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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이미지

일리아스 이야기 나오는 김에


딴데다 쓴 글인데 여기에도 올려봄




아킬레우스는 왜 분노했을까?



아홉 해 동안, 아킬레우스는 태양처럼 빛나고 검처럼 용맹했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기고는 울고불고했다네.

마치 아이가 딸랑이를 빼앗기고 우는 것처럼.

Jean-François Sarrazin (1603-54)


  간혹 아킬레우스는 단지 여자 하나때문에 분노하여 그리스군을 위기에 몰아넣었다고 비난받는다. 이는 오래전부터 조롱의 대상이기도 했고, 현재도 자주 밈으로 희화화되고는 한다. 


  그런데 정말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단순히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겼기 때문이었을까? 물론 시작은 그러했지만 이는 사건의 본질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아킬레우스가 왜 분노한 것일까? 다시금 일리아스를 살펴보자.



사건의 시작



신들 중에서 과연 누가 이 둘을 다투고 싸우게 만들었는가?

레토와 제우스의 아들이로다. 그는 왕에게 노여움을 품고

군대에 몸쓸 역병을 일으켜 군사들을 파멸시키고 있었으니,

그 까닭은 사제 크뤼세스를 아트레우스의 아들이 업신여겼기 때문이다.

일리아스 1.8-11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아가멤논과의 분쟁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아가멤논이 아폴론을 무시함으로써 시작된다. 더 정확히는, 아가멤논의 노예로 붙잡힌 자신의 딸을 되찾기 위해 찾아온 아폴론의 사제 크뤼세스를 아가멤논이 무시했기 때문이다. 


  크뤼세스는 사제로서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는 양털 띠를 두른 황금 지팡이를 들고 아가멤논을 찾아온다.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아폴론의 사제로서 방문한 것이다. 그는 먼저 그리스군이 승리하고 무사히 귀환하도록 축복하고, 아폴론의 면을 봐서라도 자신의 딸을 돌려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몸값을 바치겠노라며.


  전통적으로 사제는 존중받아 마땅한 직위였다. 동시에 그는 탄원자로서 찾아왔고, 탄원자를 존중하는 것은 최고신 제우스가 직접 돌보는 영역이었다. 또한 딸을 되찾기 위한 어마어마한 몸값도 지참했다. 사제의 축복을 받은 그리스군들도 환호성을 지르며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외친다. 


  그런데 아가멤논은 예상과 달리 화를 내며 사제를 쫓아낸다. 네 딸은 평생 내 밤시중을 들다 늙어갈 것이고, 지금 바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때는 신의 화관도, 지팡이도 너를 결코 지켜 줄 수 없다(일리아스 1.28)'면서.


  왕이 사용하는 언어라기에는 거칠고 천박하다. 더 놀라운 것은 신에 대한 불경(그것도 아폴론!)이다. 대체 왜 그랬을까? 군대가 한 목소리로 크뤼세스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외친 것이 그의 심기를 거슬렸기 때문이다(1.24). 아가멤논은 이를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모욕당한채 쫓겨난 아폴론의 사제 크뤼세스는 그리스군이 '내 눈물의 대가(1.42)'를 치르도록 아폴론에게 간청했고, 이를 들은 아폴론은 그리스군에게 역병을 내린다. 일리아스 시작 50행만에 천박한 폭군으로서의 면모와 한심한 리더십을 보여준 아가멤논에 의해 그리스군은 위기에 처한다.


  역병으로 수많은 군사들이 죽어나가자 아킬레우스는 회의를 소집한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아폴론이 그렇게 화가 났는가? 예언자 칼카스는 그 이유를 알고 있지만 범인에게 보복당하지 않기 위해 먼저 아킬레우스의 보호를 요청한다. 아킬레우스는 설령 그가 아가멤논을 지목한다 해도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제서야 칼카스는 진상을 밝힌다. 이 사태는 아폴론을 무시한 아가멤논 불경 때문이다.


  원인이 밝혀지고 고성이 오가는 끝에, 결국 아가멤논은 사제의 딸을 돌려주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 대가로 아가멤논은 새 여자를 요구한다. 


