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시집을 펼치면 처음으로 맞아주는 시들
그중 인상깊었던 것들 몇개 뽑아봄
1. 최승자 - 未忘 혹은 備忘 1(내 무덤 푸르고)
아무도 모르리라.
그 세월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아무도 말하지 않으리라.
그 세월의 내막을.
세월은 내게 뭉텅뭉텅
똥덩이나 던져주면서
똥이나 먹고 살라면서
세월은 마구잡이로 그냥,
내 앞에서 내 뒤에서
내 정신과 육체의 한가운데서,
저 불변의 세월은
흘러가지도 못하는 저 세월은
내게 똥이나 먹이면서
나를 무자비하게 그냥 살려두면서.
2. 최승자 - 빈 배처럼 텅 비어(빈 배처럼 텅 비어)
빈 배처럼 텅 비어
내 손가락들 사이로
내 의식의 층층들 사이로
세계는 빠져나갔다
그러고도
어언 수천 년
빈 배처럼 텅 비어
나 돌아갑니다
3. 김경주 - 외계(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畵家)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 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4. 오규원 - 봄(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 집 개의 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 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자유다. 자 봐라, 꽃피고 싶은 놈 꽃피고, 잎 달고 싶은 놈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랑이고 싶은 놈은 아지랑이가 되었더.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피는 지옥이라고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던가. 내 말이 옳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5. 오규원 - 사방과 그림자(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장미를 땅에 심었다
순간 장미를 가운데 두고
사방이 생겼다 그 사방으로 길이 오고
숨긴 물을 몸 밖으로 내놓은 흙 위로
물보다 진한 그들의 그림자가 덮쳤다
그림자는 그러나
길이 오는 사방을 지우지는 않았다
6. 이연주 - 겨울 석양(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겨울 석양
서역, 그 뒤에도
사람이 살고 있습니까?
다시 시작해 보자.
더러운
추억의 힘이여.
7. 황병승 - 주치의 h(여장남자 시코쿠)
1
떠나기 전, 집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다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h는 수첩 가득 나의 잘못들을 옮겨 적었고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면 그는 수첩을 열어 천천히 음미하듯 읽어주었다
나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커다란 입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깊이 더 깊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더 크고 많은 입을 원하기라도 하듯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귀에 이마에 온통 입을 달고서
입이 하나뿐인 나는 그만 부끄럽고 창피해서 차라리 입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2
입 밖으로 걸어나오면, 아버지는 입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조용한 사람이었고 어머니와 누이 역시 그러했지만,
나는 입의 나라에 한번씩 다녀올 때마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침묵의 식탁을 향해
'제발 그 입 좀 닥쳐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집을 떠나기 전 담장을 도끼로 두 번 찍었지만
정말이지 그건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아니었다
버려진 고무 인형 같은 모습의 첫 번째 여자친구는 늘 내 주위를 맴돌았는데
그때도(도끼질 할 때도) 그애는 멀찌감치 서서 버려진 고무 인형의 입술로 내게 말했었다
"네가 기르는 오리들의 농담 수준이 겨우 이 정도였니?"
해가 녹아서 똑 똑 정수리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h는 그애의 오물거리는 입술을 또박또박 수첩에 받아 적었고
첫 번째 여자친구는 떠났다 세수하고 새 옷 입고 아마도 똑똑한 오리들을 기르는 녀석과 함께였겠지
3
나는 집을 떠나 h와 단둘이 지내고 있다 그는 요즘도 나를 입의 나라로 안내한다
전보다 더 많은 입을 달고 웃고 먹고 소리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랑하는 누이가 둘러앉은 식탁으로
어쩌면 나는 평생 그곳을 들락날락 감았다 떴다,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더는 담장을 도끼로 내려찍거나 하지 않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4
이제부터는 연애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악수하고 돌아서고 악수하고 돌아서는,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은 밴조 연주 같은...... 다른 이야기는 없다, 스물아홉
이 시점에서부터는 말이다 부작용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같이 늙어가는 나의 의사선생님은 여전히 똑같은 질문으로 나를 맞아주신다
"이보게 황형. 자네가 기르는 오리들 말인데, 물장구치는 수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낡고 더러운 수첩을 뒤적거리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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