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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별다른 관심을 보내지 않지만, 오스카 와일드는 사회주의자였다. 확실히 그에 대한 인식에서 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벤야민이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적했듯, 보통의 사회주의자들은 예술지상주의에 적대적이기 때문이다(그는 당대의 대표적인 예술지상주의자들인 미래파들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예술지상주의는 폭력과 전쟁을 미화하고, 이를 정치의 영역에도 들여놓는다고 진단하며 말이다. 벤야민은 반대로 사회주의 진영은 예술을 정치화 함으로써 이에 대항한다고 믿었다.)
실은 벤야민 뿐만 아니라, 레닌과 같은 일선의 혁명가들도 예술지상주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술지상주의자들 중에도 손꼽히게 유명한 와일드가 사회주의자였다는 것은, 분명 독특한 사례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정치적 행보가 궁극적으로 그의 사상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는 지극히 예술지상주의적인 이유로 사회주의를 옹호했다. 마치 상술한 미래파들이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전쟁을 예찬했듯이 말이다(상기한 벤야민의 저작에서 길게 인용되는 필리포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을 참고하라. 아주 긴 수사를 통해 전쟁과 폭력에 관한 찬미가 펼쳐지고 있다.)
(여담으로 와일드와 이들 간에는 같은 예술지상주의자임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공통점도 있다. 바로 기계에 대한 예찬이다.
그런데 기계를 찬양하는 '이유'로 눈을 돌리면 다시 이들 간의 차이가 보인다. 이들은 가까운 시기에 살았지만, 그럼에도 기계를 보는 시각은 달랐다.
와일드의 경우,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처럼 기계를 인간 노동을 대체해줄 희망적인 도구로 보았다—실은 이러한 시각이 현대 사회에서 볼 때 다소 낙관적이었지만, 그에 관해서는 후술하겠다—반면 미래파들의 경우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기계를 통해 폭력을 구사하고, 세상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었다. 그들은 힘과 역동성 그 자체를 찬양했기 때문이다.
물론 결국 궁극적인 목적에서의 공통점 또한 결정적이다. 그들은 모두 미를 위해 기계화를 원했다.)
와일드의 계획도 결국에는 미를 향한 길이었다. 이 텍스트는 분명 정치적이지만, 와일드의 미학 강의이기도 하다. 그 자신의 미학을 현실의 측면에서 논하는 동안 정치철학의 영역에까지 들어섰다고 보는 게 정확할 듯 싶다.
일단은 그에게 구체적인 정치철학적 배경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해제를 보면 알 수 있듯, 그것은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 전통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단순한 넘겨짚기는 아니다. 실제로 와일드가 이 글을 내놓게 된 계기에는, 동료 문인이자 페이비언 협회의 일원이기도 했던 조지 버나드 쇼의 강연이 있었다.
페이비언 사회주의는 웹 부부(시드니 웹과 비어트리스 웹)의 저술들에서 비롯된 사상으로, 지금은 흔히 사민주의라고 부르는 흐름으로 계승되었다(현재 사민주의 정당으로 분류되는 영국 노동당의 직접적인 전신이 웹 부부와 그 지지자들이 결성한 페이비언 협회이다.) 의회와 대의제 정치를 통한 사회주의의 점진적 추구를 중점으로 한다는 내용을, 초창기부터 지금까지도 일관되게 보이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은 다른 흐름들도 많이 소개된 편이지만, 여전히 사회주의라는 단어에서 가장 쉽게 연상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일 듯하여 첨언하였다. 와일드가 여기서 거론하는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고 말이다.
우리로서는 독특하게도, 와일드는 이 저작 내내 개인주의와 사회주의를 연관짓는다(이론 속의 사회주의든, 현실사회주의든, 우리가 흔히 아는 마르크스주의의 경우 개인주의와는 연결되기 어려운 것이 맞다. 완벽하게 이론상으로 이루어지는 마르크스주의도 '같은 이해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최종적인 결과에서는 계급 자체가 해체되기에 그것 역시 사라지게 되는 것은 맞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마르크스주의도 최종적으로는 개인주의와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이상적인 마르크스주의에서도 프롤레타리아 독재 단계는 거치기 때문에, 결국 어떤 시점에서는 위의 가정이 필요하다. 물론 나는 특별히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중 어느 쪽이 더 옳다는 주장을 여기서 전혀 하지 않는다. 단지 이행 과정 때문에 와일드와 마르크스주의가 잘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이 역시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흐름과 연관이 있다. 당시 페이비언 협회에서는 『사회주의와 개인주의』라는 단행본을 내기도 했으며, 해당 저작에서 사회주의는 합리화된 개인주의의 연장선이라는 시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와일드가 사회주의와 개인주의를 조화시키는 자세한 논거들의 경우, 이후 구체적으로 다루도록 하겠다.