  그것도 당장.



명예의 선물



자, 그렇다면 나를 위한 명예의 선물이 당장 마련되어야겠소. 아르고스인들

중에서 나 혼자만 명예의 선물을 못 받는다는 것은 당치 않은 일이니까.

여러분 모두가 보다시피 내 명예의 선물이 애먼 곳으로 가고 있잖소.

일리아스 1.118-120


  일리아스의 전사들이 살아가는 시대는 현대와 같은 죄책감의 문화가 아닌, 수치심의 문화가 지배하던 사회였다. 명예와 위신은 사회적으로 지금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여겨지는 가치였고 더 높은 지위에는 더 높은 명예가 요구되었다. 그리고 명예는 예컨대 재산과 같은 물질적인 지표로 측정할 수 있었다. 물론 노예 역시 주인에게 종속된 살아있는 재산이므로 노예도 명예의 선물geras이 될 수 있었다.


  이제 내 명예의 선물이 떠나가니, 내 위신을 보존하기 위한 새로운 선물이 필요하다. 그것이 아가멤논의 논리였다. 그러나 새로운 노예가 갑자기 생겨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아킬레우스는 전리품은 이미 분배된 상태이고, 한번 분배된 전리품을 빼앗아 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항변한다. 새로운 명예의 선물은 트로이가 함락되어야 그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를 위협한다. 자신은 그러한 사탕발림에 속지 않으며, 지금 당장 주지 않으면 아킬레우스 너의 것을 가져가겠다. 즉 아킬레우스가 전쟁에서 전리품으로 얻은 애첩인 브리세이스를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왜 뜬금없이 아킬레우스를 위협하는 것일까? 아킬레우스가 먼저 회의를 소집하고, 예언자 칼카스를 보호한다고 약속하고(그것도 아가멤논에 대항해서!), 그에게 사사건건 대드는 것 역시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에게 '명령'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을까? 둘은 무슨 관계인가?



아킬레우스의 지위



인간들의 왕인 아트레우스의 아들과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가 다투며 갈라서게 된

바로 그때부터[...]

일리아스 1.5-7


  대체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의 무엇인가? 그의 주군인가? 아가멤논은 확실히 바실레우스(왕)이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도 미르미돈인들을 이끄는 바실레우스이다. 그렇다면 같은 바실레우스지만 봉건적 종속관계에 있는가? 그렇지 않다. 둘 사이에는 어떤 종속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가멤논은 다만 '동등한 자들 중 첫번째' 일 뿐이다. '황금이 넘치는' 부유한 뮈케네를 다스리고 있는데다가 가장 많은 군사들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들의 세계에서 둘의 위치는 확연히 역전된다.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은 '아트레우스의 아들'로 한낱 인간이었으나,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는 여신 테티스의 아들로 반신demi-god이었다. 반신 아킬레우스는 신들과 가깝다. 아테나는 아킬레우스에게 직접 모습을 드러내 조언하고, 헤라는 트로이 멸망을 바라는 자신의 뜻과 반하는데도 불구하고 아킬레우스의 명예를 보호하는데 관심이 많다(24.51-63). 


  또한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여신 테티스는 신들이 일으킨 반역으로 위기에 처한 제우스를 구한 공로가 있었다. 제우스의 지배권 확립에 큰 공을 세운 공신인 것이다. 그런데 제우스와 포세이돈은 테티스를 두고 다퉜지만 곧 아버지보다 강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그녀를 인간 펠레우스에게 내줬다는 일화가 내려온다. 제우스(혹은 포세이돈)보다 강한 아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제우스의 왕권을 전복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아킬레우스가 제우스나 포세이돈의 자식이었다면 아버지보다 강하고 불멸이며 어쩌면 제우스를 꺾고 우주를 지배할 자격을 갖춘 신으로 태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테티스가 제우스에 의해 인간과의 결혼을 강요당했기에, 아킬레우스는 '아카이아인 중의 최고' 이기는 하나 결국 신들에 비해 한참 못 미치고 끝내는 죽어야 하는 인간으로 태어난다. 


