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하이퍼텍스트와 텍스트 게임, 그 외에도 신 매체인 컴퓨터가 연루되는 온갖 새로운 텍스트가 출현하던 시기에 이 텍스트를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돌아보는 건 재밌는 일이다. 해체주의, 기호학 등의 당대 문학 이론이 이런 텍스트의 근본적인 "열림"을 찬양하거나, 독자가 단순히 텍스트를 읽는 이상으로 그 텍스트의 공간 속에 빠져드는 경험을 한다거나, 컴퓨터의 전산 처리와 독자의 텍스트 독해 사이의 상호작용을 해석하는 방법을 제안한다거나 하는 시도가 과연 이제 와서 봤을 때 얼마나 성공적으로 이런 텍스트의 특성을 포착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사람들의 인식이 완전히 바뀌기 전인 과도기에야 새로운 것의 '이질성'이 뚜렷하게 포착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그 이질성이 사실 새로운 것에만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다고 여겨지는 매체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을 때다. 차원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종이가 너무 얇아 3차원 높이를 가진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다가 다른 부피 큰 물건과의 비교를 통해 이 방향성을 깨닫게 되는 것과도 비슷하다.
실제로 <사이버텍스트>에서 조명하는 "사이버텍스트"의 사이버 특성은 결코 컴퓨터와 직결되는 것이 아니다. 사이버네틱스에서 사이버를 따온 사이버텍스트는 독자가 텍스트를 의식적으로 구성해야만 하는 에르고딕-상태가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모든 가능한 상태를 필히 거쳐가게 되는 동역학적 성질-특성을 가진다. 문학 이론에서 독자가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해야 하는 온갖 노력과 비유를 제쳐두고, 사이버텍스트는 독자 반응 비평에서 독자의 텍스트 독해 맥락에 중점을 두는 것 이상으로, 책을 순차적으로 읽어나갈 때와는 다른 구체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특정 순서로 페이지를 펼쳐봐야 하는 게임북, 독자의 선택에 따라 본문과 주석 사이를 어떻게 이동하며 읽어나갈지 달라지는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 각 행마다 10개의 보기 중 하나를 직접 골라 14행의 시를 완성시켜야 하는 레몽 크노의 <백조 편의 시> 등 사이버텍스트는 결코 수동적으로 읽을 수 없는 텍스트다. 그런 노력 없이 단순히 주어진 문자를 보기만 한다면 독자는 결코 텍스트를 읽을 수 없다. 게임이 보여주듯, 노력 없이 글을 따라가기만 하는 플레이어는 엔딩조차 보지 못하기 일쑤다.
이런 관점에서 에스펜은 통상적으로 컴퓨터 텍스트에서 환호성과 함께 열거되던 비선형성, 다중진행형, 미로 같은 네트워크의 텍스트 같은 개념을 비판하는데, 이 또한 실제로 책 판형과 비교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사이버텍스트의 텍스트를 구성하는 과정, 혹은 모든 가능한 텍스트 상태를 포함하고 있는 상태 공간은 분명 비선형적이고 다중진행형이며 미로처럼 여러 링크로 연결된 네트워크일 수 있다. 하지만 독자가 실제로 읽는 사이버텍스트는 대체로 선형적이고, 일직선으로 진행한다. 심지어 이따금 페이지를 뒤로 건너뛰며 저자의 의도보다 앞서 뒤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책과는 달리 하이퍼링크로 진행하는 하이퍼텍스트, 정해진 이벤트를 따라 진행되는 게임 속의 텍스트는 그런 도약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이버텍스트는 경우에 따라서 책보다 훨씬 낮은 자유도를 독자에게 허용한다. 그 자유도는 선택의 자유도까지 제한한다. 마이클 조이스의 <afternoon, a story>나 여러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무슨 선택지를 골라야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거나 다른 상황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탐색해야 하고, 그 탐색은 상상력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이미 열쇠가 정해져 있는 자물쇠를 풀기 위해 열쇠뭉치를 뒤지는 것에 더 가깝다.
