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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무더웠던 여름을 지나 본격적으로 가을 날씨에 접어들기 시작한 9월도 지나가고 있다. 독서의 계절이라는 가을을 맞아 지난 두세달 동안 읽었던 것 보단 많이 읽어보려 했지만 중간에 읽다 그만둔 책도 있고 다른데 주의를 쏟았던 적도 많이 읽진 못했다. 연휴가 있는 다음달엔 더 많이 독서할 것을 다짐하며 지난 한 달 동안 읽었던 책을 정리해보겠다.

1. 붉은 수수밭 (红高粱家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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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둥성 가오미현 태생의 소설가, 극작가이자 201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대문호 모옌(莫言, 1955 - )의 대표작인 연작소설집 붉은 수수밭을 읽어봤다. 중국 영화계의 거장 감독인 장이머우(张艺谋, 1950 - )가 본작을 각색해서 연출한 영화도 잘 알려져 있다. 내가 이책을 찾아서 읽어보게 된데에는 개인적인 경험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내가 이전에 모옌이 썼던 장편소설인 개구리(蛙)를 워낙 재밌고 감명깊게 읽었던 적이 있던 터라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었다. 개구리가 가장 최근에 출간되었던 모옌의 작품이었는데 반대로 그가 작가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된 때 집필에 몰두한 본작은 어떤 작품인지 알아보고픈 호기심이 동해서 이번 기회의 이책을 구해서 읽어봤다.

이책은 청나라 붕괴 후 군벌의 난립과 중일전쟁으로 중국이 혼란스러웠던 시절 작가의 고향인 산둥성 가오미현 둥베이 지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본작은 한때 도적질로 밥벌이를 하고 술과 도박에 빠져 살았던 한량이지만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항일 게릴라로 활동하며 일제에 항거한 할아버지 위잔아오, 돈을 밝히는 부모의 물욕으로 인해 팔려오듯이 양조장 집안에 시집을 가게되지만 빼어난 미모를 갖추고 씩씩한 마음가짐으로 난국을 헤쳐나가는 여장부였던 할머니 다이펑롄, 어린 나이에 위잔아오를 따라 항일 게릴라로 활동했던 아버지 더우관이 겪었던 일을 손자인 '나'가 그 시절 일을 회상하며 재구성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무래도 서사의 골자를 이루는 이야기는 앞서 언급한 세 등장인물의 과거사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선형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시간 개념에 얽매이지 않은 채로 등장인물의 단발적으로 떠올리는 기억을 그대로 나열해 놓는 비선형적 구조를 띄고 있다. 가령 예를 들면 더우관이 위잔아오를 따라 일본군을 공격할 매복 지점으로 이동하던 중 강변을 보고 어렸을 적 강변에서 이웃 할아버지와 게잡이를 했던 에피소드를 자세하게 떠올리는 방식으로 시점이 왔다갔다 한다. 또 분명 앞전에 등장인물이 사망한 장면을 보여줬지만 이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죽은 등장인물의 과거사로 이야기의 시제가 옮겨가기도 한다. 이는 주요 인물인 세 사람 뿐만 아니라 조연격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의 에피소드에도 해당한다. 상기한 특징 덕분에 이책을 읽어보면 연대적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회고록을 읽기 보다는 한 마을 공동체의 집단적 기억의 편린을 그러모아 재현해 놓은 인상이 든다. 또 시간 개념이 어그러진 이야기인 만큼 삶과 죽음의 경계도 허물면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본작의 특징을 한가지 더 짚고 넘어가자면, 작가가 중일전쟁이 벌어지던 중국 시골 정경과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집착에 가까우리만치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책을 읽다보면 가오미 땅에 검은 흙과 물을 먹고 꼿꼿이 자란 붉은 수수가 펼쳐진 광경을 시종일관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게 고봉밥 만치로 묘사를 떠먹여주는 것 같아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묘사된 문장이 섬세하며서도 감각적이다 보니 그시절 시골 풍경을 실감나게 옮겨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근대 중국에서 가장 난세였던 중일전쟁을 시간적 배경으로 한 만큼 혼돈과 피로 점철된 사회상도 생동감 있게 담아냈다. 군벌이 난립해 치안 공백이 발생하면서 창궐한 도적떼들의 잔학행위와 중국 사회에 뿌리깊이 자리잡은 미신적 관습의 잔혹한 일면도 고스란히 드러나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점은 작품 내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중일전쟁 중 일본군의 전쟁범죄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러했듯이 중일전쟁 동안 일본군이 중국인을 대상으로 저질렀던 학살, 강간, 잔학행위, 착취를 순화없이 날 것 그대로 묘파한다. 하지만 작가는 일본군의 만행을 글로 옮기면서 일본에 대한 적대감과 민족주의만을 부르짖지 않고 그 시절 큰 고통을 당하면서도 꿋꿋이 일제에 저항한 민초들의 삶을 조망하는데 치중한다. 섬세한 사실주의적 묘사와 윗문단에 언급한 환상적인 분위기의 내러티브는 서로 대비되는 듯 하지만 두 특징이 포개어지면서 굉장히 기묘한 조합을 이루며 본작의 완성도를 높여주는데 공헌한다. 이렇게 두 특징이 어우러지면서 본작은 옛날 옛적 산둥성 시골 동네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중국의 근대사를 함축한 거대한 서사를 환상적인 필치로 풀어낸 신화로 탈바꿈하였다.

