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딩굴던 지성채집이라는 책을 보니 \'환각의 다리\'라는 그의 소설이 실려 있었다.
1969년에 발표된 소설인데 이어령이 1960년대 중후반엔 소설을 제법 많이 쓴 것 같다.
장군의 수염, 무익조, 암살자 이런 소설들을 썼는데 문단에선 반응해주지 않은 모양이다.
이어령이 하도 문단과 작가들을 신랄하게 까댄 사람(물론 재능있는 작가들을 열심히 돕기도 했지만)이라 문단은 이어령의 소설에 침묵과 무시로 대응한 것 같다.
이 소설은 \'스탕달의 <바니나 바니니>의 사적 번역\'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고
스탕달의 소설 \'바니나 바니니\'를 읽어나가는 1960년대 초반을 사는 여대생(이화여대 불문과로 추정됨) \'최사미\'가 주인공임.
그녀는 잘 나가는 외과의사의 딸이고 효자동(그 당시 효자동이 부촌이었던 듯)에 사는 부잣집 딸
아버지는 그녀를 의대생 김석훈과 결혼시켜서 자기 병원을 물려주려고 하고
정작 딸은 속물 중의 속물인 김석훈을 미워한다.
그러다 419가 나서 경찰에게 얻어 맞아 피투성이가 된 전현수(S대 수석입학생인데 집안은 가난)이 최사미 아버지의 병원에 입원하고
최사미가 전현수에게 반하게 되고 516도 겪게 된다는 이야기
바니나 바니니의 스토리가 조금씩 소개되고(1), 바니나 바니니 강독을 하는 불문과 교수 K의 강의(2)와 최사미와 전현수의 연애담(3) 이 3개가 갈마들며 소설이 전개된다.
50년전 소설치고는 참신한 형식에 문장도 훌륭하고 대화와 작가의 사변도 쫄깃하고 세련됐음. 촌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
다만 이어령의 유창한 사변을 집어넣으려다 보니 약간 장광설로 흘러가기도 한다.
그리고 1960년대 소설,영화가 대부분 그렇듯 인물의 대사들이 약간 연극조라 지금 읽기엔 약간 유치한 면이 있다.
그러나 확실히 세련미가 있고 사유와 상징이 훌륭하다.
1960년대의 풍경과 그 시절 사람들의 정신세계 묘사도 일품.
사미라는 묘한 이름은 삼수변 붙은 모래 사자에 아름다울 미라고 하는데(최사미와 전현수의 대화에 나옴)
격동의 바다(애정의 바다, 역사의 바다, 이타주의의 바다)와 안정적 육지(아버지와 김석훈의 세계) 사이에 끼여서 정신적 탐구를 계속하는 최사미의 영혼을 상징하는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제목 \'환각의 다리\'는 메를로 퐁티의 책에 나오는 개념인데 다리가 잘린 사람은 한동안은 자기 다리가 그대로 있는 듯 감각한다는 그런 거고
김석훈이 최사미에게 늘어놓는 설교에도 나오고, 최사미와 전현수의 대화에도 나오고, 최사미와 K교수의 대화에도 나온다.
김석훈,최사미,K교수가 이 개념을 각각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는게 포인트.
한줄 결론 - 이어령은 소설도 잘 쓰더라
군대에서 디지로그 재밌게 봤었는데 ㅋ 소설도 쓰셨네
제목 멋있네 그 다리가 아니고 그 다리구나
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