물론 이것이 사이버텍스트가 선형적이고 일직선으로 진행되는 텍스트라는 뜻은 아니다. 독자의 적극적인 개입이 요구된다는 정의 하나만이 사이버텍스트라는 거대하고 두루뭉술한 새로운 집단을 묶고 있으며, 모더니즘 문학 계열의 실험이 돋보이는 하이퍼텍스트에서 독자의 선택에 따라 텍스트가 달라지는 기제를 품고 있는 무작위적 글뭉치, 매우 복잡한 알고리즘이 배후에서 돌아가지만 실제로 눈앞에 두게 될 텍스트는 매우 단순하게 구성되는 게임, 그리고 온라인 커뮤니티의 전신인 PC 통신 서비스 머드MUD까지 아우르는 이 집단에서 명쾌하게 나눠 떨어지는 특성은 별로 없다. 지금 와서 본다면 이 분류를 예전부터 존재하던 주변부 서적, 포스트모던 문학, 텍스트-그래픽 게임, 온라인 메신저/커뮤니티라는 딱 떨어지는 집단들로 나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지금도 온라인 커뮤니티 빅데이터 분석을 위해 하이퍼텍스트 파일들을 가득 묶은 텍스트 청크를 그대로 통계적으로 분석하니, 웹사이트가 일종의 텍스트라는 관점이 근시일 내에 바뀔 일은 없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사이버텍스트를 읽기 위한 노력을 보며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이 떠올랐는데, <디스코>는 어떤 의미에서 사이버텍스트의 두 간극, 무작위적이고 실험적인 문학 실험과 해답이 늘 정해져 있는 퍼즐 풀이 게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플레이어는 온갖 텍스트에 둘러싸인 채 자신이 선택을 하면 할수록 계속해서 깊숙하게 들어가며 펼쳐지는 '그럴듯하지 않은' 세부사항을 발견하게 되고, 본능에 휩싸인 댄스 레이브에서 도시 누구도 현재는 알지 못하지만 미래에 닥쳐올 폭격을 깨닫거나 결코 열리지 않을 문 앞에서 언제는 좌절하거나, 언제는 가장 문을 열지 못할 법한 방식으로 문을 열며 괴상하게 꼬인, 확대할수록 기묘한 모험이 펼쳐지는 주름진 게임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의 선택은 정말 중요하고, 플레이어가 가장 덤덤한 형사일수록 사태는 정상적인 수사로 이어지지만 반대로 가장 끔찍하게 형편없는 형사일수록 온갖 주름이 펼쳐지며 아무 사건도 이해하지 못한 채 벌려놓은 일만 많아진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플레이어는 어느 순간부터 정해진 서사에 붙들려 끌려간다.
거의 숙명론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디스코>는 신기할 정도로 많은 과정 속에서 플레이어가 마음대로 맴돌게 한 뒤, 그럼에도 벌어질 일은 달라질 수 없다는 듯 이 모든 사건을 이해시켜준다. 이것은 엔딩이 정해져 있는 소설을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인터랙티브 무비 비판과는 조금 다르다. <디스코>의 난이도는 매우 낮아, 아무리 형편 없는 형사로서 플레이하더라도 일은 어떤 식으로든 흘러간다. 그리고 이 흘러가는 상황의 다양성은 정말 높고 다른 어떤 게임에서도 제공하지 않을 정치적, 사회적 선택을 매우 높은 해상도로 보여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서사가 흘러가야 할 때면 플레이어가 늘 그렇듯 의식적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도 사건의 열쇠를 자동적으로 찾게 되는 셈이다. 텍스트의 자유의지는 에르고딕하게 플레이어에게 대응하지만, 그럼에도 텍스트는 결정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엔딩에서는 결코 합리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안겨준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양립, 새로운 이상에 대한 믿음과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양립. 각 플레이어는 분명 서로 다른 텍스트를 읽게 되었지만, 결국 그 끝은 똑같다. 그래서 오히려 모든 게 정해져 있거나, 과정만큼 결말도 다양한 사이버텍스트보다도 특이한 텍스트다.
