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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와 자연선택이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자리잡은지 오래 되었지만, 사실 이 두 개념은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잦은 구설수에 올랐다. 그것이 사회진화론 같은 사회학적 오남용이나 창조론 같은 비과학적 논쟁 탓은 아니다. 문제는 진화 그 자체에 있는데, 자연선택이 기본적으로 정량적 근거를 제시하기 힘든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찰스 다윈이 비글호 항해 이후 연구를 통해 남긴 저작 이래 진화는 늘 가설의 위치에 있었으며, 분자생물학이 생물 간 유연관계를 파악하는 시기까지도 자연선택의 정량적 검증은 매우 모호했다. 다윈 본인부터가 자연선택 과정이 매우 느리게 진행되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화석에서나 관측 가능한 것이라고 보았고, 다른 생물학자도 생각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변이의 수준을 측정하는 단위인 1다윈부터가 변이의 수준을 백만 년 기준으로 나눈 것이고, 현대에 번식하는 생물종을 근거로 자연선택을 증명하는 시도는 반박될 만한 요인이 너무나 많았다. 자연선택은 생물학자가 막연하게 동의하는 전제일 뿐, 그 이상 분명해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70년대에 상황이 바뀌었다. 그 철저한 지리적 격리로 인해 진화론의 요람 역할을 하는 갈라파고스 제도의 한 섬, 다프니 메이저에서 피터와 로즈메리 그랜트는 이 섬에 서식하는 모든 핀치의 종별 개체수, 먹이, 번식 등을 헤아려 수치분석을 진행했고, 그 결과 자연선택을 증명할 뿐 아니라 자연선택에 대해 갖고 있던 일반적 통념을 완전히 박살낼 만한 여러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핀치의 부리>는 이 부부의 연구와 그 전체적인 선후관계를 종합하는 책으로, 다윈이 진화론을 주장하던 당시 다윈 본인을 포함한 사람들의 통념이 어떤 가정에 매여 있었고, 이것이 어떻게 점차 보완되거나 파괴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생물종을 개체 한 마리 한 마리가 아니라 전체적인 수의 관점에서 봤을 때에야 비로소 보이는 집단의 여러 법칙을 설명한다. 이를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면, 물질을 구성하는 분자가 그렇듯, 일정하게 유지되는 듯한 종의 통일성은 기실 그 밖으로 벗어나는 개체의 죽음으로 구성되는 종형 곡선에 가깝다는 것이다. 변이와 자연선택의 작용은 느려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각보다도 훨씬 빠르고 강력하게 이뤄져서 보이지 않는다.
핀치의 종분화는 특이했다. 같은 섬 안에서 부리의 크기나 두께, 비행 여부 등으로 큰 틀에서 세 부류로 구분되는 종이 공존하는데, 날아서 벗어날 수 없는 한 좁은 섬 안에 살고 있는 이상 지리적 격리가 종분화의 원인일 이유는 없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주로 섭취하는 먹이가 서로 다르다는 정도인데 사실 그나마도 이따금 먹이가 서로 섞이는 등 분명한 차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우기 이후 먹이가 부족해지는 건기가 찾아오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씨앗 하나하나마다 극심한 경쟁이 이어졌고, 각각의 핀치는 자신이 가장 쉽게 먹을 수 있는 먹이를 주로 먹어야 했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 있는 씨앗을 꺼내는 데에, 조금 더 단단하게 감싸여 있는 껍질을 부수는 데에 노력이 더 들어갈수록 그 핀치가 생존할 가능성은 낮았고, 심지어 섬 안에 있는 씨앗의 종류가 그리 균등하게 분포하지도 않았다. 대몰살의 시기 이후 생존한 핀치를 헤아려보면 그 결과는 놀라웠다. 섬에서 먹을 수 있는 먹이의 종류에 따라 이 먹이를 먹기에 가장 적합한 특정 핀치 개체군이 저마다 하나씩 있었고, 이 개체군의 크기나 부리 형태에서 아주 미세하게, mm 단위로 벗어난 것만으로 많은 핀치가 경쟁에서 밀려나 죽어야 했다.