이 저서의 도입부에서부터 그 두 가지 방향은 연결되고 있다. 와일드는 가장 첫번째 장에서 가장 첫번째로 이렇게 말한다.
"사회주의가 세워지면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야비한 숙명, 현재 우리 모두를 너무나도 세게 옥죄는 그 숙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의심할 나위 없이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설적이지 못하고 과장된 이타주의에 빠져 자신의 삶을 망친다'며, 이타주의와 그에서 비롯되는 자선 행위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와일드에 따르면 자선은 체제로부터 고통 받는 사람들이 그 공포를 알아채지 못하게 하기에 옳지 않다. 또 사유재산이라는 제도의 악을 경감시키기 위해 사유재산을 사용하는 것은 부덕하다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반면 사회주의에서는 이타주의 없이도 구성원 전체의 조건이 개선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으로는 도입부에서 선언한 내용을 잇는다. 사회주의와 개인주의의 관계에 대한 생각 말이다. 그는 사회주의는 개인주의를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에서는 사유재산을 공공의 부로 바꾸고, 경쟁은 협력으로 대체될 것이다. 그 결과 사회는 건강한 유기체가 되어 구성원들에게 항구적으로 물질적인 안녕을 보장해줄 것이다(사실 이러한 생각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회주의 사상들의 대전제이긴 하다. 단지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는 그 방법론이 제시되지 않았지만, 여기까지는 아직 초반부이다.)
그는 많은 유한자 출신 저술가들과 과학자들의 예시를 들며, 어느 정도의 물질적인 풍요가 존재할 때에만 개인주의의 발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개인주의를 발달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노동계급 중에는 생계를 이유로 이러한 개인의 발달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빈번하기에, 그는 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더 나아가 사유재산을 인정함으로써, 인간은 그 자신이 소유한 것과 혼동되어 개인주의는 갈 곳을 잃었다고 덧붙인다.
또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산업적인 필요가 그 자체로 개인주의적인 문화를 약화시키기에, 그런 점에서도 현 체제는 단점이 명확하다고 덧붙인다. 그는 생계를 위한 활동도 실상 반강제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보고, 강압적인 요구에 포함한다(위 부분까지의 주장은, 현대적인 개인주의 사상들과는 상당히 입장이 다른 듯하다. 알다시피 대부분의 현대 개인주의 사상들은 시장을 개인의 자유가 가장 철저히 드러나는 곳으로 보고, 사유재산권을 제1의 권리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장이 구성원들의 선호를 가장 잘 반영하는지의 여부와, 그 반영 과정에서 생겨나는 불평등은 명백히 다른 층위에 있다. 전자가 사실이라고 한들, 우리가 후자를 추구하기 위한 행위를 반드시 중단해야 한다는 결론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사실이 그 자체로 당위로 이전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이론적•정책적 쟁론이 필요한 것이며, 섣불리 확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어떤 정치철학의 학파들은 "정치를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할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의 상이함 때문에, 이 주제에 관해서도 서로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당대로서는 드물게, 부유한 이 또한 사유재산에 집착하느라 불안함에 시달린다고 지적한다. 물건이나 물건의 상징인 화폐를 쟁여놓기 위해 인생을 낭비한다며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빈자와 더불어 부자의 처우도 더욱 개선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 사회주의가 권위주의적인 방향으로 흐른다면,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될 수 있다고 우려를 남기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산업화된 폭정'은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자신이 만난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실제적인 강제는 아닐지라도 권위에 상당히 물들어있는 듯하다고 지적한다. 