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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환영, 반박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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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의 소설은 꽤나 자주 '프라하의 봄'과 같은, 그 당시 그가 살아왔던 시대적 배경에 착안해 서사가 전개된다. 그렇기에 혹자들은 쿤데라의 소설을 그러한 정치적 맥락을 통해 짚어보고, 나 또한 그러한 독법이 절대적으로 틀렸다곤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의 소설을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관찰로서 읽고는 하고, 그러한 독법은 항상 나에게 소정의 통찰을 준다. 




야로밀은 그저 남들보다 감수성이 조금 더 뛰어나고,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인물이다. 물론 "보편적이다"라는 말이 지닌 폭력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은 반드시 불완전하고 약한 존재이고, 야로밀 또한 그런 인간의 공통된 특질을 지니고 있기에, "보편적이다"라는 다소 폭력적인 규정적 표현은 그에게 딱 알맞다.




그렇다면 이러한 보편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인간은 어째서 불완전한 것일까? 




인간은 모두 독립된 자아를 가지고 있고 우리는 절대 이 자아를 넘어서서 사유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관점으로만 다른 인간의 자아를 파악할 수밖에 없고, 이는 필연적으로 타인에 대한 몰이해를 촉진한다. 바로 이 소통 불가능성이 인간의 불완전함의 첫 번째 원인이다. 우리는 서로를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라고 할지라도.


 소설에선 야로밀과 그의 어머니의 관계를 통해 이 지점을 짚어낸다. 그의 어머니는 헌신적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헌신적이기에 자신의 욕망보단 자신에게 무관심한 남편을 우선시했고, 그녀의 아들에게 헌신적이기에 그를 자신의 인생의 제1원칙이자 목적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그녀의 무조건적인, 숭배해야 마땅한 사랑과 헌신을 야로밀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에게 모성애란, 그저 자아의 억압이었고, 하나의 자아로써 독립할 수 있는 권리의 훼손에 불과했다.


그러면 어머니의 사랑은 그저 폭력에 불과하고, 어머니는 자신의 폭력에 그저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폭력을 강요한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틀림없이 어머니 자신에게 있어서 그녀의 진심을 바친 숭고한 희생이다. 그러나 결국 아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집착과 폭력으로 받아들일 것이고, 어머니는 아들의 반응을 단순히 배신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물론 아들은 어머니의 집착은 사실 사랑이고, 어머니는 아들의 반항은 자신의 사랑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납득하려 노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어머니가 될 수 없고, 어머니는 그의 아들이 될 수 없기에 설령 납득에 성공한다고 해도 이는 불완전하다. 자신의 자아에게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도록 강요하는 폭력적인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소통 불가능성은 우리의 삶 곳곳에 존재하며 인간을 필연적으로 고독하고 외롭게 만드는 주범이다.




모든 인간을 보편적 존재로 환원시키는 인간의 불완전함의 두 번째 원인은 역설적이게도 보편성의 거부, 즉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구분 짓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러한 타인으로부터의 구분을 위해, 우리는 놀랍게도 타인들의 집단에 걸어들어가 그들과 섞이게 된다. 공산주의 당원이 되기도 하고, 반공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시에 몰두하기도 하고, 보수를 지지하기도 하고, 진보 진영의 시위에 참여하기도 한다. 마이너한 음악을 찾아 듣기도 하고, 난해한 책을 찾아 읽기도 하고, 심지어 무언가 깨달은 척 글을 쓰고 그것을 과시하기 위해 어딘가에 게시하기도 한다!(또한 자신의 어린 나이를 무기 삼아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쿤데라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키치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고 결코 키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세 번째 요인은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려는 생식욕이다. 우리의 뇌는 이러한 욕구에 지배당하기에,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사랑을 갈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성에 눈에 들기 위해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질투에 눈이 멀어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마저 내걸어버린다. 결국 이러한 원초적 본능이 안타깝지만 인생 제1의 목적이 된다.(물론 이 욕구에 반해 저항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저항 역시 키치에 불과하다. 결코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에서 도피할 수 없는 것이다.)




소설에서 야로밀은 시를 쓰고 공산주의를 열렬히 지지한다.


자신의 연인의 오빠를 반공주의자로 고발하기도 하고(하지만 이는 자신의 숨겨진 중년 남성을 감추기 위한 연인의 거짓말에 불과했다. 아, 인간은 역시 서로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에 힘겨워하기도 한다.


결국 마음에 드는 이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또한 자신의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그것이 원인이 되어 최후를 맞이한다.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가. 결국 평생 남들과 소통하지 못하며 그들의 이미지만을 보며 표류하고, 키치에 항상 몰두하며, 자신의 추악한 생식욕을 추구하다가 죽을 운명인 것이다.




인간은 이런 슬픈 운명에 저항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정녕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인가.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세인에서 벗어나 피투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닌(피투적 존재라는 키치에 몰두해 봤자 우리는 결코 피투적 존재가 될 수 없다. 단지 피투적 존재가 되고싶은 세인에 머무는 것뿐이다.)


세인으로서,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


이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믿는다. 우리는 결코 완전해질 수 없지만, 이러한 한계를 지적함으로써 우리는 조금 더 마음의 여유를 지니게 될지도 모른다고.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희망일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