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경고 기능이 추가됐습니다.
(펼침 메뉴 > 설정에서 변경 가능)






최근 대략적으로나마 복잡계 관련 책들을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다. 일부 분야는 이미 구체적으로 공부하였기도 하고, 특히 많은 계산을 요구하는 분야의 특성상 십여 년 전 관심을 처음 가졌을 때보다 지금은 개인적으로도 여러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게 많아 접근성이 상당히 낮아진 셈이다. 생명 게임 같은 단순한 프로그램은 이제는 휴대폰으로도 돌려볼 수 있는 수준인데다, 예전이라면 상당히 시간이 걸렸을 RNA 분석(유전 알고리즘, SVM 등) 같은 기계학습도 구글 코랩을 사용하는 주피터 노트북 코드로 조금만 돌리면 바로 결과가 나오니 상전벽해까지는 아닐지라도 재미로 공부하기에는 꽤나 좋은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물리나 화학 분야에 접근하기란 여전히 어려운 일이고 그쪽 분야를 연구하는 친구들한테도 이 비선형 동역학이나 비평형 열역학은 영 연구 분야와 동떨어진데다 관심을 갖기에는 너무 어렵고 비주류인 분야라 별로 도움되는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쪽은 그냥 교양서를 읽는 쪽에서 만족하는 편이다.



다만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는 사실 비평형 열역학에 대한 책이라기에는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다. 구성 면에서 이 책과 비슷한 내용을 다루는 책으로는 아마 찰스 길리스피의 <객관성의 칼날> 정도를 꼽을 수 있을 텐데, <객관성의>는 우리에게 익숙한 과학의 표면보다는 이 과학 연구에 참여한 이들의 내면에 있던 자연철학의 계보를 짚어나가며 이들이 자연을 탐구하는 데에 있어서 그리던 일종의 청사진을 조명한다. 물리에서는 뉴턴이 제시한 태엽장치 기계를, 화학이나 생물학에서는 유기적으로 발생하는 전체 생명을 보는 식으로. <혼돈으로부터의> 역시 기본적으로는 비슷한 틀에서, <객관성의>보다는 중세/근세 철학에 대한 고려를 덜하되 우리에게 과학적 세계관으로 익숙한 결정론적인, 기계장치와 같은 우주관과 그 외를 대조하는 책이다. 특히 결정론적 동역학이 어째서 점차 과학 연구의 실정에 들어맞지 않게 되었고 열역학과 통계역학의 대두가 이를 어떻게 보여주는지에 집중해서. 이 관점은 위너의 <사이버네틱스>에서도 다루던 것이지만, <사이버네틱스>가 새로운 방식의 우세를 논한다면 <혼돈으로부터>는 그 이상으로 옛 방식을 문제시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운동량과 위치라는 두 변수만으로 구성된 해밀토니안 역학이 전제하는 결정론적이고, 보편적이고, 가역적인1) 세계관이 자연을 탈신비화하며 우리 주변을-어쩌면 우리 자신까지도-그 어떤 자유의지도 존재하지 않는 기계장치로 보도록 오도한다는 문제가 있다. 물리학이 과학에서 우세를 점한 과정 동안 목적론적이고, 전체론적이고, 유기론적인 다양한 시각과 과학관이 실제와 맞지 않는다는 비판 속에서 하나둘 무너져내렸고, 라플라스의 악마는 본디 의도와는 달리 과학이 실제로 라플라스의 악마가 충분히 존재할 수 있음을 보증하는 듯한 효과를 냈다. 문제는 그저 얼마나 더 정밀하게 관측하고 계산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 모든 사건이 결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결정론적 격자가 점차 눈에 선명해졌다. 이 격자가 좁아질수록 자유의지, 생철학, 주관적 시간 등의 여러 개념이 무색해졌고,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과학의 성과를 믿었다. 이 반발로 여전히 현상학적, 실존주의적 접근이 남아 있지만 그 효과는 그리 크지 못하다는 것이 저자들의 판단이다. 그리고 저자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데, 바로 이 통속적인 과학관을 타파하는 것이다.2)



