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이데거의 관점
III이 헤겔의 관점이었다면, IV은 하이데거의 관점임.
III에서 헤겔은 존재를 무 속으로 '이행'시켰고, 사르트르는 이에 반하여 무의 후행성을 주장했으며, 하이데거는 존재와 비존재가 서로에게 행사하는 상호 배제의 힘을 강조하면서 실재는 적대적인 힘에서 생겨나는 모종의 긴장으로 여기는 관점임.
사르트르는 무에 대한 설명에 대해 헤겔의 관점보다 하이데거의 관점을 더 높게 쳐줬음.
그 이유는 존재에 대한 하나의 선존재론적 이해가 인간실재의 각개의 행동(인간실재의 각개의 기투)에 들어 있다고 했다는 점.
(사르트르가 I에서 세계 내 인간 행동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이런 하이데거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느껴짐)
III에서 설명했던 헤겔의 오성으로는 '무'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없다는 점.
(하이데거의 경우 인간실재의 태도가 증오, 금지, 후회와 같은 무에 대한 이해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현존재 역시 '불안'을 통해 무를 현상으로서 발견할 끊임없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
사르트르 교수님은 하이데거의 관점에 대해 본격적으로 강의하기 시작함.
중요한 부분은 '넘어섬'에 대한 내용으로 보이는데,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모든 규정은 넘어섬이며, 모든 규정에는 대상으로부터의 후퇴이면서 그 대상에 대해 관점을 취하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라고 함.
세계에 대한 넘어섬(현존재가 세계의 우연성 — "아무것도 없지 않고 왜 무언가가 있는가?" — 을 실감하는 출발지점)이 세계가 그런 것(인간실재가 존재를 세계라는 형태로 조직된 총체로서 드러나도록 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위한 조건이며, 현존재는 이런 넘어섬을 자기 자신을 향해 수행한다.
즉 존재가 세계로서 나타나고 조직되는 것은 모든 존재를 가로지르는 인간의 내면화 운동 속에서이다.
따라서 실재적인 것 총체의 나타남은 무 속에서의 인간실재의 창발이며, 우리가 존재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오직 무 속에서이다.
이때 불안이란 이런 이중적이고 끊임없는 무화작용의 발견이다.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관점에 의하면 무가 사방에서 존재를 에워쌈과 동시에 존재로부터 축출된다, 즉 무가 세계에 세계로서의 윤곽을 부여하는 것으로 주어진다고 해석함.
2. 사르트르의 비판
일단 확실한 것은 세계를 세계로 파악하는 것이 무화적이라는 것. 그리고 부정이 무에서 자신의 근거를 끌어낸다는 사실.
우선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인간실재가 비존재 속에서 창발하는 힘의 원천에 대해 의문을 품음.
무는 그 자체가 부정이기 때문에 부정적 판단의 기원에 있다.
무는 존재로서 부정이기 때문에 작용으로서 부정의 근거가 된다.
무는 오직 무가 세계의 무로서 그 자신을 명백하게 무화하는 경우에만 무일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무가 그 자신의 무화에서 세계에 대한 거부로서 자기를 구성하기 위해 명백하게 이 세계를 향하는 경우에만 무가 무일 수 있을 뿐이다.
무는 존재를 그 자신의 핵심에 지니고 있다(III귀결).
하지만 이 창발은 이 무화적 거부를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초월, 즉 "······의 저편으로의 자기의 기투"는 무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 반대로 초월의 핵심에 있으면서 초월을 조건짓는 것이 바로 무이다.
그리고 하이데거 철학에서 현존재를 기술할 때 암시적인 모든 부정을 가리는 긍정적인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을 지적함.
예를 들어 현존재가 자신 바깥에, 세계 속에 있다는 점은 현존재가 즉자적으로 있지 않다는 것과 같고,
현존재가 먼 곳에서 오는 하나의 존재라는 점은 현존재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지 않다는 것과 같음.
그리고 하이데거가 무를 초월에 대한 일종의 지향적 상관자로 만들면서도 그 자신이 무를 이미 초월 자체 속에 그 근본 구조로서 끼워 놓고 있다는 점도 지적함.
또한 하이데거의 거창해 보이는 설명 역시 지적함.
