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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신자의 관점에서 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알료샤와 사도 토마스의 관계와 후속작에 대한 예측.
안녕하세요. 이 글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사도 토마스의 구절을 읽고 묵상한 내용을 적은 글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가이지 신학가가 아니기에 그의 작품을 신학에 견줘 해석하는건 오류가 있으니 조심해주세요. 저는 이 글을 정교회 신자가 되고 세월이 지나다보니 읽는 관점이 바뀌고, 점차 이해가 되는 내용이 있었기에 쓴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읽었더니 큰 감동을 받고 유익하다고 느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읽어보면 와닿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내용 중 '장로들'이라는 파트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주인공 알료샤에 대하여 독자들이 알료샤와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그를 유약하고 신앙에만 의지하는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그를 변호하며 사도 토마스를 언급한다.
그러나 알료샤는 누구보다도 리얼리스트라고 생각된다. 오, 물론 그는 수도원에서 완전히 기적을 믿게 되었으나, 나는 기적이 결코 현실주의자를 혼란에 빠뜨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현실주의자를 신앙으로 이끄는 것은 기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현실주의자는 만일 그가 신앙을 갖지 않았을 경우에는 언제나 자기 내부에서 기적을 믿지 않는 힘과 재능을 찾아내게 마련이며, 만일 기적이 자기 앞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나타날 경우에는 그 사실을 용납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오관(五官)을 불신하는 법이다. 만에 하나 그것을 용납한다손 치더라도 단지 지금까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자연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리얼리스트에게는 기적으로부터 신앙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부터 기적이 나오는 것이다. 만일 리얼리스트가 일단 신앙을 갖게 되면 그는 바로 자신의 현실주의에 의해 반드시 기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도(使徒) 토마스는 자기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자기 눈으로 확인한 후에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5]이라고 말했다. 기적이 그로 하여금 신앙을 갖게 한 것일까? 진정 그런 것은 아니다. 그가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스스로가 믿기를 원했기 때문일 뿐이며,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6] 라고 말했을 때조차 비밀스런 내면 속에서는 이미 완전히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나는 여기서 도스토옙스키가 어째서 사도 토마스를 언급했는지 이유를 찾고자 했고 사도 토마스와 알료샤와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1. 알료샤는 조시마스 원로를 예수 그리스도에 겹쳐보고 있다.
조시마스 원로는 작중에 성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자고로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사람으로 성인으로 묘사되는 작중인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나는 이것이 어떤 것을 상징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도사들은 원로가 죄 많은 사람들과 정신적으로 교류를 나누고 있으며,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일수록 더욱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수도사들 중에서도 원로가 생을 마감하고 있는 시점에서 그를 증오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제 소수로 줄어들었다. 거기에는 수도원에서 영향력 있는 중요한 인물들, 예를 들면 최고참 수도사들 중의 한 사람이자 남다른 정진을 하고 있는 위대한 침묵 수행자까지 들어 있었음에도 그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대다수는 분명히 조시마 원로의 편에 서 있었으며, 그들 대부분이 진정으로 열렬히 원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원로에게 거의 광적일 만큼 애착을 보이기도 했다. 그들은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원로가 성자이고 그것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임박한 장로의 최후를 앞두고는 가까운 장래에 망자(亡者)로 인해 이 수도원에서 즉각적인 기적과 위대한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대한다고 공공연히 말하곤 했다. 알료샤도 교회 밖으로 날아가 떨어진 관에 대한 굳은 믿음만큼이나 원로의 기적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있었다. 그는 병든 아이들이나 친척들을 데려와서 원로가 그들에게 손을 얹은 후 기도문을 읽어 주기를 간청하는 사람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잠시 후, 혹은 다음날 다시 찾아와서는 장로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환자를 고쳐 준 것에 대해 감사드리는지를 목격해 왔다. 치료 효과가 실제로 있었는지, 아니면 병이 자연적으로 치료되는 과정에 있었는지는 알료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스승의 정신적 능력을 이미 완전히 신뢰하고 있었으며, 그분의 영광을 마치 자신의 승리처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방방곡곡에서 원로를 만나 보고 그의 축복을 받으려고 암자 문 앞에서 대기하는 평범한 민중 출신 순례자들의 무리에게 원로가 모습을 나타낼 때 알료샤의 가슴은 두근거렸고, 마치 자신의 몸에서 광채가 뻗어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 묘사는 많은 기적을 이루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닮았다. 그때에도 많은 군중들이 그분에게 "호산나"를 외치며 열광했고 그분의 은총을 입고자 애를 썼다. 또한 어떤 최후를 은연 중에 드러내는 것 또한 비슷하다. 또한 알료샤도 그를 성인 너머, 예수 그리스도와 겹쳐보는 듯하다. 내 생각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조시마조프 원로를 믿는 것 처럼 보였다.
〈우리가 죄악과 불의와 유혹을 겪고 있다면 이 세상 어딜 가든 모두 마찬가지이지만 그 어느 곳엔가 성스럽고 고결한 분이 계실 것이다. 세상을 대신하여 그분은 진리를 가지고 계시며 진리를 알고 계신다. 다시 말하면 진리는 이 세상에서 죽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말씀대로 반드시 언젠가 우리들에게 찾아와 전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알료샤는 민중들이 그렇게 느끼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장로야말로 바로 그 성인이며 민중들의 눈에 비친 하느님의 진리의 수호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는 농부들이나 원로를 향해 자기 자식들을 내미는 그들의 병든 아낙네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장로가 죽은 후에 수도원에 특별한 영광을 가져올 것이라는 확신이 알료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런 확신은 어쩌면 수도원 내의 어느 누구보다도 강했던 것 같다. 게다가 최근 들어서 그의 마음속은 심오하면서도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내적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누가 뭐래도 장로야말로 유일한 존재로 자기 앞에 서 있다는 생각에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아무래도 좋아, 그분은 성스러우시고 그분의 마음속에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부활(갱생)의 비밀이 자리잡고 있어. 그러면 그 권능은 마침내 이 세상에 진리를 세울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다 성스러워지며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부자도 가난뱅이도 귀인도 천민도 사라지며 모두가 하느님의 자식들로 살게 되면 진정한 그리스도 왕국이 시작될 거야.〉 이것이 알료샤가 마음속으로 그리던 꿈이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건 성인에 대한 공경이라고 보기보단 흠숭에 가깝다. 그는 조시마스 원로를 그리스도에 준하여, 아니 그 이상의 존재로 믿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사도들에게 예수그리스도란 알료샤의 조시마스 원로와 같은 존재가 아닐지?'하고 말이다. 그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꿈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아상과 예수그리스도는 달랐다.
