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에 신곡의 한 구절에서 시작해서 문학사조의 연결성에 대해 생각해 본 글을 올렸는데 삭제가 되었네요


형식적으론 삭제지침을 어긴게 없었다 생각했지만 내용적으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미의 가치나 불교에 대해서 한 이야기가 충분하지 않은 근거로 공격적으로 말하는 것 처럼 보인게 이유였을 수도 있다고 보고 


혹시 그런거라면 이 게시판을 이용하고 싶은 입장에서 좀 더 게시판 취지의 룰에 대한 쓰는 자로서의 의무를 다해보려고 합니다 



하는김에 월간독갤의 소재로 선정된 20세기에 속하는 모더니즘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불교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하니 월간독갤 투고를 목표로 하진 않습니다만






아무튼


관련된 책은 


로렌스 앨로웨이의 '시스템으로 표현된 예술세계' 로 하겠습니다


20세기의 놀라운 발견! 이라던가 아주 새롭고 특별한 내용은 전혀 아니지만 잭슨 폴록의 해체로 대표되는 후기 모더니즘을 다시 '도구'로 포괄하여


앤디 워홀이 실크 스크린에서 찍어내는 얼룩말(짤방의 구체적인 작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진보의 관점에 있는 같은 쉐입에 다른 프린팅이라는 관점) 


들이 세상에 나오고 팝 아트로 관심을 끌 수 있었던 이유를 짐작케 하는 변화의 지점을 포착한 저서라고 생각해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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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으로 표현된 예술세계도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적 사고의 또 다른 예이자 표현입니다


불교를 말하는 이유는


불교가 그런 귀납적 사고도 연역으로 전환되고 그 연역이 다시 더 넓은 귀납으로 깨지는 이성 작용의 과정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 대한 메타인지며 거기에 개입을 하려 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좀 더 상세하게 설명을 해보자면


힌두교는 자연의 순환을 인간 세계의 법칙의 틀로 삼았고 그 순환의 과정을 제사로 개입(정확히는 깨진 순환의 복원)할 수 있다고 정해서 그 제사를 행하는 언어를 독점한 브라만이


순환의 구조를 독점하였고 그 독점을 풀고자 시도하는 것이 불교라는 것이긴 한데 그게 하늘에서 떨어진 한 사람의 천재가 무아지경에서 생각해낸 것이 아니고 


브라만교 내부에서 우파니샤드가 먼저 그 독점의 문제에 대해서 지적하고 제사의 도구적 가치에 대해 인식하고 그 권위를 해체하려고 시도를 했고 그 새로운 도구가 브라만(절대진리)과 아트만(개인)의 내적합일로 이르는 해탈이었습니다

 


제사를 통하지 않고 도달하는 내적합일은 우파니샤드에서 나온 것이고 그 제사를 통하지 않는 구00원을 브라만이 아닌 모두에게 나눠주는 시도가 불교인 것이죠


그리고 힌두의 제사는 소마(환각풀)를 태울동안 만트라(주문)을 외운 브라만이 그걸 읊은 소리가 사라지면 그것이 효력을 갖는다는 구조이고 


이는 동아시아 전반에서 축문(글)을 태워서 없애고 거기서 발생한 연기를 날려 보내면 제사의 효력이 생긴다고 믿는 유교의 제례와도 같은 구조이죠


둘 사이에 영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고 지금 여기선 추측도 하지않습니다만


그런 행위가 대중화로 또 다른 도구의 전환이란 맥락에서 설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두 외우는 것보다 써놓은 걸 읽는게 쉽고 쓰고 읽는 것보다 누가 썼든 가져가서 태우는게 더 쉽다는 것이고



공동체가 발전하고 국가의 형태를 갖추면 


단순히 고대사회 최고의 덕목 생존(운 좋은 자)을 오래 이루고 묻힌 선조에게 비는 기복신앙에서 



더 복잡한 종교적 요구를 갖게 되기도 하고 그 기복신앙을 압도해야하는 맥락에서도 집권적인 관념적 시스템이 필요해집니다만



그렇게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출현하여 기복신앙이 찍어 눌러진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고 그 해체를 기반으로 다시 복원이 될 수 밖에 없는 사례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복신앙-해체-중앙집권적 국가의 요구를 충족하는 종교-해체-보편화된 제사,불교


물론 유교에도 인의예지의 학과 수양에서 훈고학으로 또 성리학으로 더 복잡한 전환이 있지만 다른 문화와 국가에서도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전환이란 거시적인 관점이 있다고요



그런 관점에서 벗어나는 해석이


색즉시공이란 교리에 천착해서 양자역학을 보고 부처를 물리학자로 만드는 시도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교리나 어떤 사조의 추구의 맥락이나 목적성을 거세하고 그 자체에 집착하는 것은 전환에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퇴행이란 것입니다


그것은 낭만-탐미주의에서도 일어나고 모더니즘-후기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에서도 일어나고 


그리스도교나 불교의 신학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목적에 관심이 없어도 일단 따라하고 보는게 인간이니까요


다만 불교는 그 스스로 그런 전환 전체를 보는 메타인지를 자처하고 그 고리를 끊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졌기 때문에 여기서 일어나는 퇴행은 좀 더 자폐적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그건 큰 나무일수록 그림자도 짙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불교 자체를 비하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만큼 거대한 사유 구조를 가짐으로서 따르는 필연적인 내적 긴장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하지만 뭐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죠



아무튼 그렇고


이 이야기들의 연장에 있는 앨로웨이의 네트워크는 폴록과 워홀을 연결하여 이해하는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건 이성작용의 순환적 딜레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귀납이 닫히고 연역이 열리고 귀납이 다시 열리면 연역이 사라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색즉시공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겁니다


폴록의 자율성은 정치적 맥락을 고려한 자본주의 기하학이 높게 평가하는 것으로 포획되고 그 포획을 해체하기 위해서 자본주의의 시스템을 그대로 도구로 사용하는 것 자체를 수단으로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브라만과 우파니샤드 불교사이의 전환이라는 거시적 관점의 이해와 닮아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물론 그렇게 하나하나 카테고리에 걸어서 전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거시적 관점에서의 이해가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정도의 이야기지


그 관점에서 퇴행이라는 말로 내가 다소 모욕적으로 묘사를 했더라도 그 속에서 각자가 미시적으로 이룬 모둔 성취 또한 인간을 숭고하게 만드는 다원성임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