이에 대해 사람은 오직 자발적일 때만 온전하며, 모든 연합은 상당 부분 자발적이어야 한다고 평가한다. 권위와 강제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그는 이 지점에서 "우리 시대의 사회주의는 매일 저녁마다 감독관이 일일이 '오늘 8시간 노동 했느냐'고 검사할 만큼 강압적이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소련과 같은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그보다 더한 강압들도 훨씬 많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 하다. 굴라크—본래 정치범 수용소이기는 하나, 생산량을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 등으로 일반 노동자들이나 농민들도 종종 수용되었다—같은 기관들도 있었으며, 의도적으로 노동을 피하는 사람들은 강제로 연행되었다. 개인적으로 사회주의를 악마화 하거나, 혹은 적대적으로 바라볼 생각은 없다. 다만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벌어진 일들을 없었던 것으로 치부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상술한 사유재산과 이를 둘러싼 역학관계 때문에, 여태껏 예술에서를 제외하고는 진정한 '인간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인간성은 진정한 개인주의의 발현인데, 대략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완벽한 인간성의 특징은 평화로, 그는 결코 언쟁이나 증명에 집착하지 않는다. 또한 물질적인 가치로 측정될 수 없는 지혜를 갖출 것이다. 그는 타인들에게 간섭이나 강요를 하지 않으며, 단지 그들을 사랑할 뿐이다. 미적인 것이 그 자체로 우리를 이롭게 하듯이, 그 역시 모두를 이롭게 할 것이다. 그러한 인간성은 자신만의 법칙과 권위를 세우고, 다른 어떤 법칙과 권위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은근히 슈티르너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아무래도 둘 다 극단적으로 개인주의를 선망하는 인물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슈티르너주의자에게 모든 보편적 가치는 유령이기에, 그들은 사유재산으로부터의 해방이 '인간성'이나 '박애' 등을 위해서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슈티르너가『비평가들』에서 포이어바흐에게 반박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논변으로 말이다. 결국 와일드는 더 크다고 간주되는 또 다른 보편적 가치를 위해 해방을 외쳤다는 점에서, 양자 간 차이도 있다.)
와일드에 따르면 예수가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예수가 말한 '빈자'와 '부자'는 오직 인간성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빈자는 긍정적으로 묘사되었으므로 인간성이 풍부한 사람을, 부자는 부정적으로 묘사되었으므로 인간성이 부족한 사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그는 이에 대한 근거로 예수도 사유재산이 허락된 사회에서 살았다는 점을 들고 있는데, 어느 정도 신약을 읽어보긴 한 입장에서 굉장히 의심스러운 해석이다. 내 생각에 직설적으로 읽으면, 예수가 말하는 빈자와 부자는 분명히 물질적인 측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와일드는 "그가 설교한 복음은 그러한 공동체에서는 빈약하고 해로운 음식을 먹고 꾀죄죄한 누더기를 걸치고 끔찍하고 불결한 곳에서 자는 사람이 우위에 있으며 건강하고 기쁨이 넘치고 품위 있는 조건에서 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때 그곳에서도 잘못된 것이었을 테며, 물론 지금 여기 영국에서는 훨씬 더 잘못된 것일 테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거의 노동계급과 빈민들에 대해 경멸적인 언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결국에는 계급해방을 지지하는 사회주의자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적잖이 당황스러운 대목이다. 또한 예수가 생각하는 '인간성'이라는 것이, 와일드가 말하는 '품위'나 '기쁨—또는 활기—이 넘치는' 상태와 같은 것이라고는 도대체 납득하기가 어렵다. 와일드의 계획은 단적으로 '개인주의의 평등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상술한 대로 이 개인주의의 가치가 일정 부분 귀족적으로도 보인다는 것을 감안하면, 예수의 가치관과는 긴장이 없지 않을 듯하다.)
