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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중인 독서모임에서 9월에 다룬 책임.
완독하고 절망과 분노에 휩싸여 쓴 글이라 매우 장황하고 기니 주의들 하시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 제목과 저자 서문과 출판사 추천평과 당해버린 인간, 바로 나
당부의 말씀을 먼저 드린다.
1. 나는 김상욱이 나온 콘텐츠를 단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물론 김상욱한테 따귀를 맞은 적도 없다.
2. 내 한 줄 평을 읽었는가? 그렇다면 나의 비천한 감상문을 보아도 좋다……
우선, 나는 선언하고 싶다. 단백질 만세! 우웩! 바로 이 한 문장과 의성어가 이 책이 수확한 최고의 문학적 성과이다.
간혹 우리는, 예술 분야에서 최고봉으로 꼽히는 걸작들의 제목을 빌린 현시대 창작물들을 목격한다. 김상욱 작가의(이하 김 작가) 이번 책처럼 말이다. 작년이었을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일본 감독의 ⟨율리시스⟩를 본 적이 있다. ⟨율리시스⟩에서 우리는 아주 자연스레,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과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들은 고대 그리스 문학과 근대 영문학에서는 그야말로 장르 그 자체가 되어버린 작품들이다. 살아있는 창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걸작의 이름을 차용하는 행위는, 창작가가 지닌 어마어마한 야망의 크기를 증명하는 바이다. 나는 야망이 큰 창작가들에게 환호와 박수를 보내면서(브라-보!) 그들의 작품을 기꺼이 집어 든다. 위대해지고 싶은 자들은 우선 위대한 자들과 닮아야만 한다. 그래야지만 창작가의 ‘개성’을 발휘하여 과거의 위대함을 뛰어넘을 수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율리시스⟩는 똥이었다. 다행히도 1시간 14분짜리 스몰똥이었다.
나는 이틀 전에 이 책을 손에 쥐었고, 제목을 목격하자마자 전주에서의 그 경험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왜냐고? 이것이 (큰 글자 책 기준) 400페이지짜리 빅똥일지 두려웠고, 나에게 지혜를 선사해 준다면 그것이 방사능일지라도 내 몸을 던지고 싶은, 지식을 절박하게 구걸하는 한낱 추레한 문학가의 희망과 소망이 지진처럼 내면을 울렸으니까. 나는 원자를 알고 싶었고 과학을 알고 싶었다. 내가 애정해 마지않는 이탈로 칼비노가 소설가 또한 과학을 알아야 한다고 충고하셨기 때문이다.
난 책 제목에서 김 작가의 거대한 야망을 찍먹할 수 있었다. 책 제목을 보라. 누가 보더라도 명백히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오마쥬하였다. 그것은 한국 시문학의 영원한 별자리가 되어버린 작품이다. 나는 다시금 책 제목을 찬찬히 뜯어보았고, 작가가 책에서 다루게 될 분야의 다양성을 추측하며 전율했고, 이윽고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과 바람과: 기상학? 혹은 물리학? 혹은 화학?
별과: 천문학? 혹은 우주학(두 학문의 차이를 정확히 모른다)?
인간: 인문학? 혹은 문학? 혹은 철학? 혹은 사회 비평?
뒷커버 코멘트
이 책은(…)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을 위한 지도책이다
원자에서 인간까지, 한 권으로 관통하는 삶과 과학의 향연(!!!)
오메… ‘알쓸신잡’+온갖 과학 유튜브에 나오시는 분은 역시나 사유의 스케일이 다르시구먼… 게다가 원자부터 인간을 화살처럼 관통하는 한 권이라니…! 도대체 작가가 이 책에서 건드리지 않는 분야가 없겠구먼!
이봐, 김 작가! 당신은 물리학을 전공한 현대의 미켈란젤로인 것이야?
겨드랑이가 축축해졌다. 어서 책을 펼쳐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내 인생의 약 10시간은 허무히 증발했다.
마치 찜질방에서 솟구치는 수증기처럼 아주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결론적으로 이 책의 내용과 제목과 추천 코멘트는 1%도 연관성이 없었다. 만약 김 작가가 제목을 지었다면,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의 저자 송영길 선생한테서 책 제목짓기 특강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책 내용의 대부분은 교양과학 수준에 머무른다(원자 호텔은 예외다. 지구상에 ‘원자 호텔’이 실재하지 않길 바란다. 오직 원소 주기율표를 외운 자들만이 방을 찾아갈 수 있을 터이니). 교열하지 않은 듯 서술구조가 엉터리인 문장들, 해괴망측한 비유들(김 작가는 탄소를 자꾸만 비엔나 소시지와 네 팔 달린 괴물에 빗댄다. 네 팔 괴물은 그렇다 치자. 디스토피아적이고 귀엽기라도 하니까. 그런데 소시지는 대체 뭘까? 김 작가는 소시지를 가방이라고 생각하는가? 왜 자꾸 원자를 소시지에 넣으려고 하는가?)에 석고상처럼 굳어버린 손가락, 나는 페이지를 쉽사리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처음에는 보자마자 황망한 웃음이 나왔던 ‘도난’을 ‘도둑과 결합’이라고 정의한 구절은 독보적으로 시적이다. 이 부분에서 기형도의 시 몇 구절이 기억났다(이유는 모른다). 그것은…….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질투는 나의 힘)
휴일의 대부분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흔해빠진 독서)
하여튼 나는 완독했고, 지금 무척 화가 나 있다. 감히 크기를 상상할 수 없는 분노가 나를 책상 의자에 내팽개쳤다.