이정도면 알료사가 조시마스 원로에 대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을 듯하다. 여러분은 책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내 생각에 작가는 알료샤를 조시마스 원로의 사도로 만든 듯 하다.
2. 비참한 죽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고문 끝에 십자가에 못박히신 뒤 숨을 거두셨다. 도스토옙스키는 그 비탄스러운 죽음에 주목하였다. 백치에서 한 그림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백치에서 언급된 무덤 속의 그리스도, 작 : 한스 홀바인>
백치에서는 이 그림이 나오며 그리스도의 처참한 최후에 대해 묘사한다. 그는 이 그림에 단 하나의 "미"도 없으며 고문받고 구타당한 상처들만 남은 단순한 인간의 시체만이 그림에 있다고 말하며 그 당시 그리스도의 최후를 목격한 사도들과 여인들의 심정을 재구성한다. 그리고 작가는 한가지 의문을 던지는데 '과연 제자들이 이 처참한 시신을 보고도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라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의문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조시마스 원로와 그의 제자 알료샤를 통해 구현한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비참하게 묘사되는 '썩는 냄새'라는 장이다. 전 장에서 보인 조시마 원로의 자애롭고 아름다우며 감동을 자아내는 내용을 읽다가 이 장을 읽기 시작한 독자들은 충격에 빠지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내용을 넣어 어떤 느낌인지 비교를 해보겠다.
나는 먼저, 조시마스 원로의 대화와 설교라는 부분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의 사랑이 넘치는 말에 진심으로 공감하였기에 나는 책을 읽으며 소설 속의 그분을 실제 성인처럼 공경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이여, 기도드리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기도를 드릴 때마다 만일 그것이 진실된 것이라면 새로운 감정이 번득일 것이며, 그 속에는 전에는 당신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고 새로이 당신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새로운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가 바로 공부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또한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을 때 〈주여, 지금 당신 앞에 서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홀로 기도드리는 것을. 왜냐하면 매시간, 매순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 세상을 하직하여 그들의 영혼이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슬픔과 우수에 젖은 채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외로이 이 지상과 이별하므로 아무도 그들을 불쌍히 여길 수 없으며 그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록 당신이 그를 모르고 그도 당신을 전혀 모를지라도, 바로 그때 세상의 다른 끝에서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당신의 기도가 하느님께 울려 퍼질 것입니다. 그 순간 하느님 앞에서 공포에 떠는 그 영혼은 자신을 위해 기도드리는 사람이 있으며 지상에 자신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격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도 그와 당신 두 사람을 한층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보실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를 그토록 불쌍히 여긴다면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겠습니까. 영원토록 당신보다도 한층 더 관대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위해서라도 그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내가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온 인류를 지옥에서 꺼내는 기적을 목격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온갖 수난과 절망 속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건내 끌어내는 한 성인을 보았다. 나는 그정도로 감동했다. 나는 아직도 이 구절을 읽을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생기게 된다. 나는 이 구절을 사랑하며, 이 말씀을 전하신 원로를 사랑했다. 그렇기에 그 다음, 썩는 냄새라는 장에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최후에 대해 미리 예고하신 것처럼 작가도 조시마스 원로의 최후에 대해 미리 장치를 준비했다.
그러나 예고했다하여 그 충격이 놀랍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백치에서 언급한대로 잔혹한 자연 앞에서 인간에게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깨질 수 있는 것인지 도스토옙스키는 원로의 썩는 냄새를 맡는 예문객들의 반응을 통해 잔인하게 묘사하고 있다.
관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 사이에는 창문을 열어 놓아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누군가가 지나가는 말로 슬쩍 내비쳤던 이 문제는 대꾸하는 사람도, 주목하는 사람도 없었다. 혹시 참석자들 중 몇몇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마음속으로라도 관심을 보였다면 그것은 고인의 시신이 부패하거나 썩는 냄새가 나리라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난센스이자, 그런 문제를 제기한 사람의 절대적으로 부족한 신앙심과 경솔함은 동정받아 마땅하다는(그것이 만일 냉소가 아니라면) 의미일 뿐이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처럼 예문객 대다수가 어느 기적을 기대하며 찾아왔다. 그들은 매우 자연스럽게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리라 확신했다.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호산나라 외치며 반기던 사람들이 많았던 만큼 시기하는 사람들 또한 있었다. 생전부터 성인으로 존경받는 원로에게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다른 일을 고대하며 장례식에 찾아왔고 그들이 기대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시체의 부패 현상이 일어나자마자 고인의 암자에 들어오는 수도사들의 얼굴만 보아도 그들이 찾아오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수도사들은 방에 들어와서 잠시 서 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밖에서 기다리는 군중들에게 빨리 소식을 확증시키기 위해 나가 버렸다.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중 일부는 비통하게 고개를 내젓기도 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악의에 찬 자신들의 시선 속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기쁨을 감출 생각마저 하지 않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렇게 자신들의 기대가 현실이 되자 원로를 미워하던 악인들은 기뻐하며 그동안 쌓아왔던 시기와 질투로 생긴 증오를 쏟아내며 온갖 악담과 소동을 일으켰고 장례식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작가는 이를 보며 '이번만큼은 하느님께서 소수파에게 일시적으로 승리를 차지하도록 허락하신 것이 분명했다.' 라고 말했는데 사탄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그러하지 않았던가? 죽은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죽은자에게 모든 모욕이 가해지지만 아무런 저항도 반박도 할 수 없다. 죽은 자를 진심으로 믿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걸 지켜보고 듣는다면 과연 어떤 심정일까? 너무나 슬프고 고통스럽지 않을까? 결국 고행자인 테라폰토스 신부의 등장으로 이 파국은 절정에 이르고마는데, 형식적인 바리새인같은 행동으로 자신의 신앙심을 드러내고자 하는 이 인간이 악인들에게 성인 취급을 받고야 만다. 그들은 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판한 바리새인과 같이 형식적인 규율에 얶매인 존재들로, 원로가 사랑으로 병자들에게 행한 여러가지 방법들을 사이비라 비난한다. 결국, 이를 지켜보다 못한 알료샤는 결국 도망친 제자들처럼 장례식을 빠져나오게 된다.
