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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선택지가 있는 게임을 해 본 적이 있는가? 게임의 스토리를 따라가던 중 플레이어는 향후의 진행 방향을 정하게 될 몇 가지의 선택지를 만나게 된다. 보통 이러한 지점을 우리는 분기점이라 부른다.

현실을 게임이라고 가정한다면 우리의 삶은 무수한 선택지의 연속이라고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이 게임에는 재시작이 없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의 중간에서 '그 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떻게 바뀌었을까?'와 같은 질문을 하기도 하고 또다른 미래에 대한 상상을 즐기기도 한다.

이런 태도는 비단 한 인간의 삶에만 적용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한 집단의 역사, 한 국가의 역사, 혹은 인류 전체의 역사가 그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조금 더 생각해본다면 한 분야의 역사 또한 그런 상상의 대상이 충분히 될 수도 있다. 나는 소설사를 대상으로 그런 상상을 해본다. 만일 400년 동안의 소설의 역사가 지금과 같은 시대가 아닌 좀 더 가볍고 유희적인 예술의 시대였다면, 내가 읽은 《트리스트럼 섄디》가 소설의 기준으로서 받아들여지게 된 시대라면, 지금 창작된 소설들의 모습은 어떻게 바뀌게 되었을까?

영국 작가 로렌스 스턴이 1759년 1권을 발표한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 이하 '트리스트럼 섄디')는 20세기 극던적인 모더니즘 소설들에서나 볼법한 시도들로 가득한 소설이다. 스토리를 중간에 끊고 여담을 늘어놓은 것은 기본에 여러 스토리를 동시에 진행시키는가 하면 시작한 이야기를 끝맺지 않을 때도 있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런 경향을 심해지는데 작가가 소설 쓰는 것을 포기한다고 선언하는가 하면 묘사하기가 힘드니 독자가 직접 그려보라, 악기를 연주해보겠다 하더니 악기 소리를 글로 내는 등 스토리는 뒤로 던져두고 가벼운 유희거리로만 가득 채워둔 모습을 보여준다.

제목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트리스트럼 섄디는 작중에서 화자의 역할만을 할 뿐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경우는 소설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아버지와 삼촌을 주제하는 이야기가 소설의 주를 이룬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대부분의 독자들의 기준에서 볼 때는 최악의 소설이다. 개연성은 부실하고 주인공은 소외되며 글의 형태도 못 갖춘 불쏘시개가 아마 오늘날의 대중들이 내릴 평가가 아닐까.

그러나 과연 이 소설은 그렇게 잘못된 소설인가? 이 소설이 출판된 시기를 생각하면, 다시 말해 18세기라는 소설이라는 영역이 이제야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행동하는 그 때의(알아두어야 할 것은 역사란 마치 낙하하는 쇠공처럼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 뻗어나가는 속도가 점점 증가한다. 세르반테스부터 스턴까지의 작가들과 발자크부터 프루스트까지의 작가들의 수를 비교해보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시대를 생각한다면 소설가가 자신의 실험성을 드러내고자 한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한다.(이제와서는 비슷하게 쓴다고 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초기의 개척자와 후기의 모방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런식으로 생각했을 때 발자크의 모방자들은 왜 그렇게 찬사를 받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바라보자. 매번 선대의 창작물을 모방하며 비슷한 플롯을 돌려쓰며 비슷한 비유로 가득찬 비슷한 설정의 비슷한 주제의 비슷한 교훈을 주는 비슷한 몇몇 소설들에 비해(톨스토이가 소송을 건다면 여럿 잡혀들어갈 것이다) 《트리스트럼 섄디》는 창작의 욕구로 가득찬 생동감 넘치는 소설처럼 보이지 않는가?

위에서 얘기했듯이 만일 현재의 소설사가 개연성의 무덤이 아닌 《트리스트럼 섄디》와 같은 유희적 글쓰기로 가득찬 시대라면 얼마나 많은 작가들의 창작을 엿볼 수 있었을까. 겉으로만 심각한 척하는 대부분의 소설들에 비해 얼마나 독창적으로 세상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 작가들이 포기한 소설사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자면 소설의 영역이 얼마나 다채롭게 확장 되었을지,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소설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웃기다는 건 재밌는 경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