따라서 지금부터 화가 난 이유를 나열하겠다.
책 제목에서 나는 작가가 다양한 과학분야와 인문학을 ‘통섭’하고자 시도할테고, 사유에 따른 깨달음을 나에게 하사해주리라 기대했다. 그렇다. 창피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도, 나는 목마른 깽깽이가 되어서 10 시간이나 목을 한껏 빼 들고 혀를 헉헉거린 것이다! 허나 그것은 철저한 헛수고였다(‘목마른 강아지여, 우물은 알아서 찾으세요’라고 누가 말했던가? 맞말추). 작가는 빚독촉에 시달리는 빚쟁이처럼, 마지막 말을 남기고 빛의 속도로 책에서 퇴장하기 바빴으니까.
이제 나는 다른 분야의 전문가가 들려주는 세상 모든 것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렇게 서로가 다른 분야로 한 발짝씩 내딛다 보면 언젠가 모두가 모든 것을 이해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헤이! 김 작가! 아니, 형! 판 벌여놓고 이렇게 무책임하게 튀면 난 어떡해! 사실, 김 작가가 리처드 도킨스와 디마지오의 이론을 언급하며 ‘아, 그거 동의는 못 하겠어… 그것들은 나에게는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단 말이지……’라고 촌평할 때, 책임감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어야 했다.
글을 써놓고 보니 감상문보다는 사기꾼 피해자의 한 맺힌 절규처럼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김 작가! 단백질 만세! 우웩!
이대로 글을 끝내자니, 내 마음은 죽음만이 충만한 우주처럼 허무할 뿐이다. 마음을 추스리고자 내가 원자와 중력에 관심을 가진 이유를 잠깐 늘어놓고자 한다.
순전히 여담이니 스킵해도 좋다.
이탈리아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저서 ⟪이탈로 칼비노의 문학강의⟫ 1부 ⟨가벼움⟩파트에서 독창적인 소설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인간 중심적인 편협성에서 벗어나는 데 한없이 느린 인간의 의식이, 독창적인 소설에 의해 어떻게 단번에 그 편협성을 극복하는지를 알 수 있다. (p.130)
이어서 사례로 17세기 프랑스 소설가 베라주르크 작품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구절에서는 양배추가 나오는데, 양배추는 자신을 땅에서 무자비하게 뽑으려는 인간에게 항의한다.
“친애하는 인간 형제여, 내가 어떻게 했어야 나의 죽음이 값어치가 있어졌을까요? 난 땅에서 뽑혀 내 몸을 열고 팔을 펴서 당신에게 내 자식들을 씨앗으로 바쳤는데 당신은 내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내 머리를 자르려고 하고 있군요!”
어떻게 주둥아리 없는 양배추가 인간에게 감히 대들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사고의 출발점으로 이탈로 칼비노는 원자론을 꺼낸다. 그리고 모든 물질은 기본 입자(원자)로 이루어졌다는 원자론을 받아들인 예술가들만이, 현실을 풍자하면서도 우주적 감동을 갖춘 작품을 쓸 수 있다고 (좀 많이 어려운 문장으로) 설명한다.
이탈로 칼비노는 뉴턴 이론이 불러일으킨 문학적 반향을 소개한다. 18세기 초에 앙투안 갈랑이 날으는 양탄자가 나오는 ⟪천일야화⟫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이유는, 당시 상상력의 영역은 공중에 떠 있는 모습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뉴턴의 이론(모든 사물과 사람이 각자의 고유한 무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창작가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했고, ‘천체들을 우주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힘의 균형’을 찾는 것이 문학의 방향이라고 생각한 작가들이, ‘힘의 균형’을 텍스트로 묘사하는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김 작가가 말했듯이 과학은 현상을 설명한다. 현상은 불변하는 현실의 상태값이고, 이는 실현 가능한 것과 실현 불가능한 것 사이를 가르는 경계선이다. 픽션은 그 경계선을 능동적 혹은 수동적으로 왕래하려는 자의 구라뿐인 이야기이다. 나는 그 자의 여정을 기록하는 기록자, 즉 소설가이다. 우리는 경계선을 넘어야 하기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경계선을 지키는 파수꾼들을 공략해야 하기에, 그것들의 정체를 어느정도는 알아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파수꾼은 ‘일반 상식’과 ‘보편적 윤리’와 ‘객관적 사실’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다. 과학은 객관적 사실에 속한다.
따라서 나는 과학을 알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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