3. 실천적 사랑
작가는 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의 관계를 조시마스 원로와 알료샤의 관계로 이 작품에서 재구성한걸까 그리고 왜 원로를 통해 그리스도의 삶을 이토록 아플만큼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으로 재현한 걸까? 난 그것이 작가가 앞서 사도 토마스를 언급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했던 토마스가 예수님의 상처를 만지고 믿게 된 것 또한 재현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난 이것이 그가 조시마스 원로가 말한 실천적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원로는 실천적 사랑이 그리스도를 확신하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원로는 신앙을 입증코자하는 한 여인에게 주는 해답으로 이 말을 하게 된다.
「오오,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눈을 감고 이런 생각에 빠져 들곤 합니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신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하고. 그런데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이 처음에 무서운 자연 현상에 대한 공포심에서 비롯되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평생 신앙 속에서 살다가 죽음을 맞게 되면 갑자기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고, 제가 읽은 어느 책 속에서도 이야기하듯이 〈무덤 위에는 잡초만 무성히 자라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무서운 일이에요! 어떻게, 어떻게 하면 신심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어린 시절에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신앙을 가졌을 뿐인데요……. 어떻게,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입증할 수 있을까요. 지금 저는 당신 앞에 엎드려 그것에 대해 부탁하고자 찾아온 것입니다. 만일 이 기회를 놓친다면 평생 제게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어떻게 하면 입증도 하고 또 어떻게 하면 확신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오, 저는 얼마나 불행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한결같아요. 거의 모두가, 아무도 그 문제를 염려하지 않아요. 단지 저만이 그걸 참을 수가 없어요. 죽을 지경입니다, 죽을 지경!」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원로에게 신의 존재를 입증해달라고 간청하는 여인의 말은 사도 토마스의 말과 겹친다. 죽음이란 무서운 자연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인간의 믿음이란 나약하다. 이것은 소설 백치에서 언급하였듯이 분쇄기 안으로 들어가 멀쩡히 나오리라 믿는 것과 비슷하다.
자연은 거대하고 무자비한, 어느 말 못하는 짐승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아니 그보다 훨씬 정확히 표현한다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이 그림 속에서 자연이란, 위대하고 귀중하기 짝이 없는 창조물을 닥치는 대로 포획하여 무감각하게 분쇄시켜 마구 삼켜 버리는 엄청나게 큰 첨단 기계처럼 보인다.
백치
사도 토마스의 심정도 이 여인과 비슷했으리라, 썩는 냄새를 맡고 장례식장에서 뛰쳐나온 알료샤의 마음도 이 여인과 같으리라. 그 누가 자연으로 인해 분쇄당한 시신을 보고도 자연으로 인해 짓밟힌 시신을 보고도 이전의 가졌던 대상의 숭고함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기에 사도들도, 알료샤도 그 현장에서 뛰쳐나온 것이리라.
그렇게 그들은 절망하고 낙담하고 말았다. 그들은 믿음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사도 토마스는 상처를 만지기 위해 손을 뻗었고, 여인도 원로를 찾아왔다. 어째서일까? 왜 그들은 믿음을 되찾고 싶어한걸까? 먼저, 사도 토마스의 관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도 토마스는 굉장히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던 곳에 예수님께서 다시 가려하는걸 제자들이 만류하자, 사도 토마스가 '앞장서서 죽으러 갑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아마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같은 길을 걷는게 즐거웠을 것이다. 행복했을 것이다.
여인도 그런 과거가 있지 않았을까, 그녀는 어린시절에 아무 생각없이 기계적으로 신앙을 가졌다고 한다. 러시아 정교인인 그녀는 어린시절에 부모님과 함께 성당에 갔을 것이다. 갓난아기 시절에 세례를 받고 성찬을 영하였을 것이다. 때로는 아름다운 성가를 듣고, 부모님이 독실했다면 식사 때마다 당장 식기에 손을 대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들었던 기도문들을 듣고 잠들기전에 눈을 깜박깜빡 감아가며 부모님들의 기도하는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때로는 하품날 정도로 지겨운 신부님의 설교와 웅장한 보제의 목소리와 카랑카랑 하며 울려퍼지는 분향소리와 향냄새가 그녀의 과거를 멤돌던 추억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만난 인연들 중에는 즐겁고 환한 인연도 있었을것이고 슬프고 애틋한 인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무덤 위에 잡초만 무성히" 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 인연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사도 토마스나 알료샤가 받은 충격과 비슷한 사건이지 않았을까. 그녀는 잔혹한 일을 겪어 신앙을 잃었을 지도 모른다. 또, 그 과거에 있었던 아름다운 추억으로 잃었던 신앙을 되찾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의심없이 신앙을 가지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하며, 의심하는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분명, 그녀는 아름다운 추억을 그리워하며 다시 신앙에 손을 뻗은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녀는 원로를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원로는 한가지를 실행하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본론의 주제인 '실천적 사랑'이다.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걸 입증하지는 못해도 확신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무엇으로요?」
「실천적 사랑의 실행으로 말입니다. 이웃을 실천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사랑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 사랑이 성공을 거두게 되면 신의 존재도, 자기 영혼의 불멸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완벽한 자기 희생에까지 이르게 된다면, 그때는 틀림없이 확신을 얻게 되고, 또한 어떤 의혹도 당신의 영혼 속으로 찾아 들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경험을 거친 사실이며 분명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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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직접 그리고 끊임없이 실천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 토마스가 그리스도의 상처를 직접 보고 만지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 우리가 실천적 사랑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확신하게 되는 것을 암시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나도 이 구절을 읽고 실천적 사랑을 바로 실행하고 싶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이걸 계속해서 해낼수가 없다. 왜일까? 