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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외도네(J. Dieudonne)는 어디선가 수학을 연구한다는 것에 '인류의 명예'라는 이유 이상의 정당화는 필요치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 문제의 관건은 이런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일종의 원죄적이고 치유 불가능한 죄책감이 주는 암울한 감정을 음미해야 하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보통 다소 허구적으로 구분한 요건과 타협하기 위해 한층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타협의 가능성을 중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브뤼노 라뚜르가 제시한 '응용 불가능한 응용연구'(RANA, recherche appliquee non applicable)라는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힙니다. 이런 개념은 자아분석에서 가장 회의적이고 절망적인—대부분 회의와 절망은 같은 현상이죠—영감에 과학성의 라벨을 붙여준 것에 불과합니다. 1968년 5월 운동에서 비롯된 공동성찰에서 나온 다음과 같은 꽤 멋있는 표현도 결국은 같은 맥락의 의식입니다.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해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연구자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반쪽 분석은 비판적인 급진주의의 형상을 띠고 있지만 실제로는 가장 일반적인 기대를 만족시켜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비판적 성찰, 즉 건설적인 성찰을 유도하기보다는 오히려 과학적 실천에 대한 회의주의를 장려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건설적인 비전을 통한 이해와 변화보다는 통제와 제약을 가하는데 더 관심이 있는 기관 간부들의 경영마인드에 무기를 제공할 뿐입니다.


—『과학의 사회적 사용』 中




부르디외의 글들은 이래저래 비트겐과 맑스를 오간다는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