  제우스의 지배는 인간으로 낳음당한(?) 아킬레우스의 희생으로 유지된다. 이처럼 제우스는 테티스와 아킬레우스에게 크나큰 존재론적 빚을 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우스는 아킬레우스와 테티스의 부탁을 차마 무시할 수 없다. 이 사실은 추후 그리스군에게 거대한 재앙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에 대한 신들의 태도는 어떠한가? 아가멤논의 간청은 좀처럼 신들에게 닿지 않는다. '[...] 크로노스의 아들은 희생 제물만 받았을 뿐, 그에게 이 일을 이루어주지는 않고 부러울 리 없는 고생만 늘려주었다(2. 419-420)'. 오히려 제우스는 아가멤논에게 거짓된 꿈을 꾸게 하는데 이를 믿은 아가멤논은 멍청한 실수를 연발하고 아가멤논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진다. 


  신들은 아킬레우스를 편애하는 것이다.



아가멤논의 지위



너는 백성들을 잡아먹는 왕이렷다! 그것은 네가 쓸모없는 자들에게 왕 노릇 하기 때문이다.

일리아스 1.231


  이처럼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보다 '공식적으로' 낮은 지위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에게 명령할 권한도 없었다. 애초에 아가멤논은 그리스군의 바실레우스들에게 명령할 공식적인 제도나 법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황금이 넘치는 뮈케네'를 다스리는 강력한 바실레우스였기 때문에 바실레우스들 사이에서 적절한 존중을 받기는 했지만, 결국 중요한 사항은 바실레우스들이 모인 회의에서 합의로 결정되어야 했다. 


  전리품을 분배하는 것 역시 아가멤논의 독단적인 결정사항이 아니었다.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이 빼앗으려는 애첩 브리세이스를 '내 갖은 고생을 한 끝에 아카이아인들의 아들들이 나를 위해 준 그 선물(1.162, 1.391)'이라 부르고, 둘 사이를 중재하려고 끼어든 네스토르 역시 브리세이스를 '애초에 아카이아인들의 아들들이 그를 위해 명예의 선물로 주었다(1.276)'고 말한다. 브리세이스는 아킬레우스의 업적에 대한 보상으로, 바실레우스들의 합의로 주어진 선물인 것이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의 여자 브리세이스를 강제로 빼앗으려 한다. 이는 아킬레우스에 대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바실레우스들이 공식적인 결정한 사항을 힘으로써 뒤집는 것이었다. 암묵적으로 인정되는 그의 권한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 월권행위는 아가멤논의 권위 뒷편에 가려져 있던 지도력의 본질에 대한 위기를 촉발한다. 아가멤논은 대체 무슨 자격으로 통치하는가? 이런 폭군에게 통치할 자격이 있는가? 통치자의 자격은 무엇인가?



통치자의 자격



  통치자로서 아가멤논의 자격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첫 번째는 오래된 세습이다. 가령 아가멤논의 왕홀Scepter은 헤파이스토스가 제우스를 위해 만들어준 것이다. 이것이 펠롭스와 아트레우스를 거쳐 아가멤논까지 내려온다(2.101-105). 필멸자 3대에 걸쳐 내려온 왕홀은 제우스가 승인한 신성한 왕권의 상징으로 강력한 권위를 발한다. '제우스께서 영예를 내려주신, 지휘봉을 지닌 왕은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은 몫의 명예를 받는 법이다(1.278-279)'. 


  왕홀이 상징하는 신성한 왕권을 통해 그는 부유한 뮈케네를 다스린다. 여기서 두 번째 권위의 원천이 탄생한다. 바로 힘에 의한 공포이다. 그는 그리스인들을 위력으로 다스리고, 그리스인들은 그에게 복종한다(1.78-79). 뮈케네의 강력한 부와 군사력 앞에 감히 대들 수 없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아가멤논은 스스로 '아카이아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자처' 한다(1.90-91).


