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굉장히 인상깊었던 글이라 도서관에서 복사해와서 옮겨적기까지 했었음



왜 무속과 사이비는 사라지지 않는가

이창익 종교학자


문명이 진보하고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합리성이 증진되면 원시성, 비과학성, 비합리성의 대명사인 종교는 당연히 쇠퇴하여 사라져야 하는 것 아닌가? 사실 이 물음은 너무 오래되고 철 지나고 진부한 것이어서 여전히 우리가 맥없이 동일한 질문에 갇혀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지경이다. 질문의 갱신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먼 미래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똑같은 질문의 가장자리를 맴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질문 안에는 '과학 대 종교'라는 매우 낡은 대립 구도가 도사리고 있다. 오늘날 과학은 종교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종교의 잔존이나 생존 여부에 전혀 영향받지 않은 채 과학은 자기만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의 사정은 다르다. 종교는 과학의 발전 주기 속에서 매번 존재의 위기에 직면한다. 과학이 갱신하는 세계 이미지, 즉 세계상이 달라질 때마다 종교의 형식과 내용은 그 세계상의 직간접적인 도전을 받고 변화를 거듭한다. 일반적인 추측과 달리 종교는 과학을 의식하는 섬세한 감수성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종교는 정체된 전통이나 곻정된 형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영향을 받으면서 지속적인 변형을 꾀하는 창조적인 괴물이다. 나아가 세상에 대한 서로 다른 반응 양태를 구체화하며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무수한 종교들의 집합체가 생성되는 것이다.


[종교와 과학의 대립이라는 허상]

종교와 과학의 대립 구도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종교적 위기 상황에서 기독교가 만들어 낸 허구적인 장치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당시 이러한 대립 구도를 통해 종교는 과학과 맞대결 하기보다 '과학의 빈틈'을 탐색하고 있었다. 바로 이 빈틈이 향후 종교가 기생하고 서식할 '무과학의 영역'이었다. 이처럼 종교와 과학의 대립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은 과학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을 구획하고 획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종교는 대립 구도를 작동시킴으로써 과학의 대립물로 성장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과학은 자연을, 종교는 초자연을 다룬다는 식의 도식이 정립되었다. 또는 과학은 생명을, 종교는 죽음이나 죽음 너머의 생명을 관리한다는 생사 분업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종교와 과학의 대립을 통해 종교가 획득한 근대적인 생존 도구였다.

그러나 과학은 종교와의 대립 구도를 통해 얻어낼 것이 별로 없었다. 사회 안에서 종교를 삭제할 때 비로소 과학이 과학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의 잔존 여부는 과학의 발전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 과학적인 사고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진화론과 창조론의 극단적인 대립을 상상하면서 종교와 과학의 공존 불가능성을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유신론적 진화론의 예처럼 창조론과 진화론은 얼마든지 혼융될 수 있다. 극단적인 창조론을 고수하는 기독교인은 소수일 뿐이다. 따라서 과학적인 입장에서 상상하는 원시적이고 비과학적이며 비합리적인 형태의 종교는 세상에 거의 없다. 과학과 정면 대립하는 단일체로서의 종교는 과학이 종교로부터 전유한 허상일 뿐이다.

과학과 달리 종교는 자연 세계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지 않는다. 종교가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 세계가 아니라 인간이 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종교는 "사회로부터의 구'원"을 이야기한다. 인간의 고통, 갈등, 절망의 근원은 바로 사회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종교가 그리는 죽음조차도 인간의 사회 질서를 전복하는 새로운 상상력에 의해 채색된다. 종교는 우리를 질식시키고 좌절케 하는 사회로부터의 출구를 모색하고 때로는 사회에서 퇴장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이 똑같은 객체를 두고 지적 경합을 벌이는 일은 매우 드물다.