더 나아가 예수는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대신 인간성 발달에 골몰하라는 주장을 해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예수와 부유한 청년(마르코서에 나오는 이야기로, 아주 유명하기 때문에 설명은 필요 없을 듯하다)의 일화를 통해 부자들도 재산을 포기할 때 더 완벽한 개인주의자가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요컨대 그의 판단에서는 부자가 대체로 빈자들보다 더 도덕적이며, 더 지적이며, 판단력도 더 바르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사유재산만 버리면 부유한 청년이 완전히 '그 자신'이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라고 말한다(그런데 알다시피 주류적인 해석은 아니다. 예수는 명백히 '재산에 휘둘리지 말라'가 아니라, '처분한 재산으로 빈민들을 구제하라'에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청년이 끝내 거절하고 떠나자,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을 '부자는 부만 포기한다면 인간적으로 완성된다'고 해석하는 것은, 다소 끼워맞추기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어서 간통을 저지른 여인과 예수(요한서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 이야기 역시 아주 유명한 것이다)의 사례를 들어, 사회의 법률을 어기더라도 개인주의의 관점에서 도덕적으로 진실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 과정에서 예수가 그녀를 용서한 이유는 회개해서가 아니라 간통 과정에서 있었던 사랑이 진실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이 역시도 주류적인 해석은 아니다. 나는 이 일화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하나, 적어도 원전 기준으로 전혀 그러한 기준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안다.)
위 내용은 자본주의 질서 하의 가족 제도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는 사회주의가 전통적인 가족 질서를 해체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왜냐하면 작금의 결혼과 가족 제도는 사유재산이 발생한 지점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대략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다룬 것과 유사한 관점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는 엥겔스처럼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는다. 와일드는 엥겔스보다 한 세대 정도 후대의 인물이기 때문에, 해당 저서를 읽었거나 혹은 당대의 인류학 자료를 접한 것으로 추측된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인 사람이며, 그처럼 살고 싶다면 그의 행실을 모방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완벽함을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물론 그가 반면교사로 든 예시들은 분명 외면적으로만 모방하는, 신자들 입장에서는 매우 한심하게 여겨질 법한 것들이 맞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예수의 행실을 본받는 것보다 자기 나름 대로 살아가라는 것이 더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한심하게 본인이 십자가 지고 고행하는 모방이 아니라, 예수의 격언들을 현실에 맞춰 실천함으로써 본받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도 충분히 하나의 '예수 같은' 삶이 아닌가?—본인들도 지켰는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다만—지금까지 그리스도교 교회들에서는 이러한 방향을 '예수 같은' 삶을 사는 방식으로서 권장해왔다. 물론 나는 무신론자이므로, 딱히 기존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주된 방침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저 그런 길도 인정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말할 뿐이다.
나는 사실 와일드가 굳이 왜 예수를 자세히 다루고, 이를 바그너나 셸리 등등의 예술가들과 '개인주의'라는 연결고리로 묶어놓았는지 잘 모르겠다. 셸리나 바이런을 사용하는 것은 좋지만—바그너도 예시로 나오긴 했으나, 그는 흔히 생각하는 개인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바그너는 독일 민족주의자였다.—, 하려는 주장을 감안하면 굳이 예수를 언급할 이유는 없었다. 얼마 전에 다뤘던 생 시몽과 비교했을 때, 와일드는 예수를 언급하면서도 거의 그 사상을 채택하지 않고 있다. 더군다나 위에서도 다루고 있듯, 괜히 성경을 논란이 있을 법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바람에 주장의 완결성이 하락한다는 결점이 있다.)
이어서 그는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기존 정부들이 모두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양태의 정부는 실패작이며, 민주주의에는 희망이 있었지만 이제는 민중의 폭정이나 다름 없어졌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또 모든 권위는 사람들을 저급하게 만들며, 전제적으로 구사될 때는 곧 개인주의적 항쟁을 불러일으키지만, 어느 정도의 안락한 권위는 사람들을 천박하고 야만적으로 만든다고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해체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에 더해 그는 처벌이라는 개념 자체도 해체하겠다고 덧붙인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왜냐하면 처벌이 가해질 수록 더 많은 범죄가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처벌을 줄인 곳에서는 항상 결과가 좋았으며, 실제 범죄도 줄었다고 말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처벌이 없다면 범죄도 없을 것이고, 오늘날 범죄자라고 불리는 이들은 단지 치료 대상이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어떤 범죄는 재산에 대해 저지른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재산 소유리는 잘못된 체제에서 발생한 비참함과 분노에서 싹튼 것이기에, 체제가 폐기된다면 그러한 범죄 또한 사라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럼 국가는 행정도 사법도 안 하는데 뭘 하는가? 와일드는 국가가 노동을 조직할 '자발적인' 연합이며, 동시에 각종 물품들의 제조 및 공급자 역할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또한 근래에 육체 노동을 신성시 하는 흐름이 있으나, 자신은 동의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그는 도덕적•육체적 존엄성 등과 육체 노동이 양립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가 담당하는가? 그는 기계가 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배치된 기계들은 공공의 소유로서, 조직화 된 관리를 거쳐야 한다는 이야기 역시 덧붙이고 있다(나로서는 지금까지 제시된 그의 정체론과 법률 개혁에 대한 모든 생각이 전부 터무니 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에 관한 와일드의 성취와는 별개로, 그의 정치적 생각들은 적어도 구체적으로는 형편 없다고 판단된다. 다소 강한 어조로 적었지만, 위에서 와일드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읽어봤다면 납득이 갈 것이다.
