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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대해 말하고 글을 쓰는 행위는 종종 깊은 무력감으로 끝난다. 내가 느끼는 이 감동의 실체는 무엇인지, 왜 이 소리의 조합이 나를 뒤흔드는지 설명하려 할수록 언어는 공허하게 겉돌았다. 아름다운 미사여구는 감상의 껍데기를 핥을 뿐이고, 사회문화적 분석은 정작 내 고막을 울리는 물리적 현상 자체를 비껴간다. ‘그냥 좋은 걸 어떡해’라는 나의 말은 결국 내밀한 감상의 세계를 타인에게 번역하는 데 실패했다는 자기 선언과 다름없었다.


전대한의 『비개념원리』는 이러한 내게, 전혀 다른 종류의 무기를 쥐여준 책이다. 작가의 전공인 분석철학과 미학의 배경은 서문부터 마지막 장까지 책 전체를 관통하는 방법론 그 자체가 된다. 이 책은 유려한 에세이의 모음이 아니라, 하나의 잘 설계된 철학 논증에 가깝다.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던 개념(장르, 속도, 듣기, 의미 등)을 해부대 위에 올려놓고, 그것이 사실 얼마나 모호하고 허술한 약속이었는지를 폭로한다. 그리고 그 폐허 위에서, 철학이라는 도구로 더 단단하고 정교한 개념을 재건축한다.


이 과정이 특히 더 특별했던 이유는, 매 챕터의 입구에서 나를 맞아준 독특한 ‘안내자’ 덕분이다. 본격적인 논증이 시작되기도 전에, 앞으로 펼쳐질 험난한 사유의 여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만화이자 도식이 먼저 등장한다. 복잡하게 얽힌 철학적 개념들을 단순한 선과 도형으로 환원시킨 이 ‘지도’들은, 처음에는 앞으로 닥칠 내용의 난해함을 암시하는 경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글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을 때마다, 나는 몇 번이고 챕터의 첫 장으로 돌아와 이 지도들을 다시 확인했다. 그것은 단순한 요약을 넘어, 독자를 위해 마련해 둔 친절한 ‘베이스캠프’였다. 이 베이스캠프 덕분에 나는 프레드 드레츠키의 인식론이나 비트겐슈타인의 ‘국면’ 개념 같은 낯선 지형 앞에서 길을 잃지 않고 다음 목적지로 나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혼돈 그 자체였던 동시대 전자음악의 ‘장르’ 지도를 새로 그릴 수 있는 도구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나는 음악을 듣고 그것과 관련된 글들을 읽을 때, ‘디컨스트럭티드 클럽’과 ‘콘셉트로니카’, ‘하이퍼팝’과 ‘버블검 베이스’처럼, 분명 비슷한 음악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이름은 다른 이 혼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막막했다. 기존의 비평들은 그저 소리의 특징 몇 개를 나열하며 둘의 차이를 설명하려 했지만, 언제나 경계는 흐릿했고 예외는 속출했다.


작가는 이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낡은 지도를 불태우고 새로운 좌표축을 제안한다. 「C와 D 사이에서」를 통해 그는 ‘디컨스트럭티드 클럽’과 ‘콘셉트로니카’가 서로 다른 소리가 아니라, 동일한 소리를 두고 서로 다른 ‘청취 양태’를 요구하는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전자는 기존 클럽 음악의 목적(춤과 여흥 등)을 해체하며 듣기를, 후자는 새로운 목적(정치적, 개념적 메시지 등)을 설정하며 듣기를 제안한다는 분석은 안개 속에 있던 두 개념을 선명하게 분리해 주었다.


이처럼 장르를 ‘듣는 방식’의 문제로 전환하는 대담한 시도가 가능한 이유는, 저자가 장르 개념 자체를 바라보는 우리의 낡은 시선을 근본적으로 교정하기 때문이다. 그는 장르를 음악 고유의 ‘소리적 특질’이라는 고정된 본질로 정의하려는 시도 자체가 근본적인 오류라고 지적한다. 음악에는 물의 분자구조(H2O)처럼 고정불변하는 본질이란 없다는 것이다. 이 진단은 내 오랜 답답함의 근원을 정통으로 꿰뚫었다. 내가 혼란스러웠던 이유는 장르들의 차이를 몰라서가 아니라, ‘소리’라는 부정확한 지도 위에서 길을 찾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과잉의 감각을 재현하는 하이퍼팝」에서의 분석은 더욱 급진적이다. 하이퍼팝은 특정 사운드의 집합이 아니라, 인간의 지각이 인지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정보를 손실하는 그 아찔한 한계를 음악적으로 재현하려는 시도라고 주장한다. 즉, 하이퍼팝은 ‘과잉의 감각’을 환기시키는 음악을 모두 가리키는 일종의 ‘분류어(sortal)’로 재정의된다. 장르는 더 이상 음악의 내재적 속성이 아니라, 우리가 음악을 듣는 ‘태도’와 ‘방식’에 관한 제안이 된다. 이 새로운 관점을 장착하는 순간, 혼란스럽던 장르의 지도가 비로소 질서를 찾으며 명료해지는 지적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책의 진정한 힘은, 이처럼 외부의 명명법을 넘어 내 개인의 감상 경험 깊숙이 파고들 때 드러났다. 나는 오랫동안 노이즈 음악과 소리의 질감이 도드라지는 음악을 천착해왔다. 하지만 그 매력을 설명하는 일은 언제나 좌절의 연속이었다. ‘음악이 아닌 소리로 음악을 만든다’는 식의 역설에 기댄 설명은 공허했고, ‘불온하다’거나 ‘새롭다’는 식의 수사는 내 경험의 핵심을 담아내지 못했다. 내가 느끼는 것은 모순의 쾌감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해방감에 가까웠다.