마지막으로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보태자면, 앞서 말했듯이 저는 같은 작가가 쓴 개구리에 혹해서 이책을 찾아 읽어봤다. 그러나 개구리와는 다르게 비선형적인 내러티브와 고봉밥처럼 큼직하게 퍼다주는 묘사 때문에 처음에는 갈팡질팡하면서 이책을 읽었다. 그러나 점차 책을 읽어가면서 조각조각 나있는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맞춰 나가는데 흥미가 붙어 읽는데 속도가 붙었고, 종장부에 이르러서는 작가의 후속작과는 확연히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큰 울림을 주는 이야기에 만족을 느끼며 책장을 덮었다. 이책을 통해 모옌이라는 작가를 향한 애착과 존경심을 다시끔 확인하게 되었다. 이책의 분량이 600쪽을 넘고, 혼란스러운 시점 변경에 잔혹한 묘사 때문에 가볍게 추천을 하긴 어렵지만, 이야기 자체에 생명력과 매력이 있고 워낙 뛰어난 만듬새를 지닌 명작인 만큼 기회가 되면 한 번 읽어보는 걸 강력히 추천한다.

2. 황야의 이리 (Der Steppenwo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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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뷔르템베르크 칼프 태생의 독일계 스위스인 소설가, 시인이자 194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독문학의 대표적 작가인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 - 1962)의 장편소설 황야의 이리를 읽어봤다.내가 헤세라는 작가를 처음으로 접하게 된 작품은 그가 쓴 대표작 중 하나고 한국에도 잘 알려진 소설인 데미안(Demian)이었다. 처음엔 그냥 유명한 책이니까 어떤 책인지 궁금해서 그책을 읽었었는데, 책을 다 읽고나니 내 기대 이상이었어서 작가의 다른 책을 읽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렇게 다음 책으로는 어떤 걸 읽어볼까 고심하던 와중에 데미안을 읽어보고 좋았다면 마찬가지로 관념적인 성격을 띈 황야의 이리를 읽어보라고 추천글을 봤었다. 그걸 보고 흥미가 동해서 이번 기회의 이책을 구해서 읽어봤다.

이책은 50세를 코앞에 둔 중년 작가이자 문화평론가 하리 할러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의 줄기는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첫번째로는 할러가 세든 하숙집 주인의 조카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편집자의 서언으로, 철저히 관찰자의 시점에서 주인공이 어떤 인상을 주는 인물인지 소개하는 파트이다. 두번째로는 주인공인 하리 할러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수기로, 할러 본인이 평소에 생각한 바와 느낀 바를 털어놓는 내용도 있고, 정신적 고뇌에 빠져 도시를 배회하던 중 헤르미네라는 중성적인 미녀와 조우하면서 겪는 신비한 체험을 담은 파트이다. 마지막으로는 작중 할러가 돌연히 건네받는 소책자 '황야의 이리에 관한 소논문'으로, 알수 없는 제3자의 시점에서 할러의 사상과 정신세계를 분석하고 논평하는 파트이다.

좋게 말하면 다층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난잡한 구성을 갖춘 이책은 비록 박학다식하고 양심있는 지식인이지만 대다수 일반인의 시민적인 사고방식에 녹아들지 못하는 주인공의 정신적 방황을 조망한다. 할러는 본인을 '황야의 이리'라고 자칭하며 자신을 규칙적이고 몰개성한 시민적인 삶과는 고립된 불운한 존재라고 자학하고 자살을 기도까지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시민적인 삶을 동경하고 시민적인 삶에서 오는 안온함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이런 양가성은 하리 할러의 심상에서는 인간적인 인격과 이리적인 인격으로 분열되어 있다고 표현되기 까지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우연히 자신의 생각을 비평해 놓은 책자를 읽고 헤르미네라는 인물을 만나며,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나눠놓았던 삶에 대한 관점을 재고하게 된다. 이와 같이 본작에서 드러나는 테마 중 하나인 예술가의 고립된 삶과 시민성을 대립시키는 구도는 헤세의 또래 작가이자 당대 최고의 작가로 추앙받았던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 - 1955)이 연상되었다.