(예를 들어 "피에르가 카페에 없다." 같은 일상적인 판단을 정초하기 위해 무를 향해 세계를 넘어서야 하고, 이어서 존재로까지 되돌아와야 한다는 점)
무엇보다 비존재에 대한 해석이 존재 속에 비존재를 포함하고 있는 어떤 유형의 실재에 대해서는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
3. 점과 위치, 거리의 예시
이것은 개념이 하나의 부정적인 계기를 갖는 예시임.
그리고 II에서의 피에르와 카페 예시랑도 긴밀하게 연결되는 부분이라 흥미로움.
두 개의 점이 어떤 길이에 의해 분리되었을 때, 이 두 점은 거리를 갖는다.
(어떤 길이에 의해 분리된다는 것은 두 점이 일치해서 길이가 0인 게 아님을 엄밀히 표현해 놓은 것)
이것은 한 직선의 선분에 대해 긍정적인 속성인 길이가 하나의 절대적이고 미분적인 근접을 부정하는 자격으로 여기에 개입함을 의미한다.
(절대적이고 미분적인 근접을 부정한다는 것 역시 두 점이 한없이 가까워서 서로 일치되어 길이가 0인 게 아님을 엄밀히 표현해 놓은 것)
여기서 우리는 선분을 긍정으로 바라볼 수도, 부정으로 바라볼 수도 있음.
먼저 선분을 직관의 직접적인 대상(그러니까 선분에 집중해서 바라보고, 두 점을 배경으로 보는 상황)으로 제시하는 경우
선분 자체는 길이를 그 긍정적인 속성으로 가진 충만하고 구체적인 긴장을 형성하며, 두 점 A와 B는 선분의 두 극단으로서 선분 자체에 포함된 것으로만 나타남.
이때 부정은 "이 점(A 또는 B) 너머로 확장되지 않는" 부정으로서 두 극단으로 도피한다는 것.
반대로 이번에는 두 점 A와 B에 주의를 기울이면, 선분은 두 점을 분리하는(일치시키지 않는) 부정적인 것으로 파악됨.
이것은 지각(피에르와 카페의 예시)에서도 똑같음.
우리는 지각에서 이런저런 대상을 형태로 구성하면서 그 밖의 다른 대상을 밀쳐 내 하나의 배경으로 만들었음.
아무튼 어떤 경우에도 부정이 제거될 수 없다는 의미.
이런 사고실험을 거쳐서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인간실재가 거리를 생몰케 하는 자(거리를 창조하면서 동시에 거리를 소멸시키는 자로서 세계 속에 나타나는 자)임을 받아들임.
사르트르는 두 점과 그 사이에 포함된 선분은 독일인들이 "게슈탈트"라고 부르는, 분해될 수 없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함.
부정은 이 통일성을 실현하는 시멘트이다.
부정은 정확히 이 두 점을 연결해 분해할 수 없는 거리의 통일성으로 만들어 직관에 제공하는 직접적인 관계이다.
만일 당신이 거리를 길이의 측정으로 환원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저 부정을 덮어 버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측정의 존재 이유가 바로 부정이기 때문이다.
(측정이 존재하는 이유, 측정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두 점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
4. 부정태
아까 했던 거리에 대한 검토는 현실(부재, 변심, 이타성, 혐오, 후회, 기분 전환 등)을 묘사함으로써 똑같이 밝힐 수 있음.
즉 세계 내 인간 현실에 적용한다는 것. 그런 현실을 부정태(négatités)라고 부르기로 함.
이때 완전히 긍정적인 현실이라 하더라도 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머물러 있게 하는 부정을 붙들고 있다고 함.
어쨌든 이런 부정은 존재 속에 흩어져 존재에 의해 지탱(논리적 후속적)되고, 그럼으로써 현실의 조건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초(ultra, 극단적으로)-세계적인 무 속으로 내던져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함(이때 하이데거의 '존재를 밖에서 감싸는 무'는 외(extra)-세계적인 무).
초-세계적인 무는 절대적 부정을 설명해 주지만, 우리는 방금 내(intra)-세계적인 존재가 급속도로 증식함을 발견함(부정태).
5. 귀결
무가 존재에 의해 지탱되지 않는다면, 무는 무로서의 한도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고, 우리는 존재 위로 되돌아올 것이다.
무는 존재의 기반 위에서만 무화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무가 주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존재 이전도 이후도 아니며, 일반적인 방식으로 말하면, 존재 바깥에서도 아니다.
무가 주어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존재의 핵심에서이며, 한 마리의 벌레로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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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일부터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