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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서설


이 책은 3번째 읽고 거듭하여 읽을 수록 글쓰기의 중요성만 의식하게해준다.

글쓰기를 하는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의 차이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저자는 글쓰기를 안하는 자를 옹호하지만 결국 이 책이 현대의 고전 반열에 오른 이유는 글쓰기의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굉장히 많이 추천하고 다닌다. mbti를 보기보단 이 책이 활용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글쓰기를 중심으로 이하에서 서술한다.



Ⅱ 책의 의의 : 사리분별력 강화




요즘 시대는 가면 갈 수록 글쓰기를 하지 않는 사회이다. 그러나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터넷 공간에서 또는 카카오톡으로 글쓰기를 분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있는데 글쓰기를 안한다고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 어불성설이 아니다. 여기에서 글쓰기는 일단 구술성을 제거한 글쓰기이다.


우리는 면대면으로 대화하듯 쓰고,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여긴다. 즉 구어체로 쓴다. 반면 여기에서 말하는 글쓰기는 문어체로 하는 글쓰기이다.

구어체로 쓰든 문어체로 쓰든 말만 통하면 되는 것이지 왜 이를 구별하며, 이를 통해 강화된다는 분별력은 무엇이고 어떻게 강화되는가? 아래에서 설명한다.



Ⅲ 구술성



1. 소리와 감정



구술은 입으로 하는 말을 뜻한다. 소리와 관련이 있다. 사투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성조가 있고, 멜로디도 있고, 리듬이 있고, 박자가 있다.

또한 이러한 말은 간결해야한다. 소리로 전하고 청각으로 받아들이는 신호는 간결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받아들이기 힘들다.

즉 구술로 하는 대화는 오로지 언어의 의미에 따른 분석과정이 없고 내용도 사실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구술을 통하여는 태도가 중요하고, 비언어적 행동이 중요하다.

따라서 감정이 강조된다.


수사적 표현은 일종의 웅변술에서 쓰인다. 지금도 다르지 않지만, 다수의 사람을 어떻게 설득시키는가가 중요했다.

따라서 사람의 감정을 이용했다. 고로 수사는 선전·선동의 방식으로 쓰인다.

감정을 이용하는 수사적 표현은 사람들에게 일체감을 준다.



2. 집단화



문자가 없고 따라서 쓰기가 없는 사회 속 사람은 자신을 집단과 동일시했다. 자신과 남의 구별은 없었다.

그래서 구술문화적 사회는 공유적 사회이다. 쉽게 말해, 옆집 숫가락도 내 것이고, 우리집 숫가락도 옆집 것이다. 숫가락은 우리집단 모두의 공유물이었다.



3. 구술문화의 정신역학



따라서 문자가 없고 쓰기가 없는 사회에서는 인간 간 상호작용에 크게 의존한다. 즉각적 반응이 중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소리는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내 안에 담는다. 이런 나와 상대는 같다. 따라서 경험주의적이며, 보수적이고, 전체주의적이며, 상황의존적 사고를 한다.



4. 기억의 중요성



구술에 의지하는 사회는 기억이 중요하다. 문자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알고 모르느냐는 자신이 즉각적으로 아는 것을 말로 내뱉을 수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한편 기억이 중요하므로, 격언구로 짧게 머리 속에 저장해놓는다. 그것이 속담이다.



5. 상황의존적 사고 : 추상 x




이들에게는 단어의 정의가 없다. 왜냐하면 문자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나무'를 정의하라고 하면, 누구나 다 나무를 아는데 그것을 왜 자신이 정의해야하냐고 되묻는다.


저기 나무가 안보이냐고. 보이는데 그것을 왜 정의씩이냐 하냐고 신경질을 낸다.

즉 실생활의 환경을 통해 나무를 제시하는 것이 훨씬 만족스러운데 어째서 정의를 해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리 문자를 알고 글쓰기를 아는 사람이 분류를 하자고 하여도 통하지 않는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개인적이고 특정한 상황에서의 체험으로 되돌아 오고 만다.


그러므로 자기분석이 곤란하다. 자기분석을 하려면 위와같은 상황의존적 사고를 깨뜨려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의존적 사고 타파는 문자와 글쓰기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로써 이들은 자기평가를 집단평가로 대체하고, 자신의 외부가 자신을 압도하며, 위축감을 심하게 느낀다.