나는 마음이 좁고, 약하여 늘, 내 선행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실행한 결과가 늘 낭만적이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배은망덕하다.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선행을 깔보기도 하고 짓밟기고 하며 그것에 자존심 상해하며 모욕하기도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좋아하는 추악하지만 현실적인 인간성에 대한 묘사이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생활을 오랫동안 참아 낼 수 있을까요?」 부인은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지기라도 한 듯 열중하여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예요! 그것이 저의 가장 괴로운 문제란 말이에요. 눈을 감고 이렇게 자문해 보지요. 네가 그런 길을 오래도록 견뎌 낼 수 있겠니? 네가 상처를 소독해 주는 그 환자가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너의 인도주의적 봉사를 평가하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오히려 짜증을 부리면서 너를 괴롭히고, 네게 고함을 질러 대면서 무리한 요구를 한 후 상관에게 불평을 털어놓으면(많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일어나듯이) 그땐 어떻게 하겠어? 사랑을 계속 실천하게 될까, 혹은 그만둘까? 이런 상상을 하다가 저는 몸서리를 치며 이런 결심을 했지요. 인류에 대한 저의 〈실천적〉 사랑을 식게 만드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배은망덕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봉급을 받는 노동자이니, 당장 그 대가를, 즉 사랑에 대한 사랑의 보답과 칭찬을 요구하겠다, 그렇지 않고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다 하고 말입니다!」
그녀는 실제로 자학적 발작 증세를 보였으며, 이야기를 마치자 도전적 결의가 가득 찬 시선으로 원로를 바라보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난 이 부인의 생각을 통해 도스토옙스키가 사도 토마스를 어떻게 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도 토마스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군중들에게 실망한 것은 아닐까? 혹은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여러분들도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군중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구세주라고 부르는 분을 맞이하였다. 그런 군중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그분을 로마에게 넘겨 갖은 고난과 모욕을 당하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것을 목격한 것이다. 그 이유로 예수의 말씀으로부터 얻은 사랑이 여인처럼 식게 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는 예수님께서 이전처럼 온화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토마스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사도 토마스는 예수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 만짐으로써 이토록 상처입었음에도 온전하고 완벽한 사랑의 실존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제서야 진정한 사랑의 형태를 깨달을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외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나는 성경 속, 사도 토마스의 행적을 통해 조시마스 원로가 말한 실천적 사랑의 실존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실천적 사랑이란 예수의 사랑을 답습하는 것이다. 사도 토마스가 그분의 상처를 보고 만지는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사랑을 답습함으로써 그분의 상처를 보고 만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성경을 통해 보며 그분이 사랑을 실천하며 입은 상처들을 보게 된다. 또, 본 것을 꾸준히 실행에 옮긴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분의 상처를 만지게 되는 것이며 우리는 그분의 상처가 실재하는 것이었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사랑을 실행한 결과, 누군가가 배신해도 좋다. 누군가가 우리의 뺨을 이유없이 때려도 좋다. 모욕을 해도 좋다. 대신, 그 결과로 우리슨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실존하는 하느님임을 깨닫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외치게 될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믿음이 아닌 실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확신하는 방법임을 조시마스 원로는 여인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그러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른 캐릭터를 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주인공 "알료샤" 다. 그 또한 사도 토마스처럼, 저 여인처럼 믿음을 잃고 장례식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다시, 더 확고한 믿음을 되찾고 돌아왔다. 어째서 그것이 가능했을까? 그는 늘 방관자였다. 그는 원로에게 사랑에 대해 실천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늘 주저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 공상적인 사랑을 하는 단계에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그전에 자신에 이복 형, 미쨔에게 큰 모욕을 당한 이등대위에게 돈을 건내지만 매몰차게 거부당한다.
그는 갑자기 오른발을 들어 악에 받친 표정을 지으며 구두 뒤축으로 돈을 짓밟기 시작했다. 그는 돈을 짓밟을 때마다 고함을 지르며 거친 숨을 토해 냈다.
「바로 당신의 돈입니다! 바로 당신의 돈이란 말이에요! 당신의 돈! 당신의 돈!」 그는 갑자기 뒤로 물러나더니 알료샤 앞에 버티고 섰다. 그의 모습에는 온통 자기 자신도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자부심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당신을 보낸 사람한테 전해 주시오, 수세미는 자기 명예를 팔지 않더라고!」 그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뛰어갔다. 그러나 그는 채 다섯 걸음도 뛰지 않아서 다시 몸을 돌리고는 갑자기 알료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또다시 다섯 걸음도 가지 못하고, 이제 마지막으로 몸을 완전히 돌렸는데, 이번에는 얼굴에 일그러진 미소조차 없었고, 오히려 온통 눈물 범벅이 되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울먹이는 목메인 목소리로 황급히 이렇게 내뱉었다.
「치욕의 대가로 당신들의 돈을 받는다면 내가 우리 아이한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결국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알료샤는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긴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 그는 이등 대위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돈을 구겨서 팽개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임을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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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랑하려고 했던 리즈라는 여자 아이에게 이등대위에게 당한 일을 고백하며 다시 돈을 주면 그가 반드시 받는다는 자신의 계획을 전하자 그녀는 알료샤가 겉으로는 이등대위를 동정하면서 모든 속내를 꿰고있다는 듯이 그를 깔보고 있다며 비아냥거린다.
