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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후안 룰포의 「불타는 평원」을 읽고 대략 '내용은 와닿지 않아도 기교가 참신했다'라고 평한 적이 있다. 특히 시점을 자유자재로 바꾸며 이야기를 다채로이 전개하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그리고 룰포의 유일한 장편 소설인 「페드로 파라모」는 이 장점이 극대화된 작품이었다. 시점이 예고 없이 자주 변해서 난해하기는 했다. 포크너의 「내가 누워 죽어갈 때」에서 각 장의 소제목을 빼고 글을 이어붙인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한 사람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마치 한 사람을 중심으로 펼쳐진 거미줄을 보는 느낌으로 감상했다. 더구나 생자와 사자의 경계를 허무는 특유의 세계관도 인상적이었다. 멕시코의 근대사나 생활상에 대해 잘 몰라도 훌륭한 체험이었다.


앞서 이 소설의 구조를 거미줄로 비유했는데, 화자는 후안 프레시아도지만 거미줄의 중심은 단연 제목 그대로 페드로 파라모다. '페드로'는 예수의 사도 베드로에서 따온 이름이고, '파라모'는 황무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대략 황무지의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풀이할 수 있겠는데, 실제로 페드로 파라모의 행적을 보면 성인(聖人)과는 거리가 멀다. 토호로서 음흉한 간계를 꾸미고 사람들을 해치던 작자다. 그러면서도 더 포악한 자식에게는 관대해서, 결단력이 마냥 좋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인물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땅에서는 베드로가 성인일 것이다. 그러나 척박하며 인심을 기대하기 어려운 황무지에서는 페드로 파라모가 가장 훌륭한 삶을 사는 셈이다. 그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힌 성자다.


그러나 페드로 파라모의 모든 욕망이 충족된 것은 아니다. 여자들을 그렇게 많이 채가고 수많은 자손을 낳았음에도, 그의 마지막 사랑이자 유일하게 진정한 사랑이었던 수사나와는 결실다운 결실을 맺지 못했다. 페드로 파라모는 살기 위해 사람들을 정복해왔다. 하지만 정복하는 힘으로 사랑까지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수사나가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그런 것도 크기는 했지만, 페드로 파라모는 수사나를 실체인지 환영인지도 모르는 플로렌시오로부터 완전히 떼어내지 못했다.) 생존을 위해 명분을 만들고, 생존을 위해 혁명을 일으킨다. 생존을 위해 사람들이 무엇이든 벌이는 곳이 페드로 파라모의 멕시코였다. 생존을 위한 폭력은 생존 이상의 것을 불러올 수 없다. 남은 것은 그럭저럭 채워진 배와 영영 채울 수 없는 갈증일 뿐이었다. 코말라에서 이룰 것은 다 이뤘으면서도 페드로 파라모가 코말라를 저주하며 죽은 것은 이 허망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한편 페드로 파라모의 사연도 깊지만, 그의 행적으로 타인에게 맺힌 사연들 또한 깊다. 「페드로 파라모」가 직선이 아니라 거미줄 모양으로 짜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길에서 스치는 모든 행인들에게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페드로 파라모의 이야기는 작중의 현재 시점까지 힘을 발휘하고는 있지만 결국 과거의 이야기다. 하지만 사람은 과거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일순간에 안타깝게 놓친 것을 평생토록 후회하고, 이루지 못할 것이 드러난 꿈에도 평생을 묻혀 사는 존재가 인간이다. 오죽하면 한을 품은 사람은 죽어서 귀신이 된다는 설화가 전세계에 있겠는가. 과거의 미련은 살아있는 사람들까지 움직이게 만들고, 과거의 미련이 삽화로 들어간 새 이야기를 쓰게 만든다. 후안 프레시아도가 코말라를 찾은 것도 결국에는 어머니의 회한이 담긴 계시 때문이었다. "너는 그곳에서 내가 원하던 것을 찾게 될 게다.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에서. 나를 야위게 만들었던 꿈들이 있는 곳, 나무와 숲이 빽빽하게 늘어선 곳, 추억거리가 마치 성당의 헌금처럼 차곡차곡 쌓이는 곳. 그곳에서 너는 느낄 것이다. 사람들이 영원히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사람은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이나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다고 해도 유한한 존재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따라서 모두가 평등하게 삶에 회한을 갖는다. 심지어는 꿈을 이룰 수도 없는 존재이기에 태어난 것을 스스로 저주하기도 한다. 살기 위해 아등바등 버티고 폭력으로 다른 삶을 억누르기도 하지만, 결국 채워지지 않는 갈증 속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 아닐까.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도 없으면서 부(富)니 혁명이니 하는 것들이 무슨 소용인가. 당장 가장 원하는 마음과 영원과 행복을 얻을 수 없는데. 「페드로 파라모」든 멕시코의 실제 역사든, 결국 채울 수 없는 욕심들 속에서 한바탕 해보려고 부린 폭력이 오히려 슬픔을 심화시켰다. 폭력과 이별과 상처는 대물림되어, 과거의 그림자가 현재의 낮을 어둡게 만든다. 유사 이래로 사람들은 이 굴레에 갇혀 살아왔고, 전세계적으로 문명화가 많이 이뤄진 지금은 노골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더 은밀하고 음흉한 방식으로 공허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이 굴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모든 욕심을 기꺼이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멕시코든 어디든 역사는 피로 계속 쓰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페드로 파라모」는 결국 보편적인 이야기인 것 같다. 세상의 인연들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저마다의 회한이 새로운 핵이 되어 새 거미줄을 펼쳐나간다. 이 이야기에 끝이란 없다. 단지 영영 닿지 않을 어딘가로 애써서, 때로는 부정한 방법까지 써가며 뻗어가고 있을 뿐이다. 이런 시대에 정말로 베드로라도 나타나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알려주면 좋으련만, 세계의 꼭대기에는 황무지의 베드로가 우리를 비웃음을 머금고 내려보고 있다. 그런 그도 자기보다 위를 꿈꾸다가 언젠가 고꾸라질 운명이지만. 우리 인간이라는 허무한 족속은 무엇을 얼마만큼 꿈꿔야 할까? 유한한 존재의 분에 맞는 꿈은 무엇일까? 우리는 욕심을 끊을 수 있을까? 우리의 발자취는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여러 생각이 밀려드는 하루다.