유일하게 민주주의에 관한 멸시는 당대에는 적잖이 반박하기 곤란했으리라고 본다. 물론 와일드의 시대에는 이미 민주공화정이 대의민주제 역시 포괄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과거의 민주정에서 발생했던 부작용을 겹쳐보는 인식이 여전히 만연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주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이론은 와일드 사후인 20세기 중반 즈음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당대 지식인들 중 결코 적지 않은 수가 동조할 만한 생각이었으며, 특별히 그의 탓은 아니다.
그런데 나머지 부분들의 경우 비판 받을 구석이 상당히 많아 보인다. 이는 무권위/무질서를 희망하는 극단적인 사상들에 대한 아주 고전적인 반박이기도 하다. 결국 중앙 권위 없이 어떻게 국가라는 단위의 운영이 가능할 것이며, 또한 법률과 처벌 기제가 없이 어떻게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고 시민들을 지킬 것인지 하는 부분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와일드가 희망하는 전면 기계화나 물적 재산의 보급과 같은 일들은 매우 강력한 행정력을 요구하는 것들이다. 국가나 사회 단위를 중앙 권위 없이 꾸린다는 생각에서 그나마 현실적인 것은 차라리 노동조합주의일 것이다. 와일드처럼 철저한 기계화를 요구하지도 않고, 소규모 지부들을 중심으로 노동자 사회를 조직하는 것이 방침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중앙 권위를 대체하고도 일정 크기 이상의 사회 단위를 유지하려면 적어도 점조직과 같은 형태여야 한다. 하지만 와일드의 생각은 그런 환경에서는 추구될 수 없다. 실은 누군가 조직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부터가, 인간은 오직 지적인 노동에만 힘을 써야 한다는 그의 지론과 어긋날 수 있다는 생각 역시 든다.
법률 개혁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하면, 굳이 더 논해야 하는지 싶다. 일단 와일드는 '처벌이 곧 범죄를 만들어내며, 실제로 처벌이 적으면 범죄도 적어지는 경향이 있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을 할 때는 그 어떤 경험적 증거나 논리적 추론도 제시되지 않는다. 그냥 '내 생각에 그런 것 같다' 수준에 그친다. 이는 시대의 한계라고 할 수 없는데, 이유는 그가 19세기 말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상술했듯, 그는 엥겔스보다도 늦은 시기에 활동한 사람이다. 그런데 엥겔스는 물론이고, 와일드와 동시대인인 베버 등등의 주장은 모두 최소 둘 중에 하나는 제대로 충족하고 있지 않은가?