반면 <슬레이 더 프린세스>는 <디스코>가 성공한 그 지점에서 실패한 게임이다. <슬레이>는 선택지에 따라 결말이 달라지는 게임이지만, 그 선택지의 구성이 매우 딱딱하다. 공주와 만나는 날마다 고르는 대화에 따라서 공주는 플레이어가 공주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변화하되, 플레이어가 탐색할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다. 그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선택지에서 매번 저번에는 고르지 않았던 다른 대화문을 골라보기만 할 뿐. 플레이어는 기본적으로 굿 엔딩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찾아가야 하며, 그 끝에서 플레이어와 공주는 드디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사르트르 식의 실존주의로, 바르트 식의 연애담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정작 <슬레이>에서 누누히 강조하는 것은 다양성, 온갖 선택지가 파고들 수 있는 주름, 그 밖의 <디스코>라면 줄 수 있었지만 <슬레이>에서는 주지 못하는, 광활한 탐색 공간에 대한 약속이다. 대신 <슬레이>는 마치 마술용 상자처럼 플레이어가 거울을 눈치채는 순간 급속도로 빈약해진다. 정답 선택지를 찾아가는 재미는 있지만, 그런 방식의 재미는 아니다.
<사이버텍스트>에서 다루는 방식대로 이야기하자면, <슬레이>는 단일경로unicursal 미로다. 다양한 경로를 따라가려는 노력은 분명한 '굿 엔딩'을 암시하는 막다른 벽에 부딪히고, 플레이어는 결국 이 유일한 경로를 찾아나서야만 한다. <디스코>는 괴상한 다중경로multicursal 미로다. 눈에 뻔히 보이는 길을 따라가든 늘 이상한 길만 따라가든 그 모든 길은 실제로 하나의 독립적인 경로가 되어 미로 바깥으로 플레이어를 이끌고, 그렇게 걸으며 미로에서 탈출한 순간 단 하나의 길이 포장된 채 마련되어 있다. 이 길은 더 이상 미로조차 아니다. 그리고 큰 차이가 있다면, <슬레이>는 책 형태로도 완성할 수 있을 선택지를 갖고 있지만 <디스코>는 그렇지 않다는 것. <사이버텍스트>는 꼭 컴퓨터에서의 텍스트만을 다루는 담론은 아니지만, 사이버텍스트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매체는 컴퓨터인듯 하다. <디스코>가 이후 기존 게임 볼륨을 확장하는 여러 개의 '엔딩'-혹은 사망-을 추가했다는 점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GPT를 연결해 <디스코> 풍의 대화와 모험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텍스트 게임이 죽은 시대에 GPT를 활용하는 '텍스트 게임'이 성행한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단순히 어떤 역할을 가장하는 AI와 대화를 나누는 것 이상으로, 게임 내의 텍스트가 GPT API를 통해 맥락에 따라 생성되고 이 생성된 글이 독자와 게임 내 역학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대부분은 게임으로서는 매우 허술하게 동작한다. 도달해야 하는 엔딩이 막연하게 존재하더라도 플레이어와 AI가 서로 이상한 대화로 나아가 버린다면 게임은 성립하지 않되 텍스트는 계속 새롭게 이어진다. 머드 시대의 로그처럼, 이를 LLM 시대의 절차적 생성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텍스트' '게임'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수많은 GPT 기반 유사 연애 게임이 보여주듯, 이 영역에는 텍스트가 이어진다는 것 자체가 훨씬 중요하다고 보는 독자들이 많다. 저자와 매체의 권력은 언제든 텍스트를 중단할 수 있다는 점에만 있을 뿐, 텍스트의 방향성에는 거의 미치지 못한다. (물론 '검열'에 한해서는 그렇지 않지만)
대부분의 현대의 '사이버텍스트'가 기존 <사이버텍스트> 논의에서 연장될 수 있는 반면, 이 영역에는 무언가 새로운 확장이 필요하다. 언젠가, GPT 텍스트에 대한 문학적 논의가 좀 더 무르익는다면 그 확장이 이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기대가 있다. 특히, 확률적으로 생성되는 텍스트를 생성시키는 독자의 노력을 더 이상 '에르고딕'하다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