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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정치적인 글이라 과열되면 자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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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미사여구와 수사법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과 서유럽 등지에서 사회/정치적 논쟁이 들끓는 것은 경제적 여건의 문제일 테다. 상당히 여유로운 삶을 보장하는 서유럽 복지국가 모델과 그보단 고되지만 평균적으로 더 나은 소득을 보장하던 미국의 "성과주의적 자본주의"는 부의 유출을 겪고 있다. 이 원인을 중국 및 인도의 굴기에서 원인을 찾거나, 오프쇼어링이 야기한 국내 산업 악화나, 피케티가 제시한 자본 소득의 우세로 인한 불평등 등 여러 곳에서 찾을 수는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이 모든 것은 세계화와 맞물려 있다. 자유시장은 자본과 노동을 에워싸고 있던 선진국들의 벽을 무너뜨렸고, 장애물이 없어진 경사면을 따라 이것이 흘러넘치고 있다. 물가에 따른 높은 소득은 다른 저물가 국가에서 온 노동자로 희석되고, 한 국가 내에서 응축된 자본은 그 국가 바깥에서 생산을 이어나가며 자본 기계의 열을 모으던 단열재 바깥으로 열을 퍼뜨리고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찾아온 겨울에 더 이상 집의 온도는 평상시처럼 따스하게 유지되지 않는다. 이상의 묘사는 정치관이 강하게 반영된 묘사에 가깝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야기는 잠시 내려놓자면, 경제학자에게 있어 이런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밀라노비치의 <홀로 선 자본주의>와 슬로보디언의 <크랙업 캐피털리즘>은 각각 현재 변화의 내부 역학과 이것을 추동하는 성공 모델과 동기를 설명하는데, 덕분에 두 책의 감상을 따로 적느니 대략적으로나마 함께 정리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책 모두 계속 증가하고 있는 불평등 추세를 다루지만, 전자는 계량경제의 관점에서 각각 어떤 요인들이 작용하며 자연적으로 이 흐름을 강화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한편, 후자는 좀더 직접적으로 흐름에 관여하거나-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하게-직접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사상을 꽃피운 다양한 사례를 보여준다. 후자가 좀 더 서구적인 의미에서 정치적 자유(민주주의) 없는 경제적 자유라는 디스토피아의 승리를 논한다면, 전자는 이 형태가 현재로서는 성공적이라는 전제 하에서 이 형태를 유지하는 데에 중요한 몇 가지 요인을 논한다. (사실 이를 논하는 부분에서는 또 꽤나 이념적인 구석도 많다)


먼저 <홀로>를 정리해보자면, 역사 속에서 나타난 다양한 자본주의의 형태를 분류하며 19세기의 고전적 자본주의,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 미국의 자유 성과주의적 자본주의에 더해 중화권 국가의 국가자본주의를 하나의 자본주의 형태로 바라본다. 국가자본주의는 일본, 한국이 보여준 바 있는 수출주도형 계획경제와 비슷하지만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배제하고 대신 관료제와 지방자치를 활용한다. 각 지방에서 지방 관리직이 저마다 다양하게 시도하는 정책은 좋은 성과를 낼 경우 중앙정부의 참조 대상이 되며, 이후 전역에 도입된다. 관료는 이러한 시도 및 도입을 포함한 주요한 정책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하며, 최소한의 관직을 갖지 못한 이들의 의견이 반영되기 위해서는 뇌물이 필요하다-비꼬는 게 아니다. 국가자본주의는 서로 따로 구분되는 격자의 합으로 구성되며, 격자 안에 사는 사람의 발언권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구매되어야 한다. 부패는 국가자본주의에서 없앨 수 없는 핵심 요인이며, 가장 극심한 부패를 매번 잘라내는 식으로 지속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부패가 사회 유지에 미치는 악영향을 감소시킨다. 그러나 그 어떤 돈으로도 이 격자 전체의 구조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곧, 자본가는 현 체제와 함께하는 정치가로서만 정치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제와 정치의 일치는 자유 성과주의적 자본주의에서도 흥미롭게 볼 만한 문제다. 자유 성과주의적 자본주의는 고전적 자본주의와는 달리 부유한 사람이 노동으로도, 자본으로도 더 많은 돈을 버는 양상을 보이는데, 저자가 "호모 플루티아"라고 지칭한 이 집단은 부가 전문직 같은 더 나은 노동을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시에, 부의 재분배가 자유 성과주의적 자본주의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원인을 보여준다. 