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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메로스. 이준석을 읽어야 하는 이유.
 


0.  들어가며

 나는 번역본을 고를 때 나를 믿지 않는다. 직접 읽어보고 판단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가독성은 기준이 되지 않는다. 읽기 편한 글은 그냥 읽기 편할 뿐이다. 그러나 원문을 읽지 못하는 이상 그것이 작가의 글인지 번역자의 글인지는 내가 단정할 수 없다. 그래서 원문을 읽을 수 있는 학자나 지식인들의 추천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다.

 가독성이 높은 역본은 위험할 수 있다. 번역이라는 작업은 본질적으로 작가의 글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원문이 난해하다고 해서 문장을 잘라내고 재단하면 원문과의 거리는 더 멀어진다. 물론 가독성이 높다고 반드시 원문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성은 그만큼 커진다. 문장은 자르고 다듬을수록 매끄러워지기 때문이다. 

 이것만 보아도 이준석 역본을 고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문장을 따지고 들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중요하다고 생각한 두 부분을 가져왔다.



 
1. 서시, 첫 문장.

 많이 알려져있듯이 일리아스는 분노로 시작해 연민으로 끝나는 서사시이다. 일리아스는 이렇게 시작한다.

μῆνιν ἄειδε θεὰ Πηληϊάδεω Ἀχιλῆος

노여움을 노래하라,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그리스어는 어순이 매우 자유로워서 강조하고 싶은 단어를 특히 눈에 띄는 자리인 맨 앞이나 맨 뒤에 놓을 수 있다. 호메로스가 의도적으로 시의 첫 단어를 분노(μῆνιν)로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작품의 전체 구조를 염두에 둔 선택이다.

(+ 오뒷세이아 에서도 작품의 주제인 오뒷세우스를 지칭하는 '한 사람'이라는 단어로 첫 문장을 시작한다. 이처럼 호메로스는 첫 문장의 첫 단어로 작품의 주제를 노래한다. 단순한 우연일 수 없다.) 


천병희와 이준석의 번역을 보자.

- 천병희: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 이준석: 노여움을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노여움을!

천병희는 동사를 앞세워 문장을 간결하고 자연스럽게 풀어낸 반면, 이준석은 ‘노여움’을 문두에 두어 원문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최근 번역된 박문재 역본과 그리스 고전학자인 강대진과 김헌이 직접 번역한 문장을 보자.

- 박문재: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 강대진: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파괴적인 분노를.
- 김헌: 진노를 노래하라,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파괴적인 진노를,

이번엔 천병희가 참고한 영역본 Fitzgerald와 Fagles, 이준석이 참고한 Lattimore의 문장을 보자. 

- Fitzgerlad: Anger be now your song, immortal one, Akhilleus’ anger,
- Fagles: Rage - Goddes, sing the rage of Peleus’ son Achilleus,
- Lattimore: SING, goddes, the anger of Peleus’ son Achilleus

천병희가 참고한 영역본 모두 분노를 첫 단어로 쓰고 있다. 오히려 이준석이 참고한 영역본은 영어 어순을 지키려했지만 분노라는 단어를 최대한 앞세우려 했다. 영어 문법상 목적어를 먼저 쓰면 어색해질 수도 있음에도 학자들은 ‘분노’를 첫 단어에 놓고 있는 까닭은 분명하다. 일리아스의 시학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조금 의문이 든다. 짐작컨데 선생님께선 첫 단어의 중요성보단 문장의 매끄러움이 더 중요하셨던 것 같다. 

누군가는 고작 한 단어의 배열이 뭐가 중요한가 물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인의 의도와 시학을 이해하고 그대로 전달하는 것,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2. 10권의 주석.

10권 훔친 말 등에 타는 장면에서 천병희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남겼다.

‘“말들에 뛰어오르다”라는 구절은, 당시에는 말 등에 타는 풍습이 없었으므로 말들이 끄는 전차에 올랐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돌론의 정탐이라고 불리는 10권은 후대에 쓰였다는 게 정설이다. 다른 권들과 다르게 10권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보인다.

- 유일하게 말 등에 타는 장면 등장. (일리아스에서 말은 전차를 끄는 데만 이용됨)
- 전술이 전무한 일리아스에서 야간기습을 나가는 전술이 등장.
- 오뒷세우스가 활을 지니고 교활한 모습을 보임(오뒷세이아에서는 활을 자주 사용하지만 일리아스에선 사용하지 않는다).
- 다른 부분에 나오지 않는 공식구(formula) 많이 사용. (‘어두운 밤을 헤치고’)
- 여기서 거둔 전과(좋은 말, 돌론의 무장 등)가 이후 어디서도 언급되지 않음. → 가장 큰 의혹

그럼에도 10권은 9권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며 이어지는 흐름에 잘 맞기에 일리아스의 구조를 잘 이해한 시인이 끼워 넣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기에 10권에서의 주석은 독자에게 혼란을 주는 잘못된 정보이며 번역자에 대한 신뢰성이 떨어지는 불필요한 주석이다. 추측성 내용을 왜 추가하셨는지 모르겠다. 첫 번역하셨을 당시의 주석인지 참 아쉽다. 지금이라도 삭제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외 다른 주석들은 친절하고 쉽게 설명해주셨기에 더욱 아쉬운 부분이다.