그 절묘한 자연선택은 환경 변화에 따라 매번 달라졌다. 엄청난 양의 비가 내리는 우기에 수십 번씩 번식을 계속하며 온갖 잡종이 가득 태어나는 상황에는 '정답 형태'와는 또 다른 성선택이 핀치의 번식을 좌우했다. 먹이는 넘쳐났으니 사소한 모양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고, 핀치는 자신과 비슷하지 않은 핀치와도 번식을 하곤 했다. 이 잡종 핀치는 건기에는 빠른 자연선택 과정에서 도태되는데, 살아남기 위한 적합한 최적해 형태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생존하기도 힘들 뿐더러, 이를 승계받은 자손이 더 나은 삶을 살리도 없다. 그러나 우기에는 더 이상 자연선택이 중요하지 않다. 한 종이 경쟁을 피하기 위해 다른 종과 차이를 두며 서로 다른 먹이를 먹을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이렇게 누적된 상당한 변이 위로, 이번에는 조금 다른 위치에 정답 형태가 있을 새로운 자연선택이 놓인다. 원래 한 종이었던 것이 다음 자연선택을 버티지 못하고 멸종하는가 하면, 본디 생존에 부적합해 도태될 예정이었던 잡종이 경쟁 속 틈을 발견하고 이 안에 파고들어 새 종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종분화는 이런 식으로 일어난다. 가혹한 자연에서 서로 다른 두 종이 만나거나 한 종이 둘로 갈라지거나 상관 없이, 생존에 적합한 분업의 영역이 다양할수록 그 각각의 영역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서로를 맞춰가며 경쟁을 최소화하되 이익은 최대화하는 효율적인 틈을 찾아가며, 만약 그 틈이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한 종만이 살아남는다. 그리고 이 살아남은 한 종이 꼭 두 종 중 하나라는 보장은 없다. 둘 사이의 변이를 가진 미묘하게 다른 잡종이 새로 승리를 거둔 종이 되어 버틸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 한 종에서 변종, 종분화까지의 간격은 그리 넓지 않다. 성선택은 자연선택과 함께 자연스레 생존에 가장 적합한 형태의 자손을 낳는 방향으로 작용하며, 그 결과 역시 각 개체의 문제보다는 전체 집단에서의 분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종의 변화를 추동하는 하나의 진화압에 불과하며, 서로 다른 종끼리의 자식이 번식에 실패하는 것은 염색체 같은 성기능의 문제도 있지만, 이 잡종이 대체로 현재 각 종이 적응하고 있는 환경에 덜 적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사람의 손길 역시 진화압으로 작용해 새로운 종을 늘 출현시킨다. 하나의 살충제, 항생제가 늘 여기에 적응한 개체의 출현을 부르는 것 자체가 자연선택의 증거라는 것을 이해하려면 이런 유연한 종 개념이 필요하다.
하지만 유연한 종 개념을 통해 동식물을 볼 수 있다면, 그 시각이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는-<핀치의 부리>에서 엘니뇨와 다프니 메이저를 묶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사람에 의해 이뤄진 대규모 자연선택의 역사를 그리고 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전근대 사회에 도입된 제국주의-혹은 자본주의-경제 제도가 기존의 구휼 제도를 완전히 해체해버린 상황에서 들이닥친 엘니뇨는 제도 바깥의 사람들을 그대로 집어삼켰고, 그 어떤 무기도 이뤄낼 수 없을 만한 수준의 대규모 집단학살을 일궈냈다. 자연선택 과정 중 개체의 생존을 가르는 차이가 각 종마다 사소하기 짝이 없는 미미한 차이에 불과하다면, 당시 그 참상에서 살아남은 사람과 살아남지 못한 사람 사이의 사회적 차이가 핀치의 차이와 다르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변종과 종분화의 미묘함을 생각하면 인종의 미묘함은 또 어느 정도인가? 핀치들이 약간간의 차이만으로 서로 다른 종으로 여겨졌듯이, 당시 지배층 또한 극히 사소한 차이를 근거로 자신들과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마치 다른 종처럼 인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종적 사고'가 있었기에 대규모 죽음을 자연스러운 도태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사회진화론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우수성'을 '적합성'으로 교체해 진보라는 방향키를 빼기만 한다면 이를 부정하기도 어렵다. 그래서인지, 비슷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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