「난 우스운 어린애에 지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은, 당신은…….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우리들이라고 하기보다는, 당신의 판단 속에서……. 아니, 우리들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어요……. 그 사람, 그 불행한 사람에 대한 경멸이 들어 있는 건 아닐까요? 지금 우리가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듯 그 사람의 마음을 해부하고 있는 것에 말이에요? 그가 돈을 받을 거라고 단정해 버린 것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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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표도로비치, 당신은 정말 훌륭한 분이세요, 비록 때로는 현학자 냄새를 풍기시긴 하지만요……. 그렇지만 잘 관찰해 보면 현학자와는 전혀 거리가 멀지요. 문 앞에 한번 가보세요. 문을 살며시 연 다음, 혹시 엄마가 엿듣고 있지 않나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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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원로를 찾아왔던 여인처럼 스스로를 고상하게끔 만드는 공상적인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공상적 사랑으로 여인이 말한 것과 같이 사랑을 실천했지만 어떤 반발이나 배은망덕에 의해 중단되고 만다. 아직, 그의 사랑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렇기에 이반이 열거한 아이들을 학대하는 어른들의 이야기 끝에 총살을 해야한다는 말을 하고 만다.
「그자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총살을 시킬까? 도덕적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총살을 시킬까? 말해 봐, 알료샤!」
$ㄱ「총살을 시켜야죠!」 알료샤는 하얗게 질려 일그러진 미소를 띤 채 형을 뚫어질 듯 응시하면서 조용히 대답했다.
「브라보!」 이반은 기뻐하며 탄성을 질렀다.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걸로 봐서……, 고행 계율을 받은 네가! 그렇다면 네 가슴속에도 어떤 새끼 악마가 들어앉아 있는 거야, 알료샤 까라마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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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은 알료샤 내면의 오류 중 한가지를 지적하였다. "도덕적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라는 말은 알료샤가 그 전에 해왔던 사랑의 목적을 이야기 한다. 사랑을 실천한 결과 실패하고, 어떻게보면 베푸는 대상 위에 있는 느낌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 극단은 지하로부터 수기 2부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행동과 결단 그리고 그로인해 일어난 파국을 통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공상적인 사랑은 결국 도덕적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는 것이요. 지하로 부터 나가지 못한 사랑이다. 따라서 그의 사랑은 공허하다. 그의 믿음에는 부활한 예수가 있다. 그러나 그 예수의 몸에는 상처가 없다. 그렇기에 그의 십자가는 반역을 주장하는 이반에게 통하지 않는다. 알료샤의 믿음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은, 스스로의 십자가를 지지 않은 불완전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네가 건설한 건물 속에 사는 사람들이 어린 희생자의 보상받을 길 없는 피 위에 세워진 행복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하고 결국 받아들여서 영원히 행복해진다면 넌 그런 이념을 용납할 수 있겠니?」
「아뇨, 용납할 수 없어요. 그런데 형.」 알료샤는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형은 방금 이 세상에 남을 용서할 수 있고 그럴 권리를 가진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죠? 하지만 그런 분은 존재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든 어떤 죄악이든 용서하실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그리고 모든 것을 대신해서 무고한 피를 스스로 내놓으셨기 때문이죠. 형은 그분을 잊고 계시지만, 건물은 그분을 토대로 만들어졌고 사람들은 그분을 향해 〈주여, 당신이 옳았나이다. 이는 당신의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라고 외칠 거예요.」
「아, 〈유일하게 죄를 짓지 않으신〉 그분의 피! 아니, 난 그분에 대해서 잊은 적이 없어. 그와 반대로 네가 그분의 이야기를 왜 이렇게 오랫동안 꺼내지 않는지 내내 놀라고 있었거든. 너희 수도사들은 논쟁을 할 때면 으레 그분을 맨 먼저 내세우지 않니. 그런데 알료샤, 비웃지 마라. 난 1년 전 언젠가 서사시를 한 편 지었단다. 내게 한 10분쯤 시간을 더 내줄 수 있다면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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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죄를 짓지 않으신" 이라고 말하는 이반의 표현이 굉장히 비아냥거리는 투 처럼 보이는듯 하다. 마치 '신이 세상에 와서 고상하게 지내다 가셨지' 라고 비꼬는 투에 가깝다. 이반은 이등대위가 알료샤의 도움을 거절했던 것처럼 정중히 입장표를 거부한다. 그의 관점에서는 그리스도가 인간들의 배은망덕에 의해 입은 상처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알료샤가 그에게 내놓은 십자가는 그에 신념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나는 이 관점으로 대심문관과 이반의 행동과 내면의 변화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싶었으나 잠시 미룬 뒤, 알료샤에 집중하여 서술을 이어가려고 한다.
원로가 돌아가시기 전, 알료샤가 가진 사랑의 형태는 이전에 말했듯이 공상의 형태였다. 그러나 한 계기로 그는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루셴까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사실, 이 만남은 라끼친이 알료샤를 그루셴까에게 샴페인 한 병에 팔아넘김으로써 성사된 것인데, 그루셴까의 목적은 알료샤를 타락시키는 것이었는데, 본래 그녀는 자존심이 강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왜 변덕을 부려 그 목적을 포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디만 한 가지 확실한건 조시마 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깨닫자 성호를 그으며(성호를 긋는 행위는 굉장히 중요하다.) 지금까지 알료샤를 대한 태도에 대해 죄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나서 라끼친을 치워두고 서로가 사랑을 고백하게 되는데 여기서의 사랑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라끼찐은 두 사람이 지금 막 혼연일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영혼에 커다란 감동을 준, 평생에 걸쳐 결코 흔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적이 충격을 받고는 몹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본능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을 갖춘 라끼찐도 가까운 사람들의 감각과 감정을 이해하는 데에는 매우 우둔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젊은 나이의 미숙함 때문이기도 했고, 부분적으로는 지나친 이기주의 때문이기도 했다.