3. 그 외

이: 네 이빨 울타리를 빠져나온 그 말은 대체 무엇이냐.
천: 너는 무슨 말을 그리 함부로 하느냐.


이: 날개 돋친 말을 건네었다.
천: 물 흐르는 듯 거침없이 말했다.


이: 차라리 네놈이 고자였다면, 그래서 짝도 못 찾고 죽어버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천: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거나 장가들기 전에 죽었어야 했다.


천병희 역본엔 호메로스만의 독특한 표현이 쉽게 재단되었다.(개인적으로 이런 새로운 표현을 읽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이준석은 천병희 선생님은 시인을 자국인으로 귀화시켰다고 표현했다. 또 고자나 성관계를 묘사하는 표현도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는지 모두 점잖게 에둘러 표현하셨다. 




4. 나오며

 천병희 역본에도 장점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가독성이 좋고, 어투가 장엄하며, 주석이 친절하다. 부록에는 인명, 신명, 지명 설명과 함께 이준석 역본엔 없는 지도까지 포함되어 있다. 해설도 훌륭하다. 많은 독자에게 읽히고 싶다는 선생님의 따스한 마음이 느껴진다. 반면, 이준석 역본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물론 이건 원문에 더 가까운 탓이라고 생각한다). 때때로 어투가 일관적이지 않다고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준석 자신도 말투 번역을 고민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난 이준석 역본을 추천한다. 이준석 역자는 옮긴이의 말에서, 참고한 번역본들을 평가하면서도 선생님의 역본에 대해선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럼에도 에둘러 새 번역을 낸 이유를 내비친다. 선생님의 역본을 잘 읽히는데 바로 그것이 새로이 번역을 시작한 이유라고 한다. 호메로스에게서 받은 것은 잘 지은 밥인데 독자에게 분쇄한 이유식을 건네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계일보 인터뷰에서 이준석은 선생님 역본과 이렇게 차이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말의 ’좀‘ 같은 말을 조각말이라고 하는데, 희랍어에는 조각말이 아주 풍부하다. 천 선생은 조각말까지 우리말로 자연스럽게 번역하실 생각을 하지 않으신 것 같다. 몰라서가 아니라 일단 많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렇게 번역하신 것 같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일리아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천병희 선생님께서도 조금 어렵더라도 조각말까지 충실히 옮긴 이준석 역본을 추천하시지 않을까. 또 선생님께선 호메로스 서사시가 고전들의 고전인 만큼 여러 독자층이 읽도록 지속적으로 손봐야한다고 하시며 2015년까지 10년마다 개정판을 내셨다. 이제 10년이 돌아온 지금, 새로운 번역 역시 기꺼이 추천해주시리라 믿는다. 

 돌아가신 선생님께 누가 될까봐 이 글을 쓸지 말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선생님께서도 너그럽게 이해해주실거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계셨기에 저도 호메로스의 위대함을 행복하게 맛보았습니다.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추신*

1. 역본 고를 때 이준석 역본 앞 부분 <추천의 말>을 읽어보시길 추천드려요. 전 첫문장 번역과 이 글에 완전 감겼습니다.
2. 어느 역본을 읽더라도 이준석 역본 부록 중 <해설>을 읽어보시길 강력히 권합니다. <분노의 서사시, 연민의 서사시 『일리아스』> 논문도 찾아보시면 정말 좋아요.
3. 강대진 교수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읽기』 이건 꼭 읽으세요. 필독. 강강추. 강강강추. 사실 이 책 추천하려고 글씀. 



[참고 자료]

이디스 해밀턴, 『해밀턴의 그리스로마 신화』, 서미석 역, 현대지성, 2022 (반드시 개정판을 읽기 추천. 구판에서 몇 문장이 조잡한데 개정판에서 고침.)

스티븐 프라이, 『스티븐 프라이의 그리스 신화』, 이영아 역, 현암사, 2019 (가볍게 읽기 좋음)

호메로스, 『일리아스』, 천병희 역, 숲, 2015

호메로스, 『일리아스』, 이준석 역, 아카넷, 2023

호메로스, 『일리아스』, 박문재 역, 현대지성, 2025

Homer, 『The Iliad』, Robert Fitzgerald (천병희 참고)

Homer, 『The Iliad』, Robert Fagles (천병희 참고)

Homer, 『The Iliad』, Richmond Lattimore (이준석 참고)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천병희 역, 숲, 2015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이준석 역, 아카넷, 2023

이준석, <분노의 서사시, 연민의 서사시 『일리아스』>, 2018 (강추)

강대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읽기』, 그린비, 2019 (강강추, 호메로스가 천재임을 알게해준 정말 감사한 책)

강대진,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 읽기』, 그린비, 2020 (강강추)

김헌 교수의 강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강대진 교수의 강의, <일리아스, 운명의 수용에 관한 서사시>

김용출,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번역 이준석 “중간에 링 밖으로 걸어 나오진 않겠다, 케이오가 되더라도”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세계일보』, 2024년 1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