과학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왜 현대 세계에서 무속, 미신, 사이비 종교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는지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과학과 종교의 대립이라는 진부한 도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과학의 발전과 종교의 쇠퇴 사이에는 필연적인 함수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의 세계 장악력이 급격히 감소했기 때문에 우리는 '종교적인 것'의 의심스러운 현대적 귀환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교육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해법'으로 쉽게 미끄러지는 인간의 심리적 나약함을 탓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는 어쩌면 과학의 발전이 이룩한 현대 세계 자체가 '종교적인 것'의 회귀를 자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과학이 자극하는 종교성은 무엇인지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연성 종교의 위로]

현대 세계에서는 모든 사물이 종교의 마법에서 풀려나 세속화되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종교 안에서 고정된 의미를 지니던 사물들이 종교 밖으로 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실재를 감싸고 있던 실화, 주술, 성스러움 같은 종교적인 껍질이 벗겨지면서 인간이 비로소 벌거벗은 실재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의 모든 의미를 결정하던 신이 세계에서 증발하면서 이제는 인간이 모든 사물과 현상의 의미를 스스로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세속화된 사회에서는 신이 더 이상 사건의 최종적인 의미를 결정하지 않는다. 세속 사회는 종교의 마법에서 풀려난 자유로운 장소이면서도, 인간이 오롯이 의미의 불투명성을 감수해야 하는 불안의 장소이기도 하다.

현대 세계는 성스러움으로 충만한 세계에는 없었던 고통스러운 질문으로 가득 찬 곳이다. "왜 하필 나인가, 나는 왜 태어났는가, 내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살아가면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왜 이러한 질병이나 사고나 실패가 나에게 일어났는가,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면 삶은 어떤 쓸모를 갖는가?" 신의 죽음과 함께 세속화된 사회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혹사하는 수많은 의문이 내면에서 솟아난다. 더 이상 주문과도 같은 절대적인 해답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이 모든 문제에 대해 자기만의 해답을 산출해야 한다. 신이 남긴 빈자리는 귀를 후벼 파는 절규로 가득찬 곳이다.

절대적인 종교가 없는 세상에서, 어떤 인간은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 되어 편집증적 망상에 빠지거나 아니면 아예 문제의 원천인 자기를 제거함으로써 문제 자체를 없애고자 한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애를 증폭해 절대적인 존재가 되려 하거나 자기를 폐기하려는 욕망에 의해 추동된 채 무화된 텅 빈 존재가 되고자 한다. 역사학자 마르셀 고셰Marcel Gauchet가 말하듯, 신을 지운 인간 주체는 어떤 성스러운 아편도 멎게 할 수 없는 두근거리는 매일의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 따라서 세속화를 통해 종교의 시대가 끝났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결코 완전히 '종교적인 것'과 절연하지 못한 채 사사로운 종교적 실천과 종교 경험의 대체물 사이를 방황할 수 밖에 없다. 여전히 종교 없이는, 또는 적어도 종교적인 기술 없이는 삶을 견디기 힘든 것이다. 따라서 사회 안에서 종교의 역할이 쇠퇴하더라도 이것은 종교의 최종적인 소멸을 알'리는 확실한 기호가 아니다. '숨은 신'이 그러하듯 '숨은 종교'가 일상 경험의 프레임이 되는 일은 드물지 않다.

세속화, 과학화, 합리화는 세계 안에 퍼져 있는 성스러움의 장막을 걷어냈고 세계의 사물들을 신에게서 인간으로 귀환시켰다. 그러나 종교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 종교는 '종교적인 것'의 형태로 일상의 자리에 스며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에는 '종교적인 것'이 넘쳐난다. 종교와는 전혀 무관하게 우리는 삶의 중요한 행동을 종교적인 리추얼ritual로 변화시킨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삶의 전 영역에서 증식하는 신화의 범람을 목격한다. 영화에서든 드라마에서든 소설에서든 신이 삭제된 신화, 즉 '리추얼 없는 신화'를 늘 보고 듣고 읽는다. 언제든 벗어 던질 수 있는 지나치게 '가벼운(연한) 종교'가 일상을 질펀하게 수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라고 얼마든지 부정될 수도 있는 '과소한 종교성'이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세속화된 사회에서는 미신과 주술 없이는, 리추얼과 신화 없이는 삶을 진정시키기 힘든 상황들이 빈번히 연출된다. 적어도 미신과 주술은 장기 지속하며 삶을 지배하는 '긴 의미'는 아니더라도 단명하는 '짧은 의미'를 연쇄적으로 삶에 배치할 수 있다. 미신과 주술은 무의미를 살균하는 종교적인 항생제 같은 것이다.