중략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너희들 두 사람은 내게 해준 것이 뭐야?」
「아무 단서도 달지 말고 사랑을 해봐, 바로 여기 이 알료샤가 사랑하듯이.」
「무얼 보고 이 친구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 무엇으로 너한테 그걸 입증했어? 그런데 대체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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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료샤는 진심으로 뇌우치는 그루셴까를 깊게 받아들이며 그녀의 고백을 듣는다. 5년 전에 만난 한 남성에게 큰 모욕을 당하고 계속 고통받아왔던 그녀는 복수를 꿈꾸지만 그녀는 그 남성에게 편지를 받자 용서하고 싶어한다. 알료샤는 그녀의 고백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비웃지 말게, 라끼찐, 비웃지 마. 돌아가신 분의 이야기도 꺼내지 말고. 그분은 이 지상에서 살았던 어떤 사람보다도 고상하신 분이야!」 알료샤는 울먹이는 소리로 외쳤다. 「나는 심판자로서 자네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야. 나 자신이 심판받아야 할 사람들 가운데서도 최후의 한 사람이니까. 그녀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아? 나는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 이곳으로 왔고 〈될 대로 돼라!〉 하고 떠들어 댔어. 그건 모두 내 마음이 소심하기 때문이야. 그런데 이분은 5년간에 걸친 고통 속에서도 그 첫번째 사람이 도착해 그녀에게 진실한 말을 꺼내자마자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잊은 채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계시잖아! 이분을 능욕한 사람이 돌아와 부르자, 이분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 사람한테 달려가려 하고 있어. 칼을 품고 가진 않으실 거야, 그렇고말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해! 자네도 그런 사람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해! 오늘 이 자리에서 나는 한 가지 교훈을 얻었어……. 이분은 사랑에 있어서는 우리들보다 훨씬 더 숭고하신 거야……. 조금 전에 이분께서 말씀하신 이야기를 전에도 들은 적이 있어? 아니, 듣지 못했을 거야. 만일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면 이미 오래 전부터 모든 것을 이해했을 테니까……. 이틀 전에 모욕을 받았던 아가씨도 이분을 용서할 거야! 그리고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용서할 거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말이야……. 이분의 영혼은 아직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위로해 드려야만 해……. 아마도 이분의 영혼 속에는 귀중한 보물이 숨겨져 있을 거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대가없는 사랑과 용서의 가치를 깨달은 알료샤는 수도원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루셴까가 이런 변화를 하게 된 원인은 역시 알료샤의 대가없는 사랑과 연민이다. 그는 그루셴까가 자신을 타락시키려는 목적으로 이 장소로 데려왔음에도 그녀의 마음을 보고 그녀를 연민하였다. 그의 그런 사랑이 그루셴까의 본심, 용서하고 싶다는 고백을 하게끔 만들었다. 이것이 그가 실행한 첫번째 실천적 사랑이다. 그루셴까와 알료샤는 이것을 '파 한 뿌리'라 부르며 서로의 사랑을 공유한다. 이 뿌리는 그루센까가 이야기 한 우화에서 나오는 상징적인 소재이다.
〈옛날 옛적에 몹시 심술 고약한 할멈이 살다가 죽었어요. 그런데 그 할멈은 평생 선행이라곤 눈곱만큼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악마들은 그녀를 붙잡아다가 지옥 불에 빠뜨리고 말았지요. 할멈의 수호 천사는 하느님께 말씀드릴 만한 할멈의 선행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지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천사는 《저 할멈이 밭에서 파 한 뿌리를 뽑아서 거지에게 준 일이 있습니다》라고 하느님께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너는 바로 그 파 한 뿌리를 가져가 지옥 불 속에 내밀어서 할멈이 그걸 붙잡고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라. 만일 할멈이 그걸 붙잡고 빠져나오면 천국으로 가도록 하고, 파가 끊어지면 지금 있는 곳에 계속 머물게 해라.》 그래서 천사는 할멈에게 달려가 파 한 뿌리를 내밀며, 《자, 할멈, 어서 붙잡고 나와요》 하고 말했지요. 천사는 파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기기 시작해서 거의 다 끌어올렸는데 지옥 불 속에 있던 다른 죄인들이 할멈이 올라가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함께 그곳을 벗어나려고 너도나도 할멈한테 매달리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몹시 심술 고약한 할멈은 《나를 끌어올리는 것이지, 너희들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야. 이건 내 파지, 너희들의 파가 아니야》 하고 악을 쓰면서 사람들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어요. 그녀가 이렇게 말한 순간 파는 뚝 끊어지고 말았어요. 그래서 그 할멈은 지옥 불에 떨어져 지금까지 고초를 겪고 있지요. 천사는 하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떠나고 말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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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한 뿌리' 우리는 이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종 단지, 작은 과 같은 수식어가 계속 붙는 것은 이유가 있다. 이 파 한 뿌리는 실천적 사랑을 상징한다. 그러나 스스로에겐 실천적 사랑을 실행한 결과로 이루어진 선행이 매우 값싸기에 이를 파 뿌리에 빗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루셴까가 우화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그 뿌리는 지옥에서 죄인도 건져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에 알료샤의 파 뿌리에 손을 뻗고자 한 그루셴까가 구s원 받은 것이다. 이 실천적 사랑을 실행한 이후 그의 내면적 변화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한번 읽어보자.
「아니 뭐야, 죄 많은 여자를 회개시켰다고?」 그는 알료샤에게 심술궂은 미소를 보냈다. 「그 매춘부를 진리의 길로 돌아서게 만들었다고? 일곱 마리 악마를 내쫓았다 이건가? 바로 그것들이, 얼마 전에 우리가 기대하던 기적들이 실현되고 말았군!」
「그만 하게, 라끼찐.」 알료샤는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 기분으로 말했다.