「‘노이즈의 역설’이라는 사이비 역설에 관하여」는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그는 이른바 ‘노이즈의 역설’이 사실은 ‘노이즈는 비음악적이어야만 한다’는 근거 없는 당위 명제에 기댄 사이비 역설에 불과하다고 논파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노이즈의 힘이 역설이 아닌 ‘고정불변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노이즈는 공사장 소음으로도, 바이닐의 크랙클로도, 바람 소리로도 들릴 수 있다. 즉, 너무 많은 것을 재현할 수 있기에 오히려 그 어떤 것으로도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고정불변성’이야말로 노이즈가 품은 무한한 잠재성의 원천이라는 주장은, 내가 노이즈 앞에서 느끼던 막연한 자유와 해방감의 정체를 정확히 언어화해주었다. 그것은 모순이 아니라 가능성이었다.


나아가 「촉각적 경험으로서의 듣기에 관한 소고」는 내 또 다른 오랜 감각적 경험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는 특정 베이스라인의 진동을 귀가 아닌 가슴으로 느꼈고, 거친 질감의 소리를 들으며 마치 사포로 피부를 문지르는 듯한 감각을 받곤 했다. 이 글은 갤러리에 전시된 ‘소리 나는 조각’을 분석하며, 이 경험이 귀로만 듣는 청각적 경험이 아니라, 공간을 배회하고 조각의 표면을 상상하며 듣는 ‘촉각적 듣기’라고 주장한다. ‘듣기’는 더 이상 청각 기관의 전유물이 아니라, 다른 감각과 결합하고 확장될 수 있는 유연한 개념이 된다. 이 주장은 내가 음악을 들으며 느꼈던 신체적 감각이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충분히 탐구할 가치가 있는 정당한 지각 경험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처럼 이 책의 야심은 장르라는 외부의 틀과 노이즈라는 특수한 대상을 넘어, 더 깊숙한 곳, 즉 ‘듣기’라는 우리의 보편적 감각 경험 자체를 해부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다른 국면으로 듣기 : 느려짐 혹은 빨라짐」에서는 틱.톡에서 유행하는 ‘스페드업(Sped-up)’ 음악에 대한 내 오랜 의문을 풀어주었다. 원곡의 매력을 훼손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단순한 가속이 왜 매력적일까? 책은 ‘음악의 속도’라는 개념 자체가 물리적으로는 성립 불가능한 은유임을 폭로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비트겐슈타인의 ‘국면(aspect)’ 개념을 가져온다. 음악의 빠르기란, 우리가 음악을 들으며 ‘행진곡의 국면’, ‘댄스곡의 국면’ 등 서로 다른 국면들을 얼마나 자주 전환하며 마주하는지에 대한 경험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스페드업’은 단순히 빨라진 음악이 아니라,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국면 전환을 압축적으로 체험하게 함으로써 원곡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쾌감을 주는 새로운 음악이 된다.


가장 대담하고 파격적인 주장은 「음악 이해에 관한 지각적 관점을 제안하기」에서 펼쳐진다. ‘음악적 의미’란 우리가 화성이나 리듬 같은 내적 단서들을 분석해서 ‘추론’해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색깔이나 모양처럼 소리로부터 직접 ‘지각’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음악을 ‘이해한다’고 말할 때의 경험, 즉 머리로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직관하는 듯한 그 경험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시도다. 비록 작가 스스로 엉성한 제안이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이 주장은 음악과 의미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믿음에 도전장을 내민다.


물론, 이토록 모든 것을 분석하고 재정의하려는 시도가 때로는 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의 날카로운 메스가 음악이 가진 사회적, 정치적 맥락이나 그것을 둘러싼 자본의 역학 같은, 조금 더 지저분하고 복잡한 현실의 결을 놓치고 있다는 인상도 받는다. 모든 것을 ‘지각’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의문은 책을 덮은 뒤에도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비개념원리』는 정답을 알려주는 교과서가 아니다. 이것은 질문을 던지는 ‘도구상자’이자, 함께 사유하자고 말을 거는 ‘지적 스파링 파트너’다.


이 책과의 씨름 끝에, 나는 내 귀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설명할 더 정교하고 강력한 언어를 얻게 되었다. 더 이상 내 취향을 ‘그냥 좋은 것’이라고 말하며 도망치지 않을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운영체제는 벌써부터 첫 번째 프로그램을 가동하라고 제안한다. 추후 기회가 된다면, 나는 이 책에서 얻은 도구들을 들고 오랫동안 품어왔던 또 다른 질문과 씨름해볼 생각이다. 바로 청자가 전혀 모르는 언어로 된 가사를 담은 음악에 대한 것이다. 청취의 순간, 의미를 해독할 수 없는 이 가사들은 과연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 이것을 우리는 여전히 맥락적, 언어적 요소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의미는 제거된 채 소리의 질감과 억양만이 남아 악기처럼 기능하는 순수한 음악적, 청각적 요소로 봐야 하는가? 어쩌면 작가가 ‘노이즈’를 ‘고정불변성’으로 분석했듯, 이 ‘이해 불가능한 언어’ 또한 의미의 공백 속에 청자의 상상과 감정을 채워 넣게 하는, 가장 창의적인 ‘소닉 픽션’의 재료가 되는 것은 아닐까.


『비개념원리』는 이처럼 답을 주는 대신, 내 안의 질문들을 더 날카롭고 흥미로운 탐험으로 이끈다. 다음 탐험이 벌써부터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