'과소한 종교성'만이 현대 사회에 횡행하는 것은 아니다. 세속화를 통해 종교적인 마법 안에 갇혀 있던 사물들이 탈출하면서 종교 자체가 공동화되어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종교 안에 있던 사물들이 세속화된 것처럼 종교 자체도 세속화를 통해 세속 사회에 적합한 종교로 외재화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속화에도 불구하고 왜 오늘날 종교가 다시 부흥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그러나 이 질문은 애당초 잘못 제기된 것이다. 우리는 종교란 과거의 형식을 고수하는 의고적인 것이며, 현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그저 과거의 영광으로 연명하는 유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 세계에서 종교는 세속 사회에 매우 잘 적응하는 세속적인 종교로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종교는 불교, 천주고, 개신교, 이슬람교 등의 브랜드를 달고 사회에서 일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종교적인 선택지가 되었다. 전통 종교들이 세속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는 '연성軟性 종교'로 변신한 것이다. 전통 종교들은 '전통의 재서술'을 통해, 또한 과도한 종교성의 억제를 통해 현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세속 종교로 스스로를 갱신하는 작업을 꾸준히 벌이고 있다.


[무거운 종교성에 대한 낭만적 회고]

세속 사회에 적합한 모습으로 표준화된 세속 종교만으로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맞닥뜨리는 심리적 고통을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세속 종교는 자아의 과대망상을 허용하지도 않고 자아를 삭제해 주는 신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지나치게 '무거운(진한) 종교'가 사람들을 매혹하는 경우가 많다. 세속 종교와 달리 인간의 삶을 철저히 장악하여 모든 욕망을 집어삼키면서 삶의 의미를 하나의 정답으로 수렴시키는 종교가 다수는 아니더라도 소수의 인간을 응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는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자기가 지워진 텅 빈 인간 내면에 착근하기 때문에 무거운 종교다. 무거운 종교는 세상이 종교로 충만하던 시절, 인간이 철저히 '종교 기계'로 존재하던 시절을 낭만화하면서 힘을 얻는다. 따라서 무거운 종교의 입장에서 사회 규범, 도덕 가치, 합리적 판단, 과학적 사고 등은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다. 위법성, 비도덕성, 폭력성 등을 내장하는 이러한 종교를 두고 우리는 흔히 '사이비 종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는 한다.

또한 표준화된 세속 종교는 일상의 세밀한 고통에 속수무책이고, 인간의 삶을 장악하여 철저히 '재종교화'한다는 프로젝트를 수행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점술이나 무속 같은 소위 미신에 의탁하여 일상의 우발 사건에 대처할 수밖에 없다. 무속은 율법이나 계율을 통해 삶의 전 영역을 통제하지도 않고 종말론적으로 전 우주를 해석하지도 않는다. 그저 무속은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 낳은 하나의 사건에 집중하면서 그 원인을 탐색하고 고통을 진정시킨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무속의 '공감각적인 리추얼'이 종교적인 기능을 오롯이 수행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무당의 리추얼은 현실 문제를 단박에 치유하는 강력한 수단으로서 낭만적으로 회고되거나, 해결할 길 없는 고통을 야기하는 저주의 마법으로만 그려진다. 이 때 무속은 '실제의 종교'가 아니라 '상상의 종교'로 기능한다. 이것은 현실의 허약한 종교와는 전혀 다른 강력한 종교에 대한 낭만적 회고에 불과하다.

