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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한다. 요즘에는 날씨가 무더워서 더욱 무서운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마침 그런 쪽으로 유명한 작품들을 몇 알고 있었는데, 도서관에서 보니 민음사의 E. T. A. 호프만 선집이 얇아서 읽기 좋아 보였다. 직접 읽어보니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모래 사나이」는 지금까지 읽은 어느 소설들보다도 괴이한 소설이었다. 「이그나츠 데너」는 해피 엔딩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인간의 의지가 최후에 승리했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었다. 「팔룬의 광산」은 비참했지만 끝까지 사랑이 이어졌다는 점이 감동스러웠다. 심지어 실화에 기반한 소설이라 하니, 세상에는 별일이 다 있구나 싶었다.

「모래 사나이」는 읽으면서 내 이야기가 떠올랐다. 조금 유치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어렸을 때 징징이가 피눈물을 흘리다 죽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네모바지 스폰지밥」에 나오는 그 징징이가 맞다.) 그것이 깊은 트라우마로 박혀서, 지금도 아무것도 아닌 징징이의 그림이라도 볼때마다 흠칫흠칫 놀란다. 그래서 나타나엘의 삶에 코펠리우스(혹은 코폴라)가 들어왔을 때 나타나엘이 뱉은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무언가 끔찍한 것이 내 삶에 들어왔어!" 나는 겨우 징징이가 죽는 영상 때문에 평생토록 감정적인 지배를 받는데, 아버지의 기묘하고 비참한 최후를 직접 본 나타나엘은 오죽했을까. 물론 나타나엘은 광인으로 전락했지만 나는 그의 전락에 크게 공감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강렬한 이미지의 지배를 평생토록 받는다. 트라우마로 박힌 이미지는 이성마저도 압도하여,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만든다. 이미 주입된 환영에 지배당하여 스스로 환영을 증폭시키는 사람에게 '이성적으로 행동하라'라는 충고는 별 효력이 없다.

눈(眼) 모티프도 인상적이었다. 나타나엘의 트라우마는 눈에 관한 것이다. 모래 사나이가 눈을 빼간다는 괴담에 더해, 유년의 끔찍한 경험을 눈을 통해 받아들였으니, 나타나엘을 지배한 것은 전적으로 눈이었다. 비단 나타나엘이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의 오감 중에 가장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시각인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형이상학」에서 그렇게 주장했으니 나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감각은 어디까지나 감각일 뿐, 감각 너머의 진실을 바로 읽을 수는 없다. 감각을 걸러내고 편집하는 이성을 거쳐야 사람은 앎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이성을 압도하는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성을 오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타나엘이 올림피아를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면서도 그녀가 자동기계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 특히 의미심장하다. 망원경은 멀리 있는 물체를 더 잘 보이게 만드는, 즉 눈을 보강하는 도구다. 그러나 시각을 강화하는 것과는 별개로, 시각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도구인 이성이 망가져 있었으니, 그는 코펠리우스와의 과거가 이끄는 마력에 휩쓸려 올림피아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말그대로 병적인 환상이었던 셈이다. 모래 사나이는 나타나엘의 눈을 뽑지는 않았지만 망가뜨리기에는 충분했다.

모호한 부분도 있다. 스팔란차니, 코폴라, 코펠리우스의 관계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코펠리우스의 존재가 스팔란차니와 정말 연관이 있는 걸까, 아니면 코펠리우스와 닮은 코폴라가 일으킨 환상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나타나엘의 감각에서 재생된 것일까? 코펠리우스와 코폴라가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증거가 작중에서 제시되기는 하지만, 코펠리우스가 정말로 나타나엘이 생각하는 정도로 기이한 존재라면 사실적인 증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래 사나이」 속에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나타나엘의 망상인 것일까? 어쩌면 나타나엘이 직접 봤다고 믿는 과거사도 무언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진실과 환상을 명확하게 가르는 경계선이 과연 존재할까? 「모래 사나이」는 여러 질문을 낳는다.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소설이다.

「이그나츠 데너」에서는 우선 안드레스의 초인적인 의지에 감탄했다. 악마의 속삭임에 죄를 짓기도 했지만, 자신의 행실이 불러온 무서운 결과를 알고 철저히 경계한 덕에 마지막에는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기는 했지만, 손실이 그의 승리의 가치를 훼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데너(혹은 트라바키오)의 존재는 「모래 사나이」의 코펠리우스와는 달리 모든 면에서 비현실적이다. 즉 안드레스의 고초는 애초부터 치유받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가해한 일에 휩싸여도 정도(正道)를 걸은 덕분에, 안드레스는 모든 진실을 알고 뒤늦게나마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세상에는 부조리한 일이 많고, 어떤 것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다. 개인적인 직관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도 자주 벌어진다. 그러나 내 주변에 어떤 기괴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건 내가 가야 하는 길은 정해져 있다. 그리고 그 길을 충실히 걸으면 고난을 겪더라도 목적지에 이를 수는 있다. 다소 교훈적인 해석이기는 하지만, 나는 이렇듯 「이그나츠 데너」로부터 좋은 메시지를 얻었다.

「팔룬의 광산」은 묘사로 치면 세 작품 중 최고였다. 광산에 대한 무서우면서도 신비로운 묘사가 기억에 남는다. '사이키델릭'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묘사였다. 광산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호프만의 문장들을 보면 한 번 체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 것 같았다. 그러나 아름다운 묘사와는 달리 엘리스의 운명은 너무도 비참했다. 이미 우울한 조건에서 시작했음에도 토르베른에게 홀려 더 우울한 길로 스스로 들어가게 되다니. 운명의 장난 외에는 어떤 말로도 그의 고난을 설명할 수 없고, 그래서 더욱 엘리스의 이야기가 슬픈 것 같다. 그러나 허망하게 떠난 엘리스라도 끝까지 기억해 주는 연인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명이 그를 괴롭힌 대가로 베푼 서비스였던 것일까?

E. T. A. 호프만의 작품을 읽는 것은 두 번째다. 어렸을 때 「호두까기 인형」 동화책을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도 기발하고 아름다운 상상력에 감탄했는데, 이번에는 아름다운 내용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인상적인 상상력을 엿볼 수 있었다. 현실과 무관한 환상소설이라도 이렇게 깊은 인상을 받아 가는 기쁨이 있는 것 같다. 재밌는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