  아킬레우스는 이를 거부한다. 이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우고 가장 고생한 것은 자신이다. 그런데 아가멤논은 전선에 서지 않으면서도 지위를 이용해 아킬레우스보다 더 많은 명예의 몫을 가져간다(1.163-168, 225-227). 지금은 바실레우스들이 아킬레우스에게 준 명예의 선물마저 빼앗으려 한다. 이렇게 이득에 혈안이 된 지도자를 도대체 누가 마음속으로 따를 수 있을까?


빌어먹을, 이 뻔뻔함을 뒤집어쓴 놈아! 이득에 혈안이 된 놈아!

이래서야 아카이아인들 중 어느 누가 기꺼이 네놈 말을 따를 수 있겠느냐?

누가 너를 위해 길을 떠날 수 있겠으며, 누가 사람들과 맞붙어 힘껏 싸울 수 있겠냔 말이다.

일리아스 1.149-150


  이득에 혈안이 된 백성들을 잡아먹는 왕, 그를 따르는 것은 쓸모없는 자들 뿐이다. 아가멤논은 그의 힘에 질려 아무 말도 못하는 허수아비들의 왕인 것이다. 단지 공포에 질려 따를 뿐 마음속으로는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는다.


  모든 면에서 탁월한 아킬레우스 역시 그를 따를 생각이 없다. 사실 아가멤논은 뮈케네의 부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자신이 아카이아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자처하지만, 호메로스가 공인한 아카이아인들 중의 최고는 아킬레우스이다. 아킬레우스는 '그야말로 아득히 뛰어난 자(2.769)'였던 것이다. 그런 아킬레우스가 다스릴 자격 없는 폭군 아가멤논을 왜 따라야 하는가?



명예의 대가



글라우코스! 우리 두 사람은 뤼키아에서 상석에 앉아, 고기에,

가득 따른 잔까지 받아가며 왜 그토록 지극한 대접을 받는 것이며,

왜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리를 신들이라도 되듯 바라보는 건가? 게다가

우리는 크산토스강 둑을 따라 큼직하게 따로 떼어놓은 곳에, 과수원에다가

밀이 익어가는 들판까지 딸린 아름다운 영지에 살고 있는데, 그건 또 대체

무엇 때문인가? 그러니 지금 우리는 마땅히 뤼키아인들 중에서도

선두에 자리 잡고 서서 불붙어 오른 전투를 마주하러 가야 해. 가슴받이를

든든히 두른 뤼키아인들 중 누군가가 이렇게는 말해야 하지 않겠나,

‘과연, 살 오른 양들을 먹고, 고르고 고른 꿀처럼 달콤한

포도주를 마시며 뤼키아를 다스리는 우리 왕들이 허명에 취한 자들은

아니었어, 아니고말고. 저분들이 뤼키아인들 중에서도 선두에서

싸워내는 걸 보면 그 힘도 월등한 거지.’

일리아스 12.310-321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을 죽이기 위해 칼을 빼드려는 순간 아테네가 개입하여 아킬레우스를 말린다. 여기서 참으면 나중에 세배나 되는 선물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다시금 칼을 칼집에 넣은 아킬레우스이지만 생각해봐도 황당할 따름이다. 


  앞서 언급하였듯 아킬레우스는 어쩌면 제우스나 포세이돈의 아들로, 우주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태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언젠가 죽어야 할 인간의 아들로 태어나게 된다. 이제 그는 명예를 통해 불멸에 이르려고 한다. 그런데 불멸은 커녕 성격 더러운 아가멤논과 다투다가 여자나 뺏기는 처지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의 부하가 아니었다. 아킬레우스는 전쟁에서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전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아가멤논과 마누라를 오쟁이진 메넬라오스를 돕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인들과 싸울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탁월한 전공에 대한 명예의 보상을 받지 못했다.


  명예의 보상은 어떻게 얻는가?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선두에 서서 전공 획득해 얻는다. 명예는 어떻게 보상되나? 전리품('명예의 선물geras')과 존중을 통해 보상된다. 목숨을 걸기 때문에 명예를 받는다. 그렇다면 목숨을 더 많이 걸 수록, 더 많은 명예를 받을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짧은 생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전장에서 죽어 불멸의 영광을 얻거나, 고향으로 돌아가 긴 여생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9.410-416). 그런데 목숨을 더 많이 걸수록 더 많은 명예를 받는다면, 처음부터 죽음이 예정된 아킬레우스는 얼마만큼의 명예를 받아야 하는가?