작품을 읽으면서 인상깊었던 점은 작가가 서구세계에서 지배적었던 사상을 맹렬히 비판했다는 점이다. 먼저 헤세의 칼날이 겨눈 대상은 작품 내에서 시민성으로 대변되기도 하는 근대성(Modernity)이다. 헤세가 본작을 출간한 1920년대에는 기술의 발전으로 새롭게 두각을 드러낸 라디오, 축음기, 영화관 따위의 대중매체가 엄청난 컨텐츠를 쏟아내기 시작하면서 일견 풍요의 시대를 열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작가는 하리 할러의 입을 빌려 실상은 업성에만 치중하여 몰개성한 컨텐츠를 쏟아내고 모세의 이집트 탈출 같이 성스러운 신화까지도 한낱 심심풀이 오락거리로 전락시키는 대중매체의 조야함을 준열차게 비판하였다. 작품이 발표된지 100년이 다되어 스마트폰과 스트리밍 사이트가 대중매체의 주류로 올라선 지금까지도 헤세의 주장은 씁쓸하리만치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플라톤의 철학과 기독교 신앙에 근간을 두며 서구세계에서 지배적인 사상으로 자리잡은 이원론에도 원색적인 비판을 쏟아낸다. 인도 철학과 같이 동양에서는 존재의 다양성과 다원성에 주목하며 폐기한 이원론을 서구에서는 당대까지도 집착하면서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개탄한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보태자면 상술하였듯이 나는 데미안에 이끌려서 이책을 찾아 읽어봤지만 솔직히 이책을 데미안 보다 더 재밌게 읽었던 것 같다. 구성은 데미안 보다 더 복잡한 감이 있지만 주제의식이 더 간명하고 서사를 더 흥미진진하게 이끌어가다 보니 이야기가 주는 재미가 더 컸던 것 같다. 물론 작품이 사변적인 성격을 띄고 구성이 복잡해서 아무에게나 선뜻 추천하기는 망설여지지만 풍부한 사유와 나름의 서사적인 재미를 지닌 작품인 만큼 헤세를 좋아하거나 독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일독을 권장한다.

3. 호랑이 남자 (Lelaki Harim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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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자바 섬 서부 타식말라야 태생의 소설가이자 현대 인도네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면서 인도네시아를 넘어 세계의 독자들도 매료시킨 에카 쿠르니아완 (Eka Kurniawan, 1975 - )의 스릴러 장편소설 호랑이 남자를 읽어봤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굉장히 생소한 인도네시아 소설책을 읽어보게 된데에는 내 개인적인 환경이 영향을 끼쳤다. 난는 말레이시아에서 2년이 조금 안되는 기간 동안 체류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실생활에서 좋든 싫든 마인어를 접하게 되는데, 책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마인어로 적힌 소설은 어떤 게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렇게 마인어 문학을 수소문하다가 비록 말레이시아 아니지만 똑같은 마인어를 공용어로 쓰는 인도네시아의 에카 쿠르니아완이라는 작가가 내 눈길을 끌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그의 대표 저작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길래 부커상 국제 부문에 최종 후보까지 올랐던 이책을 이번 기회에 구해 읽어봤다.

이책은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하얀 암호랑이의 혼에 씌인 마르지오라는 청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본작은 마르지오가 안와르 사닷이라는 중년 남성을 물어죽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이야기가 더 진행되는 게 아니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다음 삥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꽤나 독특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본작이 이야기를 시종일관 긴장감 있게 끌고 나가는 게 생명인 스릴러 소설이라는 걸 고려하면, 초장부터 패를 완벽히 보여주는 전개는 다소 의아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영리하게도 사건의 결과는 먼저 제시했지만 그 과정은 먼저 묻어둔 채로 시작해 과거의 일을 훑으면서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면서 긴장감 있게 서사를 이어나간다. 완급 조절도 탁월한 편이라 자칫 산만해질 수도 있을만한 구성을 가지고도 독자들로 하여금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리고 작품의 골자를 이루는 이야기는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에만 그치지 않고 그들의 가족과 주변인의 과거까지도 포괄한다. 다양한 인물들의 사연을 밀도 있게 담아냈다 보니, 작품의 분량이 200쪽을 채 넘기지 않는데도 대하소설 한 권을 읽은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이책의 특징을 한가지 더 꼽자면 본작이 초자연적이고 민담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본작에는 암호랑이의 영과 자연에 깃든 정령 같은 영적 존재가 등장하고 현실에도 물리적인 영향력을 행하는 게 당연한 것 처럼 여겨진다. 가장 지배적인 종교인 이슬람식 관습이 주를 이루지만 이슬람 전래 전부터 자리잡은 민간신앙과 힌두교 신화가 어우러진 인도네시아 특유의 문화적 풍토의 영향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본작의 서사는 마치 민담처럼 구연동화 톤의 문체로 전개된다. 주연은 물론 조연과 스쳐지나가는 엑스트라의 사연도 부산스럽게 늘어놓는 편이다. 앞서 얘기한 이책의 스릴러적 요소와 잘 어울릴까 하는 의문이 앞설 수 있지만, 작가는 두가지 상반된 성격의 작풍을 교묘하게 조합하여 어디서도 경험하기 힘든 치밀하면서도 서정적인 수작 스릴러를 만들어냈다.

마지막으로 내 개인적인 감상을 풀어보자면, 처음 이책을 집어들 때 잔뜩 부풀어 있던 기대감을 완전히 충족되진 않았지만, 작품 자체의 짜임새가 훌륭하여 잔반적으로 재밌게 책을 읽었던 것 같다. 또 이전까지 생소했던 인도네시아의 문화를 간접체험해 보는 귀중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본작에 자극적이고 잔인한 요소가 호불호가 갈릴 수 있으나 제법 재밌는데다 분량도 부담스럽지 않아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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