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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는 소설가다. 이는 명백하다. 자기 스스로도 작가가 아닌 소설가라고 칭하며 아니, 애초에 누가봐도 소설가가 아닌가? 그런 쿤데라의 작품들 중 소설이 아닌 작품들이 몇 가지 있다. 하나는 소설가가 되기 이전에 쓴 시집이며(곡도 몇 개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넘어가기로 하자) 다른 하나는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에세이집이며 마지막으로 방금 읽은(희곡은 처음 읽어본다. 소설보다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읽은 듯 하다) 드니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이하 운명론자 자크)을 희곡으로 각색한 《자크와 그의 주인》이다.

시집은 논할 가치가 없다. 쿤데라 스스로도 자신이 쓴 시집을 부정하며 이제는 출판되지도 않는 글인데 작가의 말을 어기면서 까지 무슨 이유로 읽어보겠는가. 에세이집은 4권이나 출판되었는데 이는 에세이가 쿤데라의 저작의 주요 작품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희곡? 쿤데라가 인증한 민음사 전집의 마지막에 자리한 이 희곡은 그 자체로서 이질적인 면을 보여준다.

사실 이 책은 희곡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우선 앞부분에는 쿤데라가 쓴 《운명론자 자크》의 가치와 각색의 철학 등에 관한 글이 있고 희곡 뒷부분에는 다른 사람이 쓴 희곡에 대한 비평, 그리고 작가의 말 몇 가지가 있다. 즉, 어떻게 보면 쿤데라의 에세이의 연장선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튼 쿤데라가 인정한 자신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책이기에 마지막 번호에 위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희곡이란 매체는 아마 처음 접해보는 것일 것이다. 교과서에서 보는 단도질 당한 글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살면서 연극을 본 적도 몇 번 없다. 극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이 희곡은 상당히 즐겁게 읽었다. 서술없이 등장인물들의 대사만을 읽는 것도 꽤 재미있다.

희곡은 총 3막으로 나뉜다. 그리고 각 막에서는 주요 이야기로 인물들이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가 등장한다. 여기서 이 희곡의 특징은 이야기의 핵심인물이 과거와 현재를 연단을 오가며 동시에 연기하고 보여준다는 것이다(사실 일반적인 기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난 희곡은 처음 보는 것이기에 알 수가 없다). 또 다른 특징이라면 2막에서 등장하는 주막 여주인의 사랑 이야기는 주요 스토리의 큰 줄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쿤데라는 이 작품의 완성을 전부 여기에 걸었다고 말한다).

희곡은 형식은 다르지만 마치 쿤데라의 소설과 같다. 특히 그의 소설적 형식이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웃음과 망각의 책》이 생각난다. 전혀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의 집합, 그리고 그 이야기들 뒤에 존재하는 하나의 거대한 소설을 이루는 주제. 각 막들은 사랑이 이야기를 표현하고 이 이야기들은 앞서 등장한 이야기들과 조금씩 공통점을 보인다. 차이점이라면 이야기의 화자가 수행하는 역할이 다르다는 것이다(이는 직접 읽어보면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전부 설명하여 좋은 작품을 즐길 권리를 박탈하고 싶지는 않다).

쿤데라는 《운명론자 자크》를 얘기하며 행동의 역설을 강조했다. 초기의 소설들이 보인 행동의 위주의 서술, 다시 말해 인간이 타인과 구분되는 점은 행동에 있다는 주장이 《운명론자 자크》에서는 부정된다. 작품이 표현한 이런 생각은 쿤데라의 희곡에서 형식의 변화를 통해 제시된다. 세 막의 핵심 인물들은 각자 다른 삶을 살아왔으나 결국에는 모두 비슷한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로 묶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토리의 연결은 없으나 주제의 동일성 아래 공통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쿤데라는 자신이 존경을 표하는 소설에 대해 새로운 형식을 부여하고 변주함으로서 또다른 작품을 창조하였다. 각색이란 이런 것이다. 원작 존중이라는 이름하에 모든 것을 오히려 축소하고 마구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자신의 뜻에 따라 변주하는 것. 원작자를 존중하며 재탄생시킨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