  그러나 아킬레우스의 활약과 무관하게 명예의 몫은 항상 아가멤논이 더 많이 가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폭군 아가멤논은 이제 그의 전공과 어울리지 않는 그의 소박한 몫조차 빼앗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뒤로 물러나 있는 사람이나, 죽자고 싸우는 사람이나 받는 몫은 똑같습디다.

쓸모없는 사람이나, 유능한 사람이나 똑같은 명예를 누리고, 무위도식하는

사람이나, 엄청나게 애쓰는 사람이나 결국 죽어 나가는 건 똑같고요.

일리아스 9.328-330 


  그리스군의 명예 분배 시스템은 고장났다. 아킬레우스에게는 더 이상 목숨 걸고 싸워야 할 이유가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결론 : 분노의 이유



노여움을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노여움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아카이아인들에게 안겨주었고,

그 많은 영웅들의 강인한 목숨을 하데스로 떠나보내었으며,

그들 자신을 온갖 개 떼와 새 떼의 먹이로 만든

그 저주받을 것을! [...]

일리아스 1.1-5


  싸워야 할 이유가 없어진 아가멤논은 전쟁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모욕당한 그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말하며 신들의 분노를 나타낼때만 사용하는 menis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menis는 사회 질서가 어긋나는 일이 벌어졌을때 발생하는 신적인 분노로, 그 분노는 공동체 전체가 연대책임으로 감당하는 것이었다.


  앞서 보았듯 이 분노는 단순히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여자를 빼앗겨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가 아카아이아인 중의 최고이고, 누가 더 명예를 가져갈 것이며, 최종적으로 누가 통치의 자격이 있는지가 걸려있는 위신투쟁의 문제였다.


  결국 아킬레우스는 그리스군이 자신을 무시한 대가를 치르도록 자신이 참전하지 않는 동안 트로이군에게 죽어 나가도록 어머니를 통해 제우스에게 간청한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여신 테티스는 이를 제우스에게 전달하고 두 모자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제우스는 들어주지 않을 방도가 없다. 제우스가 이를 수락하며 그리스군은 아킬레우스의 menis를 뒤집어쓴다. 이 재앙은 아킬레우스가 분노를 거두고 전장에 복귀할 때까지 그리스군을 가혹하게 짓누르게 될 것이었다.



참고자료


• 호메로스. (2023). 일리아스 (이준석, 역). 아카넷.

• Hammer, D. (2002). The Iliad as Politics: The Performance of Political Thought.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 Muellner, L. (2005). The Anger of Achilles: Mênis in Greek Epic. Cornell University Press.

• Pache, C. O. (Ed.), Dué, C., Lupack, S., & Lamberton, R. (Eds.). (2020). The Cambridge Guide to Hom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 Porter, A. (2019). Agamemnon, the Pathetic Despot: Reading Characterization in Homer. Center for Hellenic Studies.

• Ready, J. L. (Ed.). (2024). The Oxford Critical Guide to Homer’s Iliad. Oxford University Press.

• Schein, S. L. (2020). Homer: Iliad Book I. Cambridge University Press.

• Slatkin, L. M. (2011). The Power of Thetis and Selected Essays. Center for Hellenic Studies.





제우스는 왜 테티스의 부탁을 들어줬을까



  일리아스에서 모욕당한 아킬레우스는 전쟁 파업을 선언하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아가멤논이 깨닫게 하기 위해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 테티스를 통해 제우스에게 청원한다. 그리스군이 전쟁에서 패배하도록 제우스가 트로이군을 도와달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자신의 명예가 높아질 수 있다면서. 