이들의 수입은 노동을 통해서 번 정당한 수입이고, 그것이 중산층이든 그 이상 부유한 이들이든 여기에 더 큰 과세를 부과하는 것은 그리 정당하지 않아 보인다.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는 적극적으로 절대적 부의 총량에 따라 과세하며 불균형의 간극을 줄여나가고자 하는데, 개중 대만은 그 수준이 상당히 강해 저자의 말마따나 "원시 공산주의"에 가까운 수준의 재분배를 보여준다. (중화권 국가의 국가자본주의와 얼마나 연관이 있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자유 성과주의적 자본주의에서 이 불균형은 당연히 과세의 감소를 야기하며, 국가가 제공하는 공적 영역이 축소된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는 세계화의 시대에 새로운 문제를 맞이하는데, 시민권과 외국인/난민 사이의 관계다. 시민권 소지자에게 국가가 제공하는 혜택은 상당한 과세에서 비롯할 뿐 아니라, 이 혜택을 제공하는 대상이-최소한 과거보다는-그리 많지 않다는 전제 하에서 보장된다. 국가는 많은 외국인에게 이것이 부분적으로만 적용되는 일종의 준시민권을 부여하며, 이들은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정치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런 지역에서 제공되는 높은 봉급은 실제로 복지 혜택의 일부이기도 하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세계화는 수많은 해외의 저봉급 노동자들이 고봉급 지역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장을 열었고, 많은 이들이 실제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 이들이 자신의 지역에서도 충분히 돈을 벌 수 있도록 저개발 국가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현실적으로 무리라면, 노동의 이동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여의치 않아 보인다. 물론 이러한 변화 자체가 세계의 불평등을 낮추고 있는 게 사실이다. 노동의 이동은 여러 저개발 국가가 글로벌 가치 사슬에 참여하는 것과 함께, 종속 이론 같은 옛 마르크스주의적 경제관을 타파하는 결과를 낳았다.


동시에 자유 성과주의적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문제 역시 강화되고 있다. 과세의 어려움과 공적 영역의 축소와 더불어, 자유 성과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에서 국가는 필히 고소득자를 위한 정치를 펼쳐야 한다. 이것은 민주적 정치 과정이 요구하는 극심한 비용 때문이며, 그 비용을 지불하는 이는 필히 투자에 대한 보답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투자자는 돈을 잃고 다른 이들에 비해 힘을 잃어버릴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자본가가 국가를 바꾸기보다는 사실상 국가의 정책 결정과 자본가의 정치력 행사가 동일해지는 결과로 수렴한다. 자본가가 국가 정책을 바꿀 수 없지만 국가와 함께하며 큰 돈을 벌 수 있는 것과, 자본가가 국가 정책을 바꿀 필요 없이 국가와 함께하며 큰 돈을 벌 수 있는 것 사이의 차이는 점차 줄어들며, 미국은 정치적 과두정을 넘어 자본가와 정치가가 비슷하게 일치되는 지점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성공적일지도 모른다 - 이것을 음울하게 바라보는 것은 선진국민만의 관점일지도 모르니까 - 애석하게도 한국은 이제 선진국민 쪽에 더 가까워졌지만) 밀라노비치는 암울하게 느껴지는 전망을 암울하게 바라보는 동시에 그것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긍정하는 더 암울한 어조로 말하며 즐기는 특이한 수사법을 사용하는 것 같다.


<크랙업>에서는 조금 다른 관점을 취한다. 홍콩과 싱가포르가 보여준 성공에 감탄해, 정치적 그물에 붙잡히지 않고 오직 경제적 자유만이 보장되는 조그마한 "구역"을 세계 곳곳에 만들고자 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의 꿈이 현재의 변화, 곧 국가의 공적인 영역을 없애고 자그마한 지역마다 자기들의 시설을 따로 만드는 쪼개진crack-up 국가를 적극적으로 불러왔다는 것이다. 이 사상의 흐름은 밀턴 프리드먼의 다소 소박한 자유지상주의에서 로스바드와 호페의 무정부주의적 시장급진주의까지 이어지며, 영국 카나리 워프, 남아공 반투스탄, 미국 남부 분리독립, 미국 외부인 출입 제한 거주지, 리히텐슈타인과 조세회피처, 소말리아, 두바이의 버블 돔, 실리콘밸리와 온두라스, 메타버스까지 다양한 사례의 구역 건설 및 그 성공과 실패를 다룬다. 이 구역은 다소 역설적이게도 내부 정치가 무효화되도록 외부 정치에 의해 유지되며, 복잡한 문제없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보편적인 미끼를 내걸어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자본을 유치한다. 그 외에도 본격적으로 개인이 국가에서 큰 돈을 끌어와 그곳과 무관한 곳에 저축하거나 사용할 수 있는 국제 금융 인프라 구축과 이 인프라에서 부정부패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방법을 알려주는 부패의 허브로서의 런던이 이 과정의 핵심에 서 있다.


