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서론VI에서와 같이 즉자존재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충만한 긍정성이고, 그 자체 속에 어떤 부정도 포함하지 않는다는 거임.


1. 부정에 대해

부정은 두 개의 실재(판단, 존재) 사이에 끼어있는 비실재적인 것임.

부정에 대해 질문받은 즉자존재는 판단을 가리키고 판단(전적으로 심리적인 긍정성)은 존재를 가리키는 방식

즉 부정의 존재는 바로 그것의 지각됨 속에 존재한다.

여기서 질문

판단적 명제의 구조로서의 부정이 무의 기원에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로 실재의 구조로서의 무가 부정의 기원이며 근거인가?


2. 예시

먼저 비존재는 항상 인간적인 기대의 한계 내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함.

ex) 내가 지갑에서 1300프랑만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은 1500프랑을 발견하리라 기대하고 있기 때문

ex) 자연이 물리학자에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자신의 가설에 대해 이런저런 증명을 기대하기 때문

따라서 부정은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라는 원초적인 바탕 위에서 나타난다.

즉 세계는 먼저 그런 비존재를 가능한 것으로 정립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 비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3. 질문과 존재

I에서 얘기했듯이 질문에 의해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와 마주하고 서게 됨.

이때 중요한건 질문을 통해 기대하는 게 판단이 아니라 우리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근거 역할을 하는 존재의 드러남이라는 것.

존재의 드러남을 기대한다는 것은 동시에 내가 비존재의 우발성을 예비하고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나의 물음에는 본성상 비존재에 대한 판단 이전의 이해가 포함되어 있음.


4. 파괴

갑자기 파괴에 대해 논의하는 이유는 비판단적인 행동이 그 근본적인 순수성에서 존재에 근거하는 비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를 제시하기 때문.

그런데 사르트르의 파괴는 그냥 파괴랑은 조금 다름. 

사르트르는 파괴가 있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과 존재와의 관계, 즉 초월성이 있어야 한다고 함.

예를들어 인간이 아무도 없는 산에서 태풍이 나무든 꽃이든 다 뿌수고 다녀도 그건 파괴가 아님.

파괴는 하나의 능동성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전제되어야 함.

그리고 '깨지기 쉬움' 이라는 I에서의 '기대' 같은 개념을 도입함.

즉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서 '바위를 파괴한다' 라고 표현할 수는 없다는 의미.

이때 깨지기 쉬움을 의식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비존재의 개연성을 상정하게 됨.

즉 지금 바위는 멀쩡한 상태이지만, 쇠망치로 때린다고 했을 때 부서진 바위(지금 바위는 멀쩡하므로)는 현시점에서는 비존재이며, 이런 가능성이 떠다니고 있는 느낌. 

여기서 기대와 차이점이 있는데, 기대는 지갑의 예시에 대해 1500프랑을 기대한 그 시점에서는 아직 지갑 속이 검증(판단)이 안 된 상태인데, 바위의 경우 부서지는 바위가 기대(깨지기 쉬움)되더라도 기대한 그 시점에서 이미 판단되어졌다(바위가 지금은 아직 건재함을 알고 있음)는 점에서 다름.

아무튼 그럼에도 파괴 자체는 사유가 아니라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이며,(이 부분에서 사르트르가 실재론과 관념론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는게 느껴짐) 깨지기 쉬움이라는 성질이 각인되어 있는 것은 바위의 존재 속임.

즉 바위의 파괴는 하나의 돌이킬 수 없는 절대적 사건이라는 사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비존재의 초현상성이 있음.

정리하면 뭐냐 일단 쇠망치로 쳤는데 바위가 안 부서졌다? 일단 그건 파괴가 아님. 바위가 파괴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깨지기 쉬움'을 도입한거

이제 쇠망치로 쳤을때 바위가 부서지는 상황에 대해 보면 치기 전에 깨진 바위(비존재)를 기대한다는 부분이 중요 -> 비존재의 초현상성


5. 피에르와 카페

나는 4시에 피에르를 만나기로 했다. 