  테티스는 제우스에게 아들의 청원을 들어주기를 부탁하고, 제우스는 깊은 고민 끝에 결국 청을 들어주기로 약속한다. 일리아스 내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사건은 제우스가 이 부탁을 들어준 결과로부터 발생한다. 그 과정에서 제우스가 인간사에 일일히 개입해야 하는 귀찮고 피곤한 일들도 발생한다. 특히 제우스의 확약을 받은 테티스가 물러가자마자 그리스 편인 헤라가 등장해 제우스와 한바탕 말싸움을 벌이는 등 그리스 편에 선 신들과도 끊임없는 불화를 겪는다. 그러나 제우스는 불만을 가진 다른 신들에게 권위와 위신이 끊임없이 공격당하면서도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한다.


  물론 다른 신들도 인간사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개입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제우스가 한낱 필멸자인 아킬레우스를 위해 많은 갈등과 노고를 겪으면서까지 개입하는 것은 작중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제우스는 대체 왜 테티스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고, 왜 그렇게 철저하게 약속을 이행하는 것일까?



  작중에서 아킬레우스와 테티스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표면적 사유는 예전에 테티스가 제우스를 파멸에서 구해주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헤라와 포세이돈, 아테나가 반란을 일으켜 제우스를 결박한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이 반란은 테티스가 올림포스로 올라와 제우스를 사슬에서 풀어주는 한편 강력한 헤카톤케이레스인 브리아레오스를 불러내 제우스의 경호원으로 붙임으로써 막을 내린다.


  헤라와 포세이돈, 아테나(기묘한 조합이다)가 반역을 일으켰다는 일리아스에서만 등장하는 이 신화는 그리스의 계승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 를 통해 잘 알려진 이 계승신화에서 우주의 지배권은 우라노스와 크로노스를 거쳐 최종적으로 제우스에게 돌아간다. 


  그런데 일리아스 에서 언급되는 신화에서 제우스의 지배권은 올림포스 신들에게 다시금 위협을 받는다. 제우스는 헤라와 포세이돈, 아테나에 의해 결박당하는데 신들은 죽을 수 없기에 결박은 죽음에 준하는 형벌이다. 그 결박을 테티스가 풀어줌으로써 제우스는 해방되고 우주의 지배권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제우스는 테티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테티스가 제우스의 지배권 확립에 일조한 이 사건은 어떻게 보면 역설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다름아닌 테티스야말로 제우스의 우주적 지배를 전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계승신화에서 우라노스는 아들인 크로노스에게, 다시 크로노스는 아들인 제우스에게 전복당해 지배권을 빼앗긴다. 그런데 질서의 여신 테미스가 일러주었듯이 테티스의 자식은 아버지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태어날 운명이다. 


테미스가 그들 가운데서 말했도다. 

운명에 따라 바다의 여신이 아버지보다 더 강력한 

군주를 낳을 것이니, 그 신은 천둥의 벼락보다 

더 강한 무기를 다스릴 것이요, 

그것은 무자비한 삼지창보다도 더 강하리라. 

만일 제우스나 제우스의 형제들과 맺어진다면 말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이 일을 그만두라. 

그녀를 필멸자의 침상에서 자식을 낳아,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을 보게 하라. 

그의 손은 아레스와 같고 발은 번갯불처럼 빠르리라.

핀다로스, 이스트미아 8


  테티스가 낳을 아버지보다 강한 아들이라는 존재는 필연적으로 왕권 전복에 대한 긴장감을 내포한다. 한때 크로노스, 그리고 제우스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제우스와 포세이돈은 테티스와 결혼하기 위해 서로 다투었으나 이 테미스의 경고를 듣고는 다툼을 멈춘다. 그리고 테미스의 조언에 따라 제우스는 테티스를 인간과 결혼하게 한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아킬레우스의 운명 역시 결정된다. 만약 아킬레우스가 제우스나 포세이돈의 자식이었다면 아버지보다 강하고 불멸이며 어쩌면 제우스를 꺾고 우주를 지배할 자격이 있는 신으로 태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테티스가 제우스에 의해 인간과의 결혼을 강요당했기에, 아킬레우스는 아버지보다는 강하지만 결국 신들에 비해 한참 못 미치고 끝내는 죽어야 하는 인간으로 태어난다. 우주를 지배하기는 커녕 성격 더러운 아가멤논과 다투다가 무시당하는 처지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헤파이스토스, 올륌포스의 허다한 여신님네 중에 과연 그런 분이

있긴 할까요? 크로노스의 아드님 제우스께서 그 누구보다도 더, 내게

고통을 내린 것처럼, 그토록 한 맺힌 설움을 속으로 삭여내신 분이?