열역학의 발전은 비가역적일 뿐 아니라 임의적인 사건 발생에 대한 시야를 열었다. 해밀토니안 역학에서의 전제만으로 화학적 관찰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맞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그 전제를 유지한 상태에서 운동량과 위치로 정의되는 입자들이 각각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그 분포와 가능성을 거시적으로 계산하는 것에서 답이 나왔다. 통계역학은 현재 계의 가능성을 헤아리는 앙상블을 사용해 가능하지 않을 법한 상태에서 가능할 법한 상태로 비가역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설명하였고, 역학에서 사용하는 기존 전제들이 유지되었지만 이 전제들은 동역학에서처럼 깔끔한 답을 결코 내려주지 않았다. 예를 들어, 현재 계의 온도를 통해 입자들의 평균 속도와 같은 통계량을 계산할 수는 있지만 이 계에서 특정 입자의 움직임을 정확히 헤아린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중요하지도 않다) 저자들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열역학의 혁명3)이 어디까지나 평형 상태라는 안정된 계에서의 연구에 갇혀 있다고 주장한다. 거시적인 틀에서 계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는 결론조차 어디까지나 실제 세계에서는 극히 일부만을 차지하는 소수 사례를 극히 과장하는 것일 뿐이라며.



비평형 열역학에서 계의 움직임을 안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특정한 온도/기압 및 분자 간 비율 속에서 계는 자유 에너지 그래프 속에서 서서히 변화한다. 그 기울기가 0인 평형 상태에서 계는 안정하게 유지되지만, 평형 상태가 여러 개일 경우에 이 계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가? <혼돈으로부터의>에서 제시하는 이 소산 구조는 다소 무작위적으로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택한다. 이 갈래치기를 확정지을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전체적인 틀에서 보되 결정론적인 격자를 따라가는 계는 그러나 격자의 어느 길을 택할지를 선택한다. 예를 들어, 레일리-베나르 대류가 일어날 때 큰 틀에서 이 대류가 여러 소용돌이를 표면에 만들 것은 알 수 있지만, 각각의 소용돌이의 크기나 수를 정확히 알아낼 방법은 없다. 이것을 화이트헤드가 주장하는 과정으로서의 지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테고, 정보화 시대에 걸맞게 결코 요약될 수 없이 실제로 계산되어야 알 수 있는 물리량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테다. 해석은 사람에 따라 갈리겠지만, 이 자기조직화하는 계를 우리가 탐구해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저자들의 논지는 이해는 가지만, 정작 비평형 열역학 자체에 대한 내용이 그리 풍부하거나 이해할 만한 책은 아니었다. (계 외부/내부 엔트로피나, 브뤼셀레이터 등에 대한 설명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자세하지는 않은 것 같다) 아무래도 과학서보다는 철학서에 가까운 책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할 터라, 프리고진이 있었던 브뤼셀 학파의 전공서를 살짝 들여다보고 있다. 열 방정식도 어려워 던져버린 사람이 과연 이걸 정말 읽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



1) 가역적이라는 말은 정말로, 단순히 연습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전제다. 일반물리를 처음으로 배울 때 우리는 보존력이 어떻게 현재 위치에서 무한히 먼 곳으로 이동하며 에너지를 보존할 뿐 아니라, 시간축을 현재로부터 미래로 두고 적분하는 것과 현재로부터 과거로 두고 적분하는 것이 단지 부호의 차이만 있을 뿐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배운다. 로저 펜로즈처럼 극단적일 정도로 이론적인 물리학자는 <시간의 순환> 같은 책에서 아예 시간이 정해진 한계까지 흘러갔다가 그 다음에는 역순으로 돌아가며 무한히 반복하는 우주론을 제시하기까지 하니, 가역성에 대한 고발이 단순히 이론적 논쟁만은 아닌 셈이다.



2) 물론 양자역학 역시 이미 어느 정도는 성과를 보았다. 사실, 너무 보아서 이제 양자역학으로 현실의 우연성이나 불확실성을 논하는 글이 그저 남용되고 있다는 생각만 들 정도로. 우리는 이제 결정론적 계량이 결코 정해진 답을 구할 수 없다는 게 현실 차원 뿐 아니라 이론 차원에서도 그렇다는 걸 충분히 잘 알고 있다. 최소한 계량의 차원에서라면 분명히. 그러니 넘어가자.



3) 하지만 열역학의 대두와 함께 변화한 통속적인 과학관은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열역학 제2법칙, 곧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라 우주가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비가역적으로 균질한 상태로 서서히 나아가며 끝내 열죽음을 맞이할 거라는 종말론적인 세계관. 이것도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가 대표하듯, 양자역학만큼 너무나 남용된 개념이니 여기서는 넘어가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