신이 사라진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최종적인 책임 소재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최소한의 합리성만을 구현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인간이 합리성에만 의존한 채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합리성은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수많은 문제 앞에서 속절없이 붕괴된다. 따라서 인간은 늘 합리와 불합리의 틈에 끼여 바둥거린다. 신이 악마를 낳듯 합리화된 세계는 의외로 운명론이 손쉽게 기생할 수 있는 곳이다. 모든 불합리한 사태의 원인을 합리성과는 다른 차원의 질서에서 찾는 일은 인간에게 간편한 위안을 제공할 수 있다. 사주팔자와 음양오행설을 비롯한 점술의 상업적이고 오락적인 회귀는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다. '운運'에 의해 선천적으로 설정된 삶의 도식이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다면 합리적인 사회의 이 처절한 불합리를 설명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종교, 또는 종교적인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신이 죽었다고 해서 종교가 무용해진 것은 아니다. 신은 종교적 노력이 낳은 하나의 결실일 뿐이다. 종교사 속에서 신은 늘 절단되고 분해되고 재구성된다. 종교사를 보면 신의 몸을 찢어 세상을 만들기도 하고, 신을 죽여 성령을 만들기도 하고, 신을 인간의 몸으로 흡수하기도 하고, 신을 매년 창작하여 부수기도 하고, 인간을 지운 자리에서 신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인간은 신을 없애기 위해 혈안이 된 것처럼 심을 분쇄하여 '신의 가루'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날려 버리곤 한다. 세속화된 현대 사회에서도 신은 갈리고 빻아지고 분말이 되어 어디선가 계속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종언'을 예측하거나 촉진하는 일은 부질없는 짓이다. '종교 이후의 종교'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종교의 시대를 예언하는 종교적인 '종교 종말론'에 불과하다. 오히려 우리는 현대 세계가 구축하고 있는 새로운 종교 체계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이 종교 체계 안에 표준 종교, 미신, 사이비 종교, 무속이 모두 기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종교만 종교인 것은 아니고, 나쁜 종교는 종교가 아닌 것도 아니다. 선악의 잣대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눈금을 지닌 임시적인 척도일 뿐이다. 따라서 옛날에는 선한 것이 지금의 악한 것이 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종교는 원래 당대가 규정하는 선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종교는 전통적인 재료를 재조합하고 재해석하여 당대의 인간 사회가 낳은 온갖 고통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무모하면서도 창조적인 시도이다. 종교는 늘 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낯선 메시지를 발산하는 '의미의 섬'이 된다. 설령 종교가 가능성이 주는 위안에 그치더라도, 종교가 실재할 수 없는 의미의 허상에 불과하더라도, 종교는 여전히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종교적인 것이어서 오히려 생명을 위협하거나 삶에 해를 끼치는 믿음이나 행위를 가리켜 미신이라 부른다. 경제적인 이득이나 욕망의 충족을 위해 지나치게 종교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종교를 속화하는 것도 미신이라 불린다. 우리가 소위 사이비 종교라 지탄하는 종교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방식으로 '힘의 질서'를 구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가짜 종교' 또는 '사교邪敎'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사이비 종교라는 표현을 사용하려면 종교가 무엇인지, 종교의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종교의 본질을 규정하고자 한 어떤 시도도 성공한 적이 없다. 결국 사람에 따라 사이비 종교를 규정하는 방식은 달라진다. 따라서 사이비 종교라는 말은 이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이나 사회의 '종교 정의'를 드러낼 뿐이다.

근래의 대중문화에서 무속은 빙의나 저주 같은 개념과 결합하면서 과학적으로 타파되지 않는 '신비한 공백'을 보여주는 종교 매체로 등장하곤 한다. 점술의 '운'과 마찬가지로 무속은 세상의 질서에 개입하는 신비한 힘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속의 힘은 과학적으로 조사할 수 없는 죽음의 영역, 특히 죽은 자의 영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무속도 과학성이나 합리성의 여백에 기생하기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