「자네는 조금 전의 그 25루블 때문에 나를 〈경멸하는〉 거지? 진실된 친구를 팔아넘겼다, 이거지. 사실 자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듯, 나도 유다는 아니야.」
「아아, 라끼찐, 난 분명히 말하지만, 그건 벌써 잊고 있었어.」 알료샤가 소리쳤다. 「그걸 환기시킨 사람은 바로 자네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실천적 사랑을 실행하고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깨달은 그는 라끼친의 냉소와 모욕에 개의치 않는다. 그의 악의와 악행이 그의 사랑에 누를 끼치지 못한다. 마치 부활하고 돌아오신 예수님처럼 그는 상처입었음에도 태연하다. 알료샤는 이 내면의 각성과 함께 수도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4. 부활
수도원으로 돌아간 그는 원로의 관 앞에서 기도하고 빠이시 신부의 독경을 듣던 중 감정적인 변화가 큰 하루였던 나머지 지쳐 잠에 빠지게 된다. 그는 빠이시 신부가 읽는 복음경 내용이었던 가나의 혼인잔치 속에 들어가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조시마스 원로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대체 어찌 된 일이지? 어째서 눈앞에 방이 나타나는 걸까……. 아, 그래…… 이건 바로 혼인이고 혼인 잔치지. 그래, 틀림없어. 저기 하객들도 있고, 젊은 신랑 신부도 있고, 또 저렇게 즐거워하는 사람들도 있고, 게다가…… 그런데 지혜로운 연회장은 어디 계시지? 저 사람은 누굴까? 대체 누구지? 다시 눈앞에 방이 나타나는군…… 저기 커다란 탁자에서 누가 일어서는 거지? 아니, 어떻게…… 그분께서 여기 계시지? 그분은 관 속에 들어가 계셔야 하는데……. 하지만 여기 계시잖아……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보시더니 이쪽으로 오고 계시네……. 오, 주여!〉
그렇다. 그를 향해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여위고 얼굴에는 잔주름이 가득하지만 고요한 미소를 지으며 즐거워하는 노인이시다. 관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장로는 어제 손님들이 찾아와 동석했을 때 입었던 바로 그 옷차림을 하고 계시다. 얼굴 표정은 밝고 두 눈은 빛난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틀림없이 원로님께서는 잔치에 참석하고 계시며, 갈릴래아 가나의 혼인 잔치에도 초대를 받으신 모양이야…….
〈사랑하는 알료샤, 나도 초대를 받았단다.〉 고요한 음성이 알료샤의 머리 위로 울려 퍼졌다. 〈어째서 넌 여기 숨어 있는 거냐, 널 찾을 수 없게 말이다……. 자,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함께 가자.〉
그분의 음성, 조시마스 원로님의 음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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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마스 원로는 당황한 알료샤를 이끌며 이 곳에 대해 설명한다. 이곳은 혼인잔치, 초대받은 사람은 모두 다 파 한 뿌리를 적선했기에 와 있는 곳. 알료샤도 손을 뻗던 한 여인에게 파 한 뿌리를 적선했기에 올 수 있던 곳이라고, 그는 나즈막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알료샤에게 임무를 시작하라는 말을 보며 그동안 똑바로 마주하지 않은 대상, 태양을 볼 것을 지시한다.
이제 시작하거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이제 네 임무를 시작해, 얌전한 내 아들아……. 그런데 넌 우리의 태양이 보이니, 그분이 보이냔 말이야?〉
〈전 두렵습니다…… 감히 쳐다볼 수가 없어요…….〉 알료샤는 더듬거렸다.
〈그분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들 앞의 위대한 존재로서 두렵게 느껴지고, 천상에 계심으로 해서 공포를 느끼게 하지만, 그분은 한없이 자비로우시며 우리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형상을 닮게 만드셨고 우리들과 더불어 즐거움을 나누시며, 손님들의 즐거움이 잠시라도 멈추지 않도록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기도 하고 새로운 손님들을 기다리시면서 모든 세기에 걸쳐 끝없이 새로운 손님들을 부르고 계신 거란다. 자, 새 술을 나르고 또 음식들을 나르잖니…….〉
태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알료샤가 그동안 똑바로 마주하지 못한 것, 스스로가 고백하듯이 두려워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던 분이다. 그토록 신앙심 강해보이고 강직하고 도덕심이 있는 그가 어째서 그리스도를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던걸까?
정교인으로서 나는 그러할 수 밖에 없었던 알료샤가 이해가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떠올린다면 어떻게 보는가. 병든자를 일으켜 세우고, 못보는 자를 보게하는 구세주. 알료샤가 조시마스 원로를 따랐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그리스도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적을 베푸시고 사랑을 베푸는 성인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전부는 아니다. 그분께서는 더 높은 사랑, 우리 영혼의 죄, 원죄로부터 회복시키기 위해 죄 없이 뺨을 맞고, 채찍으로 살점이 떨어져 나가며, 침뱉음을 당하고 자신의 몸보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그 십자가에 못박히시어 창에 찔리셨다. 여러분은 이런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마주할수 있겠는가? 정교인은 그리스도의 모든 모습을 마주하며 본받아야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어떻게 이렇게 할수가 있을까? 터무니 없는 일이야...'하며 외면하곤 한다. 알료샤도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감히 쳐다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실천적 사랑을 실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과 기적을 동시에 체감하였고 그는 이제 그리스도를 똑바로 마주할 용기를 얻게 되었다.
알료샤는 그에게 임무를 시작하라는 명령을 받고 환희에 차오르며 꿈에서 깨게 된다. 그리고나서 밖에 나가 대지에 몸을 던지고 눈물을 흘리며 대지를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맹세하게 된다.
그는 무엇 때문에 대지를 포옹했는지 알지 못했으며, 어째서 대지에, 그 대지 전체에 그토록 입을 맞추고 싶어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눈물을 흘리고 오열을 하면서 그리고 눈물로 대지를 적시며 입을 맞추었고 대지를 사랑하겠노라, 영원히 사랑하겠노라 굳게 맹세했다. 그 순간 〈그대의 기쁨의 눈물로 대지를 적시고 그대의 그 눈물을 사랑하라……〉는 구절이 그의 영혼 속에 울려 퍼졌다. 그는 무엇을 위해 눈물을 흘린 것일까? 오, 그는 환희에 젖어 거대한 심연 속에서 자신을 향해 반짝이는 그 별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으며, 〈그 흥분이 부끄럽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그처럼 수많은 신의 세계들에서 던져진 실타래들이 단번에 그의 영혼 속에서 마치 하나로 합쳐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영혼은 〈다른 세계와 교감하며〉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싶었고 또 용서받고 싶었다. 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인을, 만물을 그리고 만사를 위해서 그런 것이었으며, 그의 마음속에서는 〈다른 사람들도 나를 위해 용서를 빌고 있을 거야〉라는 소리가 다시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뭔가 확고 부동한 것이 마치 저 둥근 하늘처럼 그의 영혼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시시각각, 마치 손으로 만지듯이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어떤 사상이 그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았으며, 그것은 그의 삶에서 이미 그랬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만 같았다. 그는 연약한 한 젊은이로서 대지에 몸을 던졌지만 한평생 확신으로 가득 찬 투사가 되어 일어났으며, 그 환희의 순간에 별안간 그것을 인식하고 느꼈다. 그 후로 알료샤는 한평생 그 순간을 결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 나의 영혼 속에 찾아왔던 거야.〉 그는 나중에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사흘 후 그는 〈속세로 나가라〉고 지시했던, 이미 고인이 된 원로와 약속한 대로 수도원에서 나왔다.
