시 협기는 커녕 거짓말과 잔꾀, 지독한 이기심으로 가득한 상당히 대책없는 악인이어서,
모든 문제를 눈치와 잔꾀, 중간 이간질, 거짓말로 해결하는 주인공의 사악한 활약으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무협 작가가 무공도 협기도 다 내버린 주인공을 내세워 자신이 평생 추구한 작품 속의 가치를 다 뒤집은 책을 쓴 셈인데,
이렇게 자기 스스로 지금까지 쓴 책들의 메인 메시지를 전부 부정하는 용기를 보이면서... 극적인 안티테제를 만들어 냅니다.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를 쓰던 르 귄이 3부 머나먼 바닷가 이후 4부 테하누에서 마법을 잃고 노인이 된 주인공을 내세우면서
지금까지 추구하던 가치를 전부 부정한 것이 매우 큰 설득력을 가졌던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높게 평가하는 신조협려, 소오강호는 개인적으로 잘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읽는 재미는 살아 있는데, 뭔가 공감이 잘 안되더구요.
특히 은근이 팬이 많은 신조협려는 제게 있어 가장 시시하고 난삽한 느낌이었습니다.
신조협려, 소오강호는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작품이라는 세평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천룡팔부는 절정부는 참 재미있는데, 지나치게 늘어지는 면이 있어서 그게 좀 마음에 안듭니다.
작가의 초기작인 청향비(서검은구록), 벽혈검, 설산비호 등은 압도적인 면은 없지만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소품인데,
이러한 소품들은 사조영웅전에서 의천도룡기, 천룡팔부, 소오강호 등 대장편들과는 전혀 톤이 다르지만 나름 매력이 있습니다
  
위 책들은 모두 헌책방에서 샀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모두 사실상 새책을 샀습니다.
청향비(서검은구록) 정도만 절판된지 오래된 책이라 변색이 좀 있었지만, 창고에 보관된 것인지 새책이더군요.
헌책방 돌아다니다가 한 질씩 눈에 들어오면 사 읽은 셈인데...
김용에 길들여지다보니, 다른 무협으로 적응이 잘 안되는 게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