그분은 다른 바다 여신들은 다 놔두고 나를 한낱 인간에 불과한 아이아코스의

아들 펠레우스와 짝지어놓았고, 저는 비록 조금도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인간과 나누는 잠자리마저도 견뎌냈어요."

호메로스, 일리아스 18.429-434


  작중 내내 테티스는 인간과의 잘못된 결혼에 슬퍼하며 그로 인해 태어난 자식의 짧은 생에 슬퍼한다. 아킬레우스 역시 짧은 생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어머니, 때 이른 죽음을 맞게끔 저를 낳으셨으니 올륌포스에 계신

그분, 높은 곳에서 벼락을 내리치시는 제우스께서는 제게 적어도 명예만큼은

안기셔야 하지 않나요. 그러나 그분은 절 조금도 명예롭게 하시지 않는군요."

호메로스, 일리아스 1. 352-354


  나를 짧은 생을 살도록 낳았으니, 제우스는 나에게 명예라도 주어야 하지 않겠냐는 아킬레우스의 말은 하나의 변형된 기도 공식으로도 볼 수 있다(Slatkin 2011). 고대의 그리스에서는 신에게 무언가를 청할때 일반적으로 자신이 신에게 바친 호의를 먼저 말하고 그 다음에 원하는 것을 말하고는 했다. 내가 바친 호의만큼 나에게 보답해 달라는 형식이다. 예를 들어:


"제 말씀 들어주소서, 은궁(銀弓)의 임이시여! 크뤼세와, 지극히 신성한

킬라를 두루 살펴 다니시고, 테네도스를 힘써 다스리는 임이시여,

스민테우스여! 예전에 제가 그 우아한 신전 위로 지붕을 덮어드렸거나,

황소며 염소의 살진 사태를 태워 바친 적 있었다면,

저를 위해 부디 이 소원 하나 들어주소서,

다나오스인들이 임의 화살들로 제 눈물의 대가를 치르게 하소서!"

호메로스, 일리아스 1. 36-42


  이 같은 맥락에서 아킬레우스가 신에게 바친 호의는 그의 짧은 생이다. 이를 통해 아킬레우스가 제우스에게 요구 하는 것은 명예이다.



  테티스(그리고 아킬레우스)의 부탁을 받은 제우스는 아킬레우스를 그야말로 살뜰히 챙겨준다. 다른 신들과의 불화도 전혀 개의치 않고, 나중에 아킬레우스에게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라는 명을 내리면서도 아킬레우스의 명예가 훼손되지 않도록 각별히 배려한다. 일리아스에서 신에게 이러한 특별한 취급을 받은 인간은 아킬레우스 외에는 아무도 없다. 


  제우스는 테티스와 아킬레우스에게 이중의 호의를 빚지고 있다. 테티스에게는 인간과 원치 않은 결혼을 강요한 것과 자신을 신들의 반란에서 구해준 도의적인 빚을, 그리고 아킬레우스에게는 그가 아버지보다 강한 신이 아닌 짧은 생을 살 인간으로 태어나게 한 존재론적인 빚을 말이다. 


  특히나 아킬레우스는 제우스나 포세이돈의 아들로 태어났을 경우 아버지를 능가하고 결국 우주를 지배할 수도 있었을 존재였다. 결국 제우스의 우주적 지배란 필멸자로 태어나 때이른 죽음을 맞이할 아킬레우스의 희생을 담보로 잡아 보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제우스가 테티스의 부탁을 들어준 이유이다.


참고자료


• 호메로스. (2023). 일리아스 (이준석, 역). 아카넷.

• Schein, S. L. (2020). Homer: Iliad Book I. Cambridge University Press.

• Slatkin, L. M. (2011). The Power of Thetis and Selected Essays. Center for Hellenic Stud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