알료샤의 이 행위와 눈물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화자는 이유를 알수없다고 말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알료샤가 대지에 몸을 던지고 눈물을 흘리는 행위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을 상징한다. 예수님의 보혈을 대지에 흘림으로써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한 것처럼 알료샤도 대지에 몸을 던지고 눈물을 흘림으로써 온 세상과 연결된 것이다. 조시마 원로가 천국에 있고 거기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그는 믿던 모든 것이 실존한다는 것을 확실한 체감으로서 알게 되었고, 쓰러졌던 그는 확신으로 가득찬 투사가 되어 일어났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말한 사도 토마처럼, 그는 부활하여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5. 결말, 관계의 회복
도스토옙스키는 자존심이라는 문제를 항상 거론해왔다. 러시아인들 특유의 자존심은 아주 개성적이다. 이 자존심이라는 것 때문에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해결할 수 없고 결국 파극을 맞이하는 작품이 많다. 사랑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사랑하지 못한다. 화해하지 못한다. 포옹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한 가지를 계기로 전환점에 들어간다. 자존심 때문에 파국을 맞이할 예정인 모든 인물들이 알료샤라는 자기 자신을 파 뿌리로 여김으로써, 중개자를 얻게 된다. 늘 관망자였던 그는 원로의 말을 듣고 세상에 나가 낮은 자세로 상처투성이의 사람들을 이어준다. 자신의 형과 여인들을 화해시키고..
죽어가는 일류샤를 위해 아이들을 모아 위로해준다. 그렇게 다시 모두에게 사랑을 일깨워주며 아이들에게 죽은 일류샤를 언급하며 일장연설을 하고 그는 더 큰 세상을 향해 떠난다. 그는 아이들과 이웃에게 파 한 뿌리라는 복음을 설파한 것이다.
「언제까지나, 일류샤의 얼굴, 그리고 그가 입었던 옷, 해진 장화, 그리고 그의 관을 영원히 기억합시다. 그리고 가엾은 그의 아버지를 기억합시다. 일류샤가 아버지를 위해서 혼자 힘으로 학급 전체를 상대로 용감하게 싸운 일을 기억합시다!」
「기억하겠어요, 기억하겠어요!」 소년들이 소리쳤다. 「그 애는 용감하며 착하고 친절했어요!」
「오, 나는 얼마나 그 애를 좋아했는지 몰라요!」 꼴랴가 외쳤다.
「오오, 여러분, 여러분들은 나의 친구들입니다! 이 세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바르고 착한 일을 한다면 우리의 삶은 아름다워질 겁니다!」
「맞아요, 맞아요!」 소년들이 감격한 목소리로 되풀이했다.
「까라마조프 씨, 우리는 모두 당신을 사랑합니다!」 누군가 울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외쳤다. 그것은 까르따쇼프의 목소리 같았다.
「우리 모두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해요!」 다른 소년들도 모두 한결같이 입을 모아 합창했다. 소년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까라마조프 씨 만세!」 꼴랴가 환희에 차서 소리쳤다.
「그리고 우리 곁을 떠난 일류샤가 영원히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기를!」 알료샤는 평온을 되찾은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있기를!」 소년들은 다시 이렇게 맹세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6. 후속작에 대한 예상
종종 사람들이 알료샤를 그리스도를 닮았다고 하는 글들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내가보기에 작가는 알료샤를 사도 토마로 그렸다. 처음에 사도들이 병자를 치유하려 하였지만 믿음이 부족하여 실패하고 예수님께 혼이 난것 처럼 알료샤도 그러하지 않았는가.. 만약에 알료샤가 사도 토마와 닮은 것이라면 사도 토마가 인도로 떠난 것처럼 알료샤도 사람들의 사랑과 관계의 회복을 위해 떠난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후속작이 없어서 아쉬워한다. 도스토옙스키가 쓰지못한채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 해석과 그와 비숫하게 닮은 인물들이 역사에 있었기에 감히 후속작을 예측할 수 있다고 본다. 몇십년 뒤, 러시아엔 혁명이 일어나고 정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된다. 그때 모든 신도들과 성인들은 고문받고 사형당하는 등의 끔찍한 일들을 당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돕는걸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결말에 와서야 교회는 부활했다. 알료샤도 그 수많은 순교자들 사이에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자신을 버리고 서로 사랑합시다! 라고 말한 그라면 그 역사 속에서도 누군가에게는 부활의 손길이 될 수도 있는 파 한 뿌리를 건네줬을 것임을 나는 믿는다.
내가 쓴 이 글의 내용은 혁명 당시 순교하신 성인분들의 삶을 읽자 직감적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들의 삶은 알료샤가 행하려고 했던 삶, 그의 이상이다. 그분들 역시 목숨을 걸고 한 행위, 모든 것을 버리고 한 행위 조차 그리스도 앞에서 파 한뿌리로 여기고 타인에게 건내셨던 분들이다. 나는 그들의 삶을 공경하며 이 글을 마치고 싶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교회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실 분들이 계시는듯 합니다. 카페도 있고 여러가지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경로가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찾아와주세요. 이 글은 카페에 있는 글을 약간 수정해서 올렸습니다. 금지어가 좀 많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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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탭으로 옮겨드려씁니다 ꧁꧂
잠 안오니까 천천히 읽어봐야징 고봉밥 잘먹을게요~ ꧁꧂
톡1방 링크는 삭제점요
한국인 정교회 신자의 감상은 귀하네...
대한정교회 카페에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긴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