한 가지 측면을 더 다루자면, 사유재산이 해체됐을 때 생계형 범죄가 줄어들 것이라고 추론한 것까지는 문제될 게 없다. 그런데 다른 범죄들도 모두 재산 소유라는 체제에서 비롯되었다고 간주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런 허술한 인과 추론에 기대어 형법 체계를 전부 해체했다가는 엄청난 해악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위에서 그가 사유재산제 때문에 현재의 가족 형태가 형성 되었다고 주장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 부분을 감안한다면, 그는 아마도 당대의 인류학 서적이나 혹은 엥겔스의 서적 등을 읽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히 사유재산이 없었던 원시 사회에서도 어떠한 규범과 처벌 기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적혀있을 것이다. 내가 알기로, 엥겔스의 해당 저서에서는 부록에 실린 루이스 헨리 모건의 『고대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서평에 부친 엥겔스의 메모에서 '원시 사회의 법과 지배'라는 논제가 등장한다. 그것은 차치하고, 애초에 엥겔스의 저작 본서에도 그 주제가 아예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저작의 토대 중 하나가 『고대사회』라고 말했고, 그에 대해 마르크스가 쓴 서평에도 이 논제가 나왔으므로, 아마 루이스 헨리 모건의 책에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미학에 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는 와일드의 정치적 견해보다도 예술적 견해 쪽을 궁금해 할 것이다. 게다가 전술했듯, 그는 궁극적으로 미의 실현을 위해 사회주의를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입장이다. 전반부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일 수 밖에 없다.
그는 예술이 존재하는 가장 강렬한 개인주의이며, 작금의 상황에서는 유일하게 진정성까지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범죄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이기적이기 때문에 개인만 생각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범죄라는 건 피해자가 있어야 성립하는 것이기에, 타인을 인식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생각해보면 법률에 저촉되고, 실제로 어떠한 조치를 강제 받을 만한 사항에서 모든 개인이 타인에게 향할 영향을 인식하는 경우만 있지는 않다. 어떤 사례들은 현재 시점에서 인식할 수 있는 명시적 피해자가 아니라, 잠정적으로 직접적인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제정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불법촬영물은 시청하는 것도 불법이라는 것이 예시가 될 수 있겠다. 해당 영상물에 등장하는 피해자는 그것이 널리 재생산될 때 직접적인 해악을 입게 된다. 그런데 불법적인 경로에서 재생산 된—하지만 개인이 실제로 불법적인 경로에서, 불법촬영물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접했는지 밝혀내기가 참으로 난해하다. 그래서 실제로는 시청만 가지고는 처벌하지 않는다.—불법촬영물을 조회한 인물들이 재생산할 가능성이 우려될 만한 수준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청 자체도 일단은 금지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오직 예술만이 잠정적으로 유일하게 진정한 개인주의적 활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에게 예술가는 주변의 개입 없이, 자신의 기쁨을 위해 미적인 것을 생산하는 사람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와일드에게 있어 그는 진정한 예술가가 아니다. 이는 그를 포함하여, 예술지상주의자들의 미학적 견해를 잘 요약해주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이러한 예술과 예술가의 정의가 맞는지의 여부는 제쳐두도록 하자. 예술지상주의와 정치적 예술의 대립은 매우 뿌리깊은 주제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렇기에 예술은 대중이나 권위의 통제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술이 대중적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예술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지금까지 대중이 영국의 소설과 연극에 개입해온 탓에, 그 수준이 매우 천박하고 형편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에 따르면 대중은 새로움을 싫어하는데, 실상 예술의 진보는 상당 부분 주제를 계속 확장하는 것에 달려 있다. 대중은 예술가가 자신만의 주제를 자신의 방식 대로 다루는, 바로 그런 새로움을 두려워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막기 위해서 '고전'들을 권위적인 방식으로 휘두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요컨대, 잘 알려진 고전들처럼 쓰지 않으면 곧장 야유를 퍼붓는다는 것이다. 대중들은 새로운 작품들에 대하여 흔히 '난해하다', '부도덕하다' 등의 용어로 지칭하고는 하는데, 와일드는 오히려 이것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그동안 다루지 않은 주제를 다루었다는 수식이나 마찬가지라고 본다.
또 '불건전한'이라는 용어로 자주 쓰이는데, 그는 이에 대해서는 분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예술 작품에 대한 표현은 스타일이나 주제, 혹은 두 가지 모두에 붙는 것이다. 스타일에서의 건전함이란 작품의 재료가 가진 아름다움을 살려내는 것이며, 또한 그것을 미적인 효과로써 사용하는 것이다. 주제에서의 건전함이란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의 기질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즉 '건전한' 작품이란 본래 완성도와 개성을 모두 갖춘 것을 말한다.
반면 '불건전한'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가 자신의 기호가 아니라, 대중이 돈을 지불할 것이라고 생각한 주제를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이 생각한 건전한 예술은 역으로 불건전하고, 반대로 불건전한 예술은 건전한 것이다.