나는 15분 늦게 도착한다.

피에르는 항상 시간을 정확하게 지킨다.

그는 나를 기다렸을까?

나는 실내의 손님들을 둘러본다.

그러고는 "그가 없구나."라고 말한다.


이 상황에 대해 고찰해볼거임.

일단 사르트르에 의하면 "지각에서는 항상 하나의 배경 위에 하나의 형태가 형성"된다고 함.

모든 것은 나의 주의 방향에 달려 있는데, 위 예시의 경우 '내가 피에르를 찾기 위해' 카페에 들어선다면 카페의 모든 대상은 종합적 배경으로 조직(최초의 무화작용)되고, 그 배경 위에 피에르가 나타나야 하는 것으로 주어진다고 함. 

이 무화작용은 나의 직관에 주어짐.

카페에서 피에르를 발견한다면 아까 지각의 의미에 따라 카페라는 배경 위에 피에르라는 녀석의 형태가 형성되겠지만, 카페에 피에르가 없음. 

이 상황에 대한 표현은 그대로 발췌해야 제대로 전해질 것 같음.


카페는 배경으로 머문다.

카페는 다만 나의 주변적인 주의에 대해 무차별적인 총체로서 계속 자기를 제공한다.

카페는 배후로 미끄러지고, 자신의 무화를 뒤쫓는다.

카페는 다만 하나의 정해진 형태를 위한 배경이 된다.

카페는 어디에서나 그 전면에 이 형태를 지니고 있다.

카페는 곳곳에서 이 형태를 나에게 제시한다.

나의 시선과 카페 내의 견고하고 실재적인 대상 사이로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이 형태, 그것은 정확히 끊임없는 소실이고, 카페의 무화의 배경 위에서 무로 떠오르는 피에르이다.

따라서 [나의] 직관에 제공되는 것은 무의 반짝거림이고, 배경의 무화가 형태의 출현을 부르고 요구하는 그 배경의 무이며, 또 형태 — 하나의 없는 것으로서 바탕의 배경에서 미끄러지는 무 — 이다.


이 상황 역시 나는 정확하게 피에르를 보기를 '기대'하고, 피에르의 부재를 발견하는 구조임.

이 상황에서도 부재하는 피에르는 카페가 무화되면서 배경으로 조직되는 '조건'임.

결론적으로 비존재는 부정의 판단(기대-검사)만으로 객관적인 사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부정의 판단이 비존재(피에르의 부재)에 의해 조건지워지고 지탱됨.

다시 정리해보자. 기대는 "(카페에) 피에르 있으려나?"고 판단은 "(카페에) 피에르 없네"이고 

질문은 "판단적 명제의 구조로서의 부정이 무의 기원에 있는가? 아니면, 그 반대로 실재의 구조로서의 무가 부정의 기원이며 근거인가?" 임.

전자가 틀린 이유는 "질문을 통해 기대하는 게 판단이 아니라 우리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근거 역할을 하는 존재의 드러남이라는 것."이기 때문이고

후자가 옳은 이유는 첫째로 파괴라는 행동을 통해 비존재(깨진바위, 피에르의 부재)의 초현상성을 확인했고, 둘째로 카페의 예시를 통해 무화작용이 나의 직관에 주어짐을 확인했기 때문임.


6. 무와 부정

그래서 부정이 뭔데? 부정의 이론을 어떻게 구조화할건데? 하면 부정에 뭔가 의미부여를 하고 형식을 넣을수록, 실제로 부정은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부정이라는 개념에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혀버리는 상황이 되어버림.

확실하게 하자고. 부정은 존재의 거부임. 즉 존재로부터 부정을 끌어낼 수는 없음.

그렇다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한 필요조건은, 사르트르에 따르면 "무가 존재에 붙어 다닌다는 것"이라고 함. 

어떻게 보면 I의 마지막 부분과 결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