싱가포르의 성공은 국가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자본주의 형태의 시작을 알1리는 효시였던 반면, 홍콩의 성공은 자유지상주의 자본주의자에게 쾌재나 다름없었다. 이곳에서 국가는 최소한의 인프라를 만들고 유지하는 역할만을 하며, 사업을 위한 일종의 예외적 구역으로서 사업 이외의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배제해 당대 세계에서 그 어느 곳보다도 자유 시장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밀턴 프리드먼은 홍콩을 여러번 찾으며 홍콩의 성공을 세계 곳곳에서 재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애석하게도 칠레를 포함해 대체로 장기적으로 성공적이진 않았다-홍콩과 비슷한 구역이 세계 곳곳에 만들어졌다. 중국에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홍콩을 중국에 흡수하기 위해서라도, 홍콩과 비슷한 경제구역을 선전에 만들었고 이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해외의 돈을 끌어오는 데에 성공했다. 두바이 역시 주변 중동 정세 사이에서 좋은 기회를 찾아, 영국의 구역에서 중동의 구역으로 새로 거듭나며 거주민의 권리를 극히 최소화하고 다양한 기업체가 진입할 수 있는 모종의 버블 돔들로 구성된 구역'들'을 만들어나갔다. 이런 성공적인 사례들과는 달리, 다른 구역 사례는-한국의 송도를 포함해-대체로 실패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례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반투스탄이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넓은 면적과 극히 부족한 인프라를 감안할 때, 아파르트헤이트는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주변의 유목 흑인들을 강제로 수용시킨 각각의 구역들, 반투스탄은 해외에는 수많은 다양한 정치체제 공동체가 공존하는 패치워크처럼 소개되었다. 각각의 반투스탄은 저마다 자기들만의 규칙을 따르고, 어떤 곳에서는 철지난 마르크스주의가 여전히 성경처럼 받들어 모셔지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완전히 자동화된 기계 체계 속에 둘러싸인 기업가들이 유토피아를 즐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는 중국의 국가자본주의가 돌아가는 방식과 비슷하지만, 애석하게도 남아프리카에서는 완전히 실패했다. 각각의 구역은 그 어떤 독립성도 갖지 못했고, 해외에서 진출한 기업체는 국가가 제공하는 세수 혜택뿐 아니라 보조금을 빨아먹는 수준에 그쳤다. 이 구역들에 정치가 부재한 것이 문제라기보다는, 그 구역 내에서 어떻게 사업을 이끌어야 하는가 하는 비전이 없었던 것이 더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한국인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반면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국가를 찢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개인들 역시 존재한다. 로스바드의 말을 빌려 "국가의 행복한 죽123456789음"을 믿은 시장급진주의자들은 남부 분리독립을 비롯해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 내부에서 자기들만의 구역을 만들고자 했다. 냉전 종식 이후 수많은 민족국가의 독립이 이어졌던 90년대를 시작으로 이들은 여러 국가의 독립을 지지하는 동시에 스페인의 카탈루냐, 캐나다의 퀘벡 등 다른 국가에서도 적극적으로 일부 집단의 분리독립을 유도하고자 했다. 수많은 도시국가의 패치워크로 만들어진 중세야말로 이들의 이상향이었고, 미국이 노직이 제시한 최소국가론을 넘어서 호페의-굳이 숨기지 않고 차별적인-문화적, 민족적 독립 집단으로 확실하게 분리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2025년 현재 미국의 분란을 바라보면 그 믿음이 나름대로 힘을 발휘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굳이 이것이 성공하진 못했더라도, 미국에서 수많은 '구역'을 만드는 수준까지는 확실히 성공했다. 이러한 구역의 형성과 더불어 개인이 자신이 끌어올 수 있는 모든 자본을 공적 영역에서 끌어와 '사유화'-혹은 시쳇말로는, 횡령-해 도망치는 것이 가능해졌다. 엑싯이 비즈니스 용어가 아니라 일반 용어가 된 현재 상황을 보면 약간 우습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동일한 상황을 서로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두 책이 꽤나 조응하는데, 서로가 서로의 분석에서 빠져 있는 부분을 적극적으로 채워주는 방식이라 더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두 책 모두 살짝 언급하는, 현재의 추세에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결말이 하나 남아 있다. 국가자본주의와 자유 성과주의적 자본주의도, 구역과 자본가도 해결하거나 안전할 수 없는 기후 변화의 문제. 충분히 돈을 벌어 국가로부터 빠져나온 사람들이 늘 찾는 것이 기후 변화로부터 안전한 서식지 혹은 해양 구조물인 것은 꽤나 골계스럽다. 하나가 되어 뜨겁게 달아오르는 자본 기계의 열이 서구권에서 전세계로 퍼지든, 건물에 구멍을 뚫어 열을 빼내는 도둑들의 작은 방에 들어차든, 열이 계속 끓어오르며 아래 지반을 녹이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상당히 즐겁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