그런데 대중들은 이러한 평가의 척도를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사용한다. 심지어는 '여론'을 이용해서, 편견을 호도하기까지 한다. 여기까지가 와일드의 생각이다(와일드는 여론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심지어는 대의만 적절하다면, 차라리 대중들의 물리적 폭력을 옹호하는 게 낫겠다고 본다.
나는 제한된 정부 안에서 시민들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여론의 기능이 필수적이라고 변함 없이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와일드는 미학을 중점적으로 다루니, 생략하겠다. 정말 자주 언급하게 되는 듯한데, 이런 주제에 관해서는 알렉시 드 토크빌의 『아메리카의 민주주의』에서 얻을 것이 아주 많다.
한 가지만 첨언하자면, 와일드의 언론 혐오에 있어 딱 하나 동의하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공인의 사생활에 대한 취재이다. 그런 건 기껏해야 가십거리나 될 것이지, 정치권력을 이용한 범죄가 아닌 이상에야 통치 행위와는 하등의 연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어서 그는 예술을 감상하는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구라도 예술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 권위를 휘두르려는 마음으로 임한다면, 그는 아무런 예술적 감명도 얻지 못할 것이다. 예술이 관객을 압도하는 것이지, 관객이 예술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다. 관객은 수용이 그 역할이다. 자신의 예술에 관한 모든 편견을 뒤로 저버리고, 당해의 작품을 잘 이해하는 데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또 진정한 예술적 기질이란 창조적인 매체와 조건을 통해 새롭고 아름다운 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조각이나 회화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연극과 같은 장르들에서 더 그러하다. 그림은 시간의 연속에 구애 받지 않기에, 한순간에 통일성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은 그렇지 않다. 연극은 각 막들을 통과하는 유기적 진행을 통해 그 예술성이 비로소 파악될 수도 있다. 여기까지가 예술의 감상에 대한 와일드의 주장이다.
하지만 그는 대중을 조소하려는 행위도 똑같이 대중을 인식한 것이므로, 작품을 망쳐놓을 수 있다고 본다. 결국 그가 지향하는 태도는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가 아니라 "대중 따위는 신경도 쓰지 마라."에 가까울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설명한 미학들을 통하여, 자신의 계획들이 비실용적이라는 지적에 답한다. 결론은 비실용적인 게 맞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에 비실용적인 것이고, 그럼에도 해야하는 것이기에 주장하겠다고 말한다. 모두가 인간 본성은 영원히 같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프랑스 혁명으로 모든 게 뒤집혔다는 말을 덧붙이며 말이다(결국은 앞서 설명한 '새로움'의 개념을 정치철학에까지 적용하려고 한 셈이다. 나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은 예술적인 계획일 수도 있다. 미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와 예술은 같은 층위에 있지 않다. 정치는 이상을 목표로서 고정해놓은 뒤, 구현된 현실에서 그것에 맞춰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예술지상주의적 예술은 예술가의 설계 그대로 작동할지도 모르겠지만, 시민들을 통솔하는 일은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여담으로, 프랑스 혁명의 발생 과정에 대해서도 당대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었다. 토크빌의 경우 『앙시앙 레짐과 프랑스 혁명』에서 이미 혁명의 조짐이 꽤나 오래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그것은 실상 급진적인 변화라고만 볼 수는 없다고 주정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지론을 잘 드러내는 한 부분을 인용하며 끝내려고 한다.
"(...)어떤 사람의 삶에서 최고의 목표가 자신의 발전이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자신의 개성을 온전히 실현하는 데 가장 적합하게 보이는 방식으로 산다면, 그는 이기적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이것이 모두가 살아야 하는 방식이다. 이기적이라는 것은 자기가 바라는 대로 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자기가 바라는 대로 살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기적이지 않음은 다른 사람들을 내버려 두는 것, 그들에게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자신을 위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자기를 위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아예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남들에게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라고, 그래서 같은 의견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무지하고 이기적이다. 왜 그가 그래야 하는가?"
나는 그의 사고방식에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몇몇 부분은 자신을 개인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경우, 귀담아 들을 만한 것들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