가끔 본인이 굉장히 현실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을 봤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정말 현실적으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상황의존적인 것을 오해하고 있는지는 글쓰기 여부에 달렸다.



6. 논쟁적



(1) 일반


이들은 위와같이 나무를 정의하라고 하는 사람,

즉 뻔히 당연한 것을 물어보는 사람을 논쟁적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는 반대이다.

상대의 물음이 논쟁의 표시가 되는 것은

물음만이 아니라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표시만 있으면

언제든 전투태세에 돌입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성격이 하나로 고정되었다고 여기는

나아가 나처럼 해야 된다는 당위가 있는 사람이 직면한 세상은

사실 그들의 실제와 달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데

이 사람이 논쟁적이 아니면 그게 더 이상하다.


구체적으로는 이렇다.


소통 없이 또는 약간의 소통으로

저 사람은 나와 같다고 얼추 결론을 내린다.


그 다음 무언가는

너도 알고 나도 안다는 당연함의 전제를 제 알아서 깔아 놓는다.


이러한 전제하에

굳이 물음을 던진다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이고,

그 의도는 암묵적 일체감을 훼손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또는 가끔 상대가 자신만의 당연한 것을 모른다고 하였을 때 정신으로 승리감을 느낀다.


따라서 이들은 싸우지 않기 위해

너와 내가 같다는 그 일체감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하며,

장삐쭈의 만화처럼 공통적인 부분을 확인하는 것이 표징이다.


그 만화에서 몇 시간 동안 서로 아는 형님 찾아다니다

결국 키우는 개 품종이 같다면서 위아더 월드가 된다.

나와 다르면 당신은 나의 적이되기 때문에 같은 부분 찾기에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또한 책의 예시로

우체국 옆에 서있는 마을 사람에게 행색이 같은 이방인이 와서

이 건물이 우체국이 맞냐는 물음을 던졌을 때, 마을사람은 이방인을 빤히 쳐다본다.


왜냐하면 마을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은 저 사람도 '당연히' 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이 건물이 우체국인 것을 알텐데, 왜 굳이 말을 할까.

말을 걸어 물어본다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다는 것이므로 적의가 있는지 없는지 탐색한다.


탐색하여 상황을 보려고 되묻는다.

"그걸 왜 물어보시죠?" "용건이 무엇입니까?" "당신 누구야"


또는 싸울 준비를 한다.


자신과 같은 행색이라 외국인이 아니고 동일 사람으로 알아 먹었기 때문이다.


한편 구술성은 지식을 인간 생활세계에 파묻혀 놓아둠으로써 사람들을 투쟁상황에 위치시킨다.


사람이 말을 할 때, 속담과 위인과 유명 구절을 인용하거나 개념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쌓기 위함이 아니다.


상대방과 지적 대결을 하기 위해서이다.

쉽게 말해 나대네? 자랑하네? 요놈 봐라? 한 번 해보자는 뜻이로구나- 라는 논쟁적 전환이 쉽다.


결국 구술문화에서 싸우기 싫으면 말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사람은 말을 계속하기 때문에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가 다양해질 수록

사람들은 논쟁을 회피하는 스킬만 늘어간다.

언제나 사회 구성원 다수는 구술문화적이기 때문이다.



(2) 장자크 루소와의 대비



이 부분에서는 어릴적부터 글쓰기로 문자성을 갈고 닦은 사람이랑 대비시킬 필요가 있어보인다.

대비시 구술문화적 특성이 논쟁상황을 발생시키기 쉽다는 것을 극명하게 알 수있다.


최근 장자크 루소의 책을 섭렵하면서 이 사람이 쓴 책 『에밀』이 왜 고전이며

실제 우리사회 교육제도 내용이 왜 이러한가를 생각해보았을 때,


구술문화적 사회에서는 싸움을 회피하여 소개팅에서 공통점 찾듯 집요하게 공통점을 찾아야만 친근함을 느끼고

그렇지 않으면 내편이 아닌 적이될 가능성이 있으며, 그와의 투쟁상황이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반면


루소는 추상적 교육을 통해 저런식으로 공통점을 찾지 않더라도 평화로운 사회 구축을 시도했던 것 같다.


이렇게 되면,


백인은 흑인이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다시말해 자신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차별하지 않을 것이고,

백인과 흑인은 황인을 차별하지 않을 것이며


요즘 시골에서는 다문화가정이 많고, 한국인가정이 적어

학교에서도 혼혈이 많고 한국인이 적은 현상이 발생하는데,


동일한 혼혈이 아니기 때문에 왕따가 된 한국인 아이가

왕따처럼 구니까 왕따를 받는다거나

학교 폭력을 받을만 하게 구니까 학교 폭력을 받는다는 그런 현상은 사라질 것이다.


즉 장자크 루소의 교육론은 구술문화적 현상을 지워버리는 효과가 있으며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실질 문맹자는 다수 인구를 차지하므로

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고 좌절하여 섬으로 들어갔다고 본다. 


루소의 재밌는 말을 오늘날 말로 바꿔 표현해본다.


루소 曰 그 남자가 그 남자고 그 여자가 그 여자라고 하는 것은 철학자라면 할 생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분별력 교육은 어릴 때부터 해야 효과가 크고 해야만한다고 본다. 



7. 소결



분별력이 없음은 아묻따 하나가 되는 것이고, 어떤 말이든 비슷하게 보인다는 뜻이다. 감정과 이미지로만 산다.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인 분별력을 갖추면

다툼이 없고, 갖추더라도 인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어서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하나가 되어야 할 때 하나가 될 수 있다.



Ⅳ 문자성과 글쓰기



1. 시각과 대상화


구술은 소리이고, 문자는 시각과 관련있다. 문자가 등장하고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 사람은 세상에 이름을 부여했고,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분별할 수 있게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더 이상 주변 사람과 상황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으며 기억의 필요성이 사라졌다.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상화를 말하기에 앞서 전술한 효과는 사람에게도 나타남을 말하고자한다. 사람은 이제 자신의 내면도 분절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 무엇에 대한 의문이 생기며, 점차 타인과 자신이 다르다는 점을 알게된다. 이로써 개별성이 탄생한다.


대상화라는 표현을 굳이 쓴 것은 이 단어에 대한 오해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상화라는 표현을 많이 봤다. <성적대상화>라는 단어는 눈에 익었다. 그런데 구술문화적 사회에서는 대상화가 없다.

왜냐하면 모두 같으므로. 따라서 이 대상화는 사실 나와 너 그리고 사물과 사람 등 분별 징표이다.



2. 문자


이 세상에 놀랍게도 고유의 말은 있는데 문자가 없는 언어가 정말 많다.지금 책 안찾아봐서 정확하게 어딧는지 확인이 안된다.

내 기억이 맞다면, 80년대 기준으로도 문자가 없는 언어는 60%를 가뿐히 넘는다.


우리나라는 문맹에서 벗어낫다. 그런데 실질적 문맹국이라는 말은 꼭 따라붙는다.

말도 할 줄 알고 문자도 알아서 적당히 쓸 수도 있는데 왜 실질 문맹국이란 말인가?

사람들이 아는 단어가 적기 때문이다.


김영하 작가는 작가라는 직업을 이렇게 표현했다. 작가란 단어를 수집하는 자이다. 단어를 수집한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유의어도 있을 것이고 동의어도 있고 동음이의어도 있을 것이다.


적절하게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구분되는 단어를 많이 알아야 한다.

많이 알 수록 무엇과 무엇을 구분할 수 있다.



3. 글쓰기



(1) 문학


위 김영하 작가는 문학하는 사람이다. 문학도 쓰기에 기반한다. 쓰기가 없으면 문학은 없다. 문학에서 문은 글월 문 文이다.

즉 문학은 책에서 말하는 2차적 구술성의 세계에 매우 적합하다

사실 이 독후감에서 다소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도 2차적 구술성의 세계이다.


우리는 sns를 하고 카카오톡으로 대화한다. 전술하였듯 입말을 통해서. 즉 문어체로 표현하진 않는다.

그러나 문학은 오묘하다. 왜냐하면, 문학은 문어체도 아니고 구어체도 아닌 것이 둘의 긴장관계 속에 위치한다.


다시말해 2차적 구술성이란 문자가 없는 1차적 구술성의 세계에 놓인 사람들이 주로 했던 즉각적 반응을 받고 본인도 하며,

글을 쓸 때에는 자기만의 세계에 있는 등 문자성과 구술성이 혼잡해 있는 성질이다.


가수 임재범의 노래 비상의 가사처럼, "누구나 한번쯤은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순간이 있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폐쇄적일 때가 있다.


그런데 2차적 구술성의 세계에서는 혼자서 글을 쓰고 있는데 자기만의 세계에서 집단의 세계로도 금방 나오게 된다.

그 결과 혼자만의 세계에서 글을 쓰면서도 가상독자를 상정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문학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개별성을 만들 수 있다.

개별성은 이 세상에 나만 존재할 때 만들어지는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있어야 개별성도 있다.


문학을 할 때 개별성이 무척 중요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사람의 개별성이 없으면 독자가 그 사람의 글을 읽어야할 이유가 없다.



(2) 그외



문학이 2차적 구술성의 세계라면 완벽은 아니더라도 완벽에 가까운 구분을 지향하는 그 개념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문자문화에 있고, 학문을 하는 자들이다. 학문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가?


글쓰기로 생각을 ①길고 ② 다양하게 ③그러나 구분지으며 ④종합적으로 할 수 있었기에 탄생했다.


철학부터 시작하여, 문학, 과학 등은 글쓰기가 없으면 탄생하지 못한다. 논증이 기본이다.


한편 이들은 비인격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인격에서 공정이 만들어진다.

나는 다른 글에서 쓴 적이 있지만, 비인격성이 없다면 느그 서장이랑 밥도 먹고, 사우나도 간 누군가가 상대방을 폭행하고, 당신의 집을 때려 부순 범죄자라도 풀려난다.

이를 공정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3) 2차 구술성의 세계에서 우리가 주의할 점



우리는 글쓰기에서는 구술로하는 표현을 지양해야한다.

왜 지양해야하는가? 왜냐하면 사람을 그냥 두면 구술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 또한 자연스럽게 하기 어렵다.


그러나 구술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자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개념어로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 각자에게 개별성이란 없고, 나는 마을 그 자체이며, 기업 그 자체이며, 국가 그 자체이고, 나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구별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의 선을 넘을 것이고 나의 기준으로 당신을 멋대로 취급할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이미 선이 있고, 구별하고 있다.


다시말해 여러 개념어를 사용하고 글쓰기를 하라는 이유는 큰 틀에서 요즘의 현대사회에 적응하는 삶을 권장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사회에 얼치기가 늘어났다.

글쓰기를 하지 않고서 문자를 눈으로만 보고 자신은 다 알았다고 여긴다. 구별을 삭제하고 오류있는 유추가 상습이다.


또한 글쓰기를 하지 않으므로 실은 분별을 못하고 있는데 분별하고 있다고 여기는 자기기만을 하고 있으며,

어쩌면 분석도구가 없어 자기기만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자기기만은 자신에게 해가 된다.

왜냐하면 자기기만은 남탓의 일상화를 통한 공허한 정신승리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발전이 없는데 발전을 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직접 각잡고 글쓰기를 해보라 했을 때는 하지 못하거나 퀄리티가 낮다.

그러한 경험이 쌓여 실패감·수치감이 늘어가고 이를 회피하려고 글쓰기도 회피한다.

왜냐하면 첫 시도 해봤을때 잘해야하는데,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재능 없다고 여기면서 만물 재능설을 지지한다.

그런데 원래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


나는 이러한 면모를 많이 봤는데, 결국 죄다 허세 덩어리 즉 자아비대가 심한 경우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서 무얼 한 사람이 이룩한 것은 자신이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긴 뒤, 더 어렵다는 무언가를 하러간다.

그러나 더 어렵다는 그 무언가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Ⅴ결론



나는 모 대학이랑 연도 없고 그 대학을 갈만큼 성적도 당연 아니었다. 그런데 어떤 대학이 계속 신경 쓰인다. 상징성도 상징성이지만, 대학교들을 이끄는 위치에 있는 것은 맞기 때문이다. 그런 모 대학에서 신입생들의 글쓰기 역량이 허접하다며 관련 역량의 강화를 주문했다.


그 모 대학 졸업생이 반드시 학자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여러방면을 통하여 다른 직업을 갖고 사회에 진입한다. 그 모든 직업에서 분별력은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사리분별력은 쉽게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글쓰기로 얻을 수 있다는 것만은 맞다고 본다.


구술성과 문자성 둘 다 얻기는 쉽지 않을 테지만, 어쨋든 이러한 인식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안개 같은 인생에서 어떤